오피니언
시장경제칼럼

[시장경제칼럼] 국민의 생명, 자유와 행복, 그리고 이 시대 국가가 해야 할 바람직한 역할

2020년 9월 하순, 추석을 며칠 앞두고 대한민국 해양수산부의 어업지도선 공무원 이 모씨가 실종되었다. 그가 북한앞바다에서 구조되고 송환된 것이 아니라 북한의 총격에 의하여 사망하고 소각되었다고 하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청와대의 국가안보실은 9월 25일 오전 북한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 명의로 청와대 대통령실에 전해온 통지문을 공표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훈 국가안보실장은 3대 세습 독재자 김정은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을 전하라”는 말을 높게 평가했을 뿐, 북한에 대해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 요구는 물론 북한의 반 인권적 처사에 대한 규탄도 전혀 하지 않았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정을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더불어민주당 출신 국정담당자들은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전과 자유를 위하여 국가권력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표명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 자신도 자신이 취임하면서 선서했던 내용을 잊은 듯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69조를 상기시켜보면 대통령에 취임하는 사람은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라는 내용의 선서를 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한 대한민국 국민, 그것도 엄연한 공무원의 자유와 복리가 북한의 피격 앞에 무참히 스러졌는데도 대통령이 나서서 진상조사 요구와 규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그리고 문재인 정권은 노무현 정권 때에 이어 유엔의 북한인권 결의안 채택에도 기권을 하는 치욕적이고 굴종적인 선택을 했다. 아울러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음에도 북한이 마치 핵개발을 포기할 의사가 있는 듯이 국민과 세계 각국을 속여 왔다. 2020년 9월 22일 유엔총회 화상연설에서는 “종전선언이야말로 한반도에서 비핵화와 함께 항구적 평화체제의 길을 여는 문이 될 것”이라고까지 했다.남북 간에는 1972년 공동성명, 그리고 1991년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등에 의하여 이미 전쟁에 의한 통일이 아닌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이 합의되었음에도, 즉 사실상 종전상태임에도 새삼스레 종전선언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직 주사파의 구호인 ‘반전반핵 양키고홈’의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즉 휴전협정이 ‘유엔군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에서의 군사정전협정’인 만큼, 유엔이 종전선언을 하면 유엔군(주로 미군)이 휴전선을 관리하지 않게 되고 문재인 정부가 대놓고 친북적인 행태를 할 디딤돌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미상호방위조약마저 파기하게 되면 미군철수까지 요구할 디딤돌까지 마련할 수 있게 된다.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에 참석한 북한 김씨 세습독재정권의 김여정에게 북한이 지휘했던 대남혁명 기구인 통일혁명당 간부인 신영복을 존경한다고 ‘신앙고백’을 하는가 하면(2018년 2월 9일), 김원봉을 언급하면서 좌우합작으로 국군의 뿌리가 완성되었다고 기상천외한 새로운 해석(2019년 6월 6일)을 내놓기도 하였다.이런 우려스러운 경향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헌법을 제정할 때부터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전문에 명시하였던 범국민적 합의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의 지금의 10차 헌법에서도 이러한 정신을 흔들림 없이 “다짐”하고 있기에, 여전히 용납할 수 없는 행태들이다.지금 남북한 헌법 간의 비교를 해보면 대비가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법제상으로도 대한민국 헌법에는 인류 역사 속에서 확립된 ‘권리장전’이 ‘국민의 권리와 의무’라는 형태로 가장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헌법은 ‘노예제 헌법’답게 개인은 무시되고 집단주의 원칙이 우위에 있으며, 국가의 폭력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국가를 통한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견은 발표될 수 없고, 직업선택, 거주이전의 자유 등도 없으며, ‘공민은 인민의 정치사상적 통일과 단결을 견결히 수호하여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날 경우에는 그 순간 공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한다.일찍이 맨서 올슨(Mancur Olson)은 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힘의 논리(logic of force)를 이해해야 하며, 안정적인 국가는 유랑형 도적의 행태보다는 정주형 도적의 행태에 가깝게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정주형 도적’ 체제 하에서도 모든 사람이 그 ‘조직된 폭력’에 신민으로서 귀속하는 체제보다는 국민 다수에 의해서 그 ‘조직된 폭력’이 순치되는 체제가 훨씬 더 바람직할 것이다. 민주화운동은 ‘조직된 폭력’이 국민 다수에 의해서 확실하게 순치되도록 하였다.이런 기준에서 보면, 민주화운동이 없었던 북한은 원시적인 형태의 ‘조직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는 과거 대한민국에서의 장기집권 사례는 저리가라 할 정도의 김일성 장기집권은 물론, 김씨 일가의 세습독재까지 자행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김씨 일가의 세습독재를 타파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길만이 국가를 원시적인 ‘조직된 폭력’에서 벗어나 자유수호 체제로 선진화시키는 길이다.그런데 정작 대한민국에서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문재인 정부가 자유민주주의 정착에 힘쓰기보다, 북한처럼 민족사회주의 선동가와 선동조직(조선로동당)이 지배하는 체제와 가깝게 지내고, 심지어는 북한과 말을 맞추어(?) 이견 그룹을 ‘토착왜구’라 지칭하고 공격하는가 하면, 대한민국에 토지공개념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 그 체제의 제도들을 도입하는 쪽으로 퇴보해간다는 것은 민족사적 불행이 아닐 수 없다.민족사회주의에 한술 더 떠 국가주의의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19를 빙자하여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시에 대해서도 계엄 상태와 같이 대처하며 헌법상 보장되어 있는 집회 시위의 권리까지 박탈하고 있다. 친위대적 성격을 띠고 있는 민노총 시위대의 집회는 코로나19 전파와 관련이 없고, 산발적인 광화문 집회는 코로나19주범으로 매도하고 있다. 2500대에 이르는 민노총 차량시위는 괜찮고, 반문시위 차량은 9대 이내로 그것도 엄격한 조건을 따를 때만 허용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권력이 살아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꼭 보여주기 바란다.”(2020.8.21. 발언)고 한 엄포는 국가주의의 본색을 드러낸다.대한민국 헌법 제21조에는 “①모든 국민은 언론ㆍ출판의 자유와 집회ㆍ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②언론ㆍ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ㆍ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 영향을 끼쳤던, 거대한 나라에서 최초의 민주주의를 이룩했던 미국의 권리장전 수정헌법 제1조에서도 “미국 의회는 … 언론 또는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인민이 평화롭게 집회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것에 대한 법률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우리의 헌법과 이 규정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대한민국은 북한처럼 민족사회주의 독재국가로 퇴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대한민국 주도로 북한민주화 북한 핵 폐기를 이끌어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국정담당자들이 해야 할 바람직한 역할이다.박종운 자유민주시민연합 사무총장

2020-10-05 10:31 박종운 자유민주시민연합 사무총장

[시장경제칼럼] 경기 불황 극복, 실패한 역사 아닌 1920년 불황에서 배워야

조범수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부생코로나19 확산의 충격으로 세계 경제가 침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주식 시장은 미국을 필두로 각국이 경기부양을 명목으로 급속한 통화 확장 정책을 펼치면서 반등하고 있지만, 실물 경제는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금융과 실물 경제 간의 괴리가 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확대하면서 2019년부터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경기불황론’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경기 불황을 논할 때면 어김없이 미국의 대공황과 2008년 금융위기가 거론된다. 그래서인지 불황에 대한 대응책도 이들 사례를 본보기 삼아 시행하려고 한다. 당장 문재인 정부가 ‘한국판 뉴딜’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는 것도 결국 대공황 시기 루스벨트의 정책을 모방하겠다는 선언이다. 전례 없는 수준의 무책임한 통화 증발도 역시 2008년 경제위기의 대응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다.하지만 대공황과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외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실패의 역사다. 후대 역사학자들에 의해 ‘뉴딜’이라 명명된 FDR의 경제정책은 경기 침체를 무려 15년여 동안 전례 없는 수준으로 지속시킨 총체적 실패였고, 2008년 이후 각국 정부에서 시행한 확장적 재정 및 통화 정책은 불가피한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며 경제적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불황의 역사에서 정부 대응의 본보기를 찾을 요량이라면 그보다는 1920년 불황에 주목해야 한다.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시 경제로 복귀한 후 처음 몇 달은 기업들이 높은 수익을 내며 경제를 성장시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20년부터 급격히 경기가 얼어붙기 시작한다. 금융 전문가 제임스 그랜트에 따르면 1920년부터 1년 간 산업생산지수는 무려 31.6% 하락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2007년부터 2년 동안의 산업생산지수 낙폭이 16.9%에 그쳤던 것을 고려하면, 가히 ‘추락’ 수준이었다. 자동차 생산은 자그마치 60%가 감소했고 실업률은 15.3%에 달했다. 한편 1년여 동안 도매 물가는 36.8%, 소비자 물가는 10.8%, 농산물 가격은 무려 41.3% 급락했다. 하락의 속도를 기준으로 하면 대공황의 기록조차도 1920년 불황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윤이 급격히 감소하고 기업들이 우후죽순 도산하여 시민들이 거리에 내앉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그렇지만 이토록 위중했던 침체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18개월 동안 고꾸라지던 산업생산지수는 1922년 60% 증가했고, 1923년에는 실업률이 완전고용수준인 2.4%로 내려갔다. 미국의 산업생산지수가 2020년 재에도 2005년 수준에서 정체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에 1920-21년의 불황은 급격한 침체와 매우 왕성한 회복으로 특징지어지곤 한다.어떠한 정책이 이러한 눈부신 반등을 가능케 했을까. 케인스가 말한 것처럼 지폐를 채워 넣은 빈 병을 폐광에 묻어서라도 재정지출을 늘린 것일까? 아니면 대대적인 양적완화라도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당시 워런 하딩 정부는 도리어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대폭 축소했다. 이렇다 할 경제안정화 정책도, 경기부양책도 실시하지 않았다. 하딩 행정부의 대응은 오늘날 주류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의 눈에 매우 비상식적일 것이다. 정부의 방임적 정책이 어떻게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선 경기변동이론(business cycle theory)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경기변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황기(bust)에 선행하는 호황기(boom)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알아야 한다. 경기변동 상의 호황기는 정부의 인위적인 신용 팽창이 기업가들의 과오투자를 양산하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과오투자는 경제의 실제 저축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따라서 호황기는 지속불가능하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불황이 온다. 이 불황기에 기업들의 낭비적인 투자 과제가 청산되고 이에 마찰적 실업이 발생하며, 신용이 축소되면서 전반적인 물가가 하락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왜곡된 생산구조를 경제 주체의 실제 소비-투자 비율에 따라 재정비하여 지속가능한 경제 발전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불황기에 이 같은 조정 과정을 방해하는 정부 개입은 경제 회복을 지연시킬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경기변동의 씨앗이 될 수밖에 없다. 청산 과정이 효과적으로 신속히 진행되기 위해서는, 각종 세금이나 규제와 같이 경제에 경직성을 유발하는 요소가 최소화되어야 한다.위 이론에서 유추할 수 있듯 1920년의 불황 전에도 무분별한 신용 팽창이 있었다. 우선 1913년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 of 1913)으로 연방준비제도가 창설되면서 은행의 법정지급준비율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연준 이전의 국립은행들은 평균적으로 20%의 지급준비금을 보유해야 했는데, 연준이 이를 10%로 인하한 것이다. 여기에 미국이 1차대전 참전하게 되면서 의회는 막대한 전시재정을 편성했고 연준은 통화공급을 두 배가량 늘리면서 할인율 또한 낮게 유지시켰다. 이러한 인위적인 신용 창조는 경기변동에 불을 지폈고 결국 1919년부터 연준은 긴축 정책을 시행하게 되고, 버스트가 오면서 불황이 발행했다. 그런데 하딩 행정부는 1920년부터 22년까지 정부 예산을 절반으로 삭감했고 국가 부채를 1/3수준으로 줄였으며 모든 계층에 대해 감세를 실시했다. 그 결과 미국의 경제는 18개월 만에 다시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워런 하딩은 사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에 꼽힐 정도로 평판이 매우 안 좋다. 애초에 당내 알력으로 얼떨결에 대통령 후보에 오른 인물인 데다가, 친구에게 스스로 자신이 대통령직에 적합하지 않다고 털어놓기도 했고, 또 각종 부패 및 스캔들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불황기에 하딩 정부가 취했던 ‘방임적’ 태도를 많은 역사학자들의 눈을 통해 단지 무능과 태만의 결과처럼 치부하고 있다. 하지만 사료를 통해 하딩의 연설문을 살펴보면 그가 기술적이거나 이론적인 전문성은 아니어도 경제의 작동원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딩은 1921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리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떠한 법령도 냉혹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는 점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 경제라는 것은 굉장히 정교하고 모든 부분들이 상호의존적인데, 비정상적인 수요와 신용 팽창, 그리고 물가 폭등이 이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정상적인 균형을 되찾아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낭비벽에 대한 벌(penalties)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며 고르게 안배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1918년 전세계적으로 8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을 재조명한다. 하지만 스페인 독감 범유행에 뒤 이은 1920년의 경제 불황을 이야기하는 논자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이 사건이 ‘잊혀 진 불황(the forgotten depression)’으로 불리는 연유다. 하지만 상황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 중앙은행은 경기부양을 위해 저금리 정책으로 시중에 엄청난 양의 돈을 풀었다. 2010년부터 올해 8월까지 미국의 M2는 무려 약 120% 증가했고, 한국은 약 90% 증가했다. 여기에 최근 코로나19로 얼어붙은 경기를 부양시키기 위해 ‘전시 재정’ 수준으로 정부 지출을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직접적으로 전시 재정 편성을 각오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통화 팽창과 ‘전시 재정’, 그리고 팬데믹까지-1920-21년 불황 이전의 상황과 상당히 흡사하다.1920년 ‘잊혀진 불황’의 사례는 코로나19 시대의 경제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한다. 먼저, 작금의 경제 둔화 현상은 코로나19로 ‘가시화’된 경기 침체의 전조 증상일 뿐이기 때문에, 역병 자체가 불황의 원인은 아니다. 스페인 독감을 1920년 불황의 본질적 원인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코로나19와 같은 실물 측면의 요인은 저축의 양을 감소시키거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악화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붐-버스트 사이클과는 무관하다. 그보다는 최근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이 전례 없는 규모로 확장적 통화정책을 실시해 자산 가격이 오르고 있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실물 경제가 뒷받침하지 않는 자산 가격의 거품이 꺼지면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20년 가까이 시민들을 괴롭혔던 대공황의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1920-21년의 ‘잊혀 진 불황’에서 배워야 한다. 정부의 통화 정책으로 왜곡된 생산 구조를 과감히 청산하여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의 기틀을 다져야 하고, 신산한 조정 과정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경제 전반에 걸친 경직적 장치들을 제거해야 한다. 세금을 거둬 공공일자리를 만들고 신산업을 정부가 육성하고 각종 규제를 통해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키우겠다는, 소위 ‘한국판 뉴딜’은 시민들의 고통을 장기적으로 가중시킬 뿐이다.조범수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부생

2020-09-28 15:16 조범수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부생

[시장경제칼럼] BTS와 Blackpink의 성공 구조 - 신분취득 사회의 예외 영역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BTS는 빌보드차트 2주 연속 1위에 있고 Blackpink도 13위에 있다. K-Pop의 새로운 역사는 역시 공정 경쟁구조가 살아있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잘 살펴보면 한국 음악계는 백댄서(back dancer)들의 천국이다. 23년간 인기를 누리는 코요테 멤버로 1박2일 TV프로그램으로 예능 대상까지 받은 김종민은 김완선과 엄정화의 백댄서(back dancer)였다. 물론 유명했던 김완선도 거위의 꿈을 부른 성공한 혼혈가수 인순이의 백댄서였다. 그 인순이조차도 가수 한백희의 백댄서 출신이다.모두가 비록 백댄서로 미약하게 출발했지만 창대하다할 만큼 성공했다. 초라한 출발과 상관없이 노력과 능력발휘에 따라 성공 기회가 공정하게 열린 사회임을 보여준다. 빌보드 2위까지 갔던 싸이나, BTS와 Blackpink을 포함한 한국 대중음악의 성공도 공정한 경쟁구조의 산물이다.그런데 이와는 전혀 달리 한국의 취업과 고용시장은 확연히 구별된 4대 계급구조로 되어 있다. 최상위에 대기업 및 공공기업 정규직(A)이 있고, 연이어 대기업 및 공공기업 비정규직(B), 중소기업 정규직(C) 순서로 계층화되어 최하층엔 중소상공업 비정규직(D)이 있다. 각 계층별(A:B:C:D) 평균급여 편차는 각각 100:65:49:39이다.최상층(A)의 대기업 정규직 평균 월급이 약 600만 원이라면, 비정규직(B) 월급은 360만원, 중소기업 정규직은 294만원,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월 234만원이다. 이런 계층구조에 때문에 어디서 시작했느냐에 따라 자신의 계층은 거의 평생 유지되는 엄연한 현실에 있다.능력에 따라 600만원 받는 직원도 있고, 200만원 받는 직원이 있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이치이고 잘못도 없다. 그러나 입사 때 한번 결정된 신분이 굳어져 평생을 가야하는 구조이기에 커다란 문제가 된다. 한번 중소기업 비정규직으로 출발하면 경험과 기술을 쌓고 능력을 인정받더라도 새로운 기회가 열리기는 매우 어렵다.비정규직이 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대기업과 공기업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미약하게 출발해 창대하게 진전시킬 계층구조의 사다리가 단절되 있기 때문이다. 입사 당시의 평가로 대기업과 공기업 정규직으로 출발하면 60세 정년까지 능력과 업적 여부와 상관없이 연공서열(年功序列)제와 얼마나 오래있었냐에 따른 호봉제(號俸制)로 급여가 결정되며 60세까지 가는 구조이다.출발할 때 신분이 끝까지를 가는 구조라면 그건 봉건사회의 신분제도와 다름없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오르내리는 사다리가 없기 때문이다. 시작할 때의 신분으로 정년을 마치게 되고, 능력에 따른 재평가 기회를 잃은 사람들은 결국 다른 대안없이 자영업으로 갈 수밖에 없다. 또 그러다보니 취업시장에는 몇 년을 늦추더라도 온갖 스펙(자격요건)을 갖춰 대기업이나 공무원 혹은 공기업에서 평생을 보장받는 출발을 하겠다는 입사경쟁만 치열하다.봉건적 조선시대의 과거(科擧)시험 치루듯, 한번 취득하면 성과와 상관없이 퇴출당하지 않는 구조이기에 누구나 신분취득에 목숨 걸게 된다. 조국 전법무장관이나 추미애 법무장관이 모두 아들과 딸에게 스펙을 만들어 60세까지 보장되는 신분을 만들려했던 것도 업적과 상관없는 신분취득 사회의 전형적 병폐다.성과에 따라 오르내리는 사다리가 없는 계층사회에서는 생산성과 창의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희생을 동반한 각종 굳은 일과 새로운 창의력은 대부분 외부업체로부터 나오는 구조에 있다. 기여한 수준과 노력한 댓가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기에 기회균등의 공정성은 무너지고 사회 불만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인천공항공사의 예에서 보듯 신분구조이자 계급이 되어버린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보니 부분적으로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이 강요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로또와 같은 행운일 뿐이지 지속가능한 것도 아니고, 결코 공정한 방법도 아니다. 노력하고 땀 흘린 사람에게 댓가가 주어지는 구조가 정착되어야지, 몇몇 사람에게 운좋게 시혜가 돌아가는 방식은 문제의 본질만 흐릴 뿐이다.방향은 결정되어 있다. 김종민-김완선-인순이의 예처럼 정규직이니 비정규직이나 하는 신분을 없애고 더 기여한 사람에게 더 큰 몫이 돌아가는 구조가 확립되어야 한다. 월 70만원 받는 A리그, 월 7백만원 받는 AAA리그, 그리고 월 7억원 받는 메이저리그 선수들로 함께 구성된 미 프로야구가 공정한 이유는 성적에 따라 언제든 올라가고 내려가는 원칙이 엄격히 유지되기 때문이다. 정규직이란 철밥통을 없애고 성과급과 연봉제로 바꾸어야한다.성과를 내지 못하는 자리에 더 열심히 창의적으로 일할 사람이 들어가 일할수 있게 만들어져야 한다. 신분이 만들어지지 않고, 기회균등과 공정성이 유지되는 사회에만 창의성과 번영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틀린 적은 없다. 청년에게 성과와 업적에 따라 오르내리는 사다리를 만들어 미약하게 시작한 백댄서들이 언제든 김종민과 BTS처럼 창대하게 성공하는 사회가 정착되어야 한다.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2020-09-21 09:55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시장경제칼럼] 추경중독에 빠진 문재인 정부, ‘케인즈 유령’에서 벗어나야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연합)국가가 개인보다 도덕적이라고 믿었다면 이는 순진함을 드러낸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다. 개인은 자식의 부담으로 빚을 미리 끌어다 쓰지 않지만, 국가는 미래 세대의 부담으로 능히 그럴 수 있다. 국가 정책은 기본적으로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빚을 낼 때, ‘그 빚을 누가 부담하는 가’에 대해 숙고하지 않는다. 빚을 내 파티를 할 때, 빚으로부터 수혜를 받는 계층과 빚을 책임져야 할 계층이 다르기 십상이다. 이는 ‘밥 먹은 사람이 계산을 남에게 미루는 격’이다. 자기책임 원칙에 반(反)하는 기막힌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큰 정부’를 지향한 문재인 정권문재인 정부는 ‘큰 정부’를 지향하고 있다. 출범이후 국가 총예산 증가율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조세수입은 통상적으로 인플레이션에 실질 경제성장률을 더한 경상성장률과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예산증가율이 경상성장률의 일정배율 범위에서 결정되면 된다면 무리가 없다. 주지하다시피 근래 경상성장률은 4%를 넘지 않는다. 예산증가율이 ‘4% + 알파’ 이면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문재인 정부는 집권(2017. 5) 후 처음 편성한 2018년 예산안에서 “새 정부 정책 과제를 이행해야 한다”며 지출 증가율 7.1%의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 다음 해인 2019년 예산안에서는 “우리 경제와 사회가 구조적인 여러 문제를 안고 있어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며 지출증가율을 9.5%로 높였다. 2020년에는 “경제 활력 회복 의지를 지원해야 한다”며 지출증가율을 9.1%로 유지했다. 올 9월에 편성된 2021년 예산안은 “코로나 전시 상황임을 이유”로 지출증가율을 8.5%로 책정했다.한 가지 간과해서 안 될 사실(fact)은 2020년 예산을 편성할 때만 해도 ‘코로라 바이러스’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을 근거로 재정 팽창을 정당화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바이러스와 무관하게’ 이미 재정을 방만하게 운용해 왔다. 문재인 정부가 편성한 4개년 예산의 총지출 증가율 평균은 8.6%이다. 이는 줄잡아도 경상경제성장률의 2.5배 수준이다.문재인 정부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추경을 편성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 극복을 명분으로 무려 4차례의 추경을 편성했다. 추경편성의 관행화는 ‘꼼수의 관행화’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본예산을 통과시키고 추경을 통해 지출을 보강했기 때문이다. 총지출증가율을 높이 잡는 것은 쉽지만 세금을 걷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 차이는 ‘국가 빚’으로 메꿔지기 쉽다. 문재인 정부 들어 국가부채가 빠른 속도록 증가하고 있다.과도한 정부지출 증가는 후과(後果)를 가져온다. 정부지출을 과도하게 늘리지 않았다면 세금을 적게 걷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돈은 ‘가계 주머니’에 있었을 것이다. 만약 ‘한계적인 마지막 1원을 민간이 더 효율적이고 합목적적으로 지출한다면’ 큰 정부는 경제 전체의 효율을 해치게 된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것을 ‘그레샴’법칙 이라고 한다. ‘효율 축면에서’ 정부의 나쁜 지출이 민간의 좋은 지출을 구축하는 것이다. 즉 재정지출에도 그레샴 법칙이 적용될 수 있다. ▲ ‘착한 부채’ 주장의 허구5.14일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은 ‘착한 부채론’을 거론했다. 재정 건전성을 담보하기 위해 국채 발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채 발행을 통해 적극적인 재정 정책으로 GDP를 늘리면, 채무 비율의 증가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채 증가 속도보다 재정지출 증가에 따른 GDP 증가 속도가 더 빨라야 GDP 대비 부채비율이 낮아질 수 있기 때문에” 이는 궤변이 아닐 수 없다. 정부관료의 발언으로 믿기지 않는다.기업부채와 국가부채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기업의 경우, 타인자본(빚)을 이용해 사업규모를 키우지 않으면 구멍가게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부채를 ‘지렛대’로 인식한다. ‘부채조달비용’과 부채로 조달된 자본으로부터 ‘예상수익률’을 비교해 “자본조달비용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다면 부채를 일으키라고” 경제학은 가르친다.정부는 소비조직이다. 기업은 부채를 발행해 돈을 벌어 빚을 갚으면 되지만 국가는 돈(부가가치를 창출)을 버는 조직이 아니다. 따라서 국가부채에는 ‘예상수익률’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증세는 조세저항을 부른다. 따라서 정부는 ‘조세 저항’이 없는 국채발행을 통한 재원마련을 선호한다.민간이 돈을 빌리려면 돈을 빌려주는 쪽에게 ‘자금활용 및 상환계획서’를 제출하고 대출을 승인 받아야 한다. 민간 대출은 그만큼 깐깐하다. 하지만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 돈을 빌리면서(찍어내면서) 상환계약서를 제출하지 않는다. 정부의 상환계획서에는 목표성장률이 명시되어야 하지만 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국가는 도산(倒産)하지 않기 때문에 부채를 늘린 정치인은 그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재정준칙 법제화’ 해야 문재인 정부는 재정중독(財政中毒)에 빠져있다. ‘모든 것을 재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관행화된 추경 편성은 재정건전성을 해치는 복병이다. ‘큰 정부’를 지향하는 경우 정부지출을 규율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 큰 정부로부터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세입 이상의 지출을 하게 되고 그 차이는 국가부채로 쌓이게 된다. 현세대가 ‘증세’ 해서 빚을 갚지 않으면 국가부채는 고스란히 후속세대의 몫이다. 2021년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은 46.7%로 전망되고 있다. 위험수위를 넘는 수치이다. 재정건전성이 지켜지지 않으면 ‘세대 간(間) 전쟁’이 촉발될 수도 있다. 재정규율도입이 절실한 이유이다.전례 없는 ‘케인즈주의 성공’이 한국에서 목도되고 있다. 자유주의 철학자 미제스는 “케인즈주의가 풍미한 것은 ‘적자지출’ 정책에 대한 확실한 정당성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며, 그것은 그 이전 세대들이 축적한 자본을 낭비하는 것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사이비 철학”이라고 설파했다. 머리 위를 배회하는 ‘케인즈 유령’을 걷어내야 한다.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2020-09-14 10:06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시장경제칼럼] 가격으로 말하는 시장이 가장 효율적 제도이다

조성봉 숭실대 교수(경제학)시장 거래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소비자와 공급자가 선택한다. 상품에 대한 기본적 약속만 지키면 책임도 자신이 진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변화가 자유롭게 반영된다. 원유가격이 등락하면 휘발유 가격도 오르락내리락 한다. 자원배분도 이에 따라 효율적으로 이뤄진다. 기름 값이 오르면 소형 자동차가 유행하고 기름값이 내리면 좀 더 편안하고 큰 차가 팔린다. 이래라저래라 명령하고 훈계할 필요가 없다. 알아서 한다. 그래서 군말이 별로 없다. 메시지가 줄어든다.기업과 같이 경제주체 스스로 시장 대신 조직을 선택하는 경우는 비효율성이 크지 않다. 시장에서의 거래비용이 낮아지면 기업은 수익성을 위해 언제든지 조직을 벗어나서 시장으로 뛰어든다.문제는 시장의 결과를 정부가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규제하는 경우이다. 가격이 높다고 상한을 정하게 되면 초과수요가 나타나 상품이 모자라는데 정부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배급, 할당, 우선순위 책정 등 조직과 행정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가격이 낮다고 하한을 정하는 경우에는 결국 물건이 남아서 정부미처럼 정부가 국민들 세금으로 이를 사서 창고에 쌓아 놓던지 사기 싫은 사람들에게 억지로 떠안기든지 해야 한다. 이 또한 많은 자원이 추가로 들어가는 일이다. 정부 나름대로는 자원을 아낀다고 하는 일이지만 결국 인적·물적 자원을 더 많이 쓰게 된다. 게다가 이렇게 만들어진 조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에너지 산업에서 이러한 문제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오일쇼크 때 유가가 급등하고 모든 에너지 가격이 따라서 올라가자 정부는 그 충격을 완화하려고 ‘에너지이용합리화법’을 제정하게 된다. 당시 수출산업 등 꼭 필요한 부분에만 석유 등 모자라는 에너지를 할당하면서 에너지 소비를 절약하려 했다.그런데 이 법은 정부의 행정조직과 함께 여러 공공기관 그리고 에너지소비를 절약하고 효율을 향상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조직을 연쇄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에너지절약을 위한 시설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금융·세제상의 지원을 시행하고,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에너지사용 기자재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효율관리 기자재’를 지정하였고 이에 대한 사후관리도 시작하였다. 에너지 효율 개선을 위해 평균에너지 소비효율을 고시하였고 이에 못 미치는 기자재에 대해서는 효율의 개선을 명하도록 하였다. 또한 고효율 에너지 기자재를 인증하였고 이를 위해 시험기관에서 측정하도록 하였다.한편, 에너지절약을 사업으로 하는 에너지절약 전문기업에 대한 등록기준을 만들었으며 에너지 사용량이 높은 사업자를 에너지다소비 사업자라 하여 이들이 에너지사용량을 시·도지사에게 신고하게끔 하였다. 그리고 에너지다소비 사업자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기준을 별도로 정하였으며 에너지사용을 진단하는 진단기관에 대한 지정제도를 만들게 되었다.에너지이용합리화법은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에너지소비를 규제하였다. 이를 위해 등록, 관리, 지정, 신고, 양성, 진단, 명령, 설정, 조치, 요청, 검사, 선임, 자격 부여, 사후관리, 인증, 표시, 지원 등 다양한 ‘조직적’ 행정수단을 정부는 동원하였다.에너지의 95% 이상을 수입하는 우리나라는 이처럼 지금까지 수많은 에너지절약 조치를 시행하였다. 중화학공업과 에너지다소비 업종이 많은 우리의 산업구조 상 수출경쟁력을 위하여 또 소비자를 위하여 전기요금과 같은 에너지가격을 그동안 낮게 유지하여 왔다.그러면서도 에너지를 아껴 써야 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면서 많은 행정력과 조직을 동원하였다. 1·2차 오일쇼크를 겪었던 필자는 중고등학교 미술시간과 방학숙제로 그렸던 에너지절약 포스터도 적지 않았으며 에너지 아껴 쓰기 표어도 몇 개씩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그런데 이와 같은 에너지절약과 효율 개선 노력은 성공하였을까? 정반대다. 한국은 에너지를 가장 비효율적으로 쓰는 나라이다. 우리나라의 에너지효율은 OECD 35개 회원국 중 꼴찌 수준이다.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1차 에너지 소비량으로 정의되는 ‘에너지 원단위’도 OECD 평균보다 50%가량 높다. 겨울철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안에서 거의 속옷 바람으로 지낸다. 미국 등 선진국은 겨울철에 은 집 안에서 두터운 쉐터를 입고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오히려 에너지 가격을 정상화하고 높게 유지하였더라면 에너지는 더욱 절약되었을 것이고 효율은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에너지효율화 기기가 발붙일 틈이 없다. 건물이나 공장에서 이를 사용할 인센티브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높은 에너지 가격 때문에 건물 자동화로 자동 컴퓨터 시스템과 센서로 사람들이 출퇴근할 때 조명과 냉난방이 자동 조절되는 설비가 많이 팔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그 기능이 좋아도 잘 보급되지 않는다. 에너지 가격이 싸니까 이런 설비에 돈을 투자하기가 아까운 것이다.수십년째 우리나라가 제조업 중심의 에너지다소비 구조를 못 벗어나는 이유는 에너지다소비 업종이 많다는 이유로 에너지가격의 현실화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에너지다소비 업종이 점점 더 많아지는 구조이다.해외 유수의 IT업체에서 전기를 많이 소비하는 데이터센터를 우리나라로 배치하고, 그래픽 카드 끼운 전기 잡아먹는 PC로 비트코인 ‘채굴’하는 사업이 번창했던 것도 바로 전기요금이 쌌기 때문이다.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 가격이 주는 시그널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였더라면 우리 에너지소비는 훨씬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며 에너지 관련 정부 및 공공조직은 훨씬 더 슬림하였을 것이다.뿐만 아니라 이런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국민들이 내는 세금, 부과금과 에너지에 대한 지출도 훨씬 절약되었을 것이다. 뿜어 나오는 온실가스와 미세먼지도 훨씬 더 줄어들었을 것이다. 가격으로 말하는 시장이 가장 효율적인 제도이다.조성봉 숭실대 교수(경제학)

2020-09-07 11:04 조성봉 숭실대 교수(경제학)

[시장경제칼럼] 최고가격의 의료수가와 공적의료보험

전용덕 대구대 명예교수(경제학)지금 정부와 의료계 간에는 많은 현안이 누적되어 있다. 의과대학 정원을 향후 10년간 4000명(연간 400명) 늘리겠다는 것이나 공공의대 설립은 그 중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정부 정책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의사들의 처우가 예전과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수를 더 늘리겠다는 정책은 그런 처우를 미래에 더 나쁘게 만들 것으로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의과대학 정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최고가격 제도를 분석하고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 공적의료보험을 다룰 것이다. 복지부는 서울의 종로, 강남, 중구에는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11명이고 경북의 군위, 영양, 봉화의 의사 수는 0.7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첫 번째 주장’). 정부는 또한 환자 1명당 1차 의료기관에서의 진료 시간이 한국은 4.2분인데 OECD 11국 평균은 17.5분이라고 지적한다(‘두 번째 주장’)그러나 의료계는 ‘국가별 의사 밀도’(10km²당 의사가 얼마나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는 이스라엘(12.4명), 벨기에(10.7명), 한국(10.4명) 등의 순서로 ‘의사의 접근성 측면에서 한국은 의사의 수가 부족하지 않다’고 주장한다(‘첫 번째 주장’). 대한의사협회(의협)은 ‘한국인의 1년 병원 방문 횟수는 16.9회로 OECD평균 6.8회보다 크게 많다’고 주장한다(‘두 번째 주장’).정부는 의사가 부족하다는 입장이고 의협은 OECD 평균 대비 의사는 부족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한 마디로, 의협은 의사가 부족하다는 정부의 주장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정부와 의료계 주장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의료체계인 공적의료보험과 그 핵심인 최고가격(특히 의료수가) 제도를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서 최고가격이란 정부에 의해 고정되고 자유시장가격보다 언제나 낮은 가격을 말한다. 그러나 최고가격은 일정시점에는 고정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인상되어왔다. 지난 3년간에는 의료수가는 변동이 없었다.즉 다른 때와 비교하여 지난 3년간 최고가격은 자유시장가격보다 더 낮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고가격이 자유시장가격보다 얼마나 낮은가는 진료과목에 따라 모두 다르다. 예를 들어, 응급의료는 최고가격이 너무 낮아 대형병원도 응급의료를 유지하는 일에 작지 않은 손실이 난다고 아우성이다.자유시장가격일 때와 비교하여, 최고가격은 의료서비스 공급을 적게 하고 수요는 증대하게 만든다. 경제학에서 이런 상태를 ‘초과수요’라고 말한다. 의료수가가 낮게 고정되어있기 때문에 의사는 최대한 많이 진료하지 않을 수 없다. 일종의 ‘박리다매’인 것이다. 당연히 1인당 진료시간은 최대한 짧아지지 않을 수 없다. 1차 의료기관에서 진료시간이 4-5분밖에 안 되는 것은 의료수가 규제 때문이다. 즉 진료시간이 매우 짧은 것은 의료수가를 최고가격으로 규제한 결과이지 의사의 수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이것은 의사 개인 차원에서의 분석이다. 원인이라는 관점에서, 이것은 복지부의 두 번째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료산업 전체에서도, 자유시장가격일 때보다 최고가격에서 의료 서비스의 공급, 즉 의사의 수가 충분하게 공급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이 복지부의 첫 번째 주장이 옳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의료수가가 최고가격인 상황에서는 의사들은 병원 경영이 쉽거나 적절한 소득을 확보하기가 쉬운 장소에서 병원을 개업하기를 원한다. 특히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농촌 지역은 기피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지역별 의사 수의 격차가 큰 것은 가격 규제의 당연한 귀결이다. 여기에 자녀 교육 환경 등도 의원 개업 장소의 선정에 영향을 미친다.지역별 인구 당 의사의 수가 격차가 큰 것은 가격규제와 다른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 결과이지 의료산업 전체에서의 의사의 수와 큰 관련이 없다. 만약 농촌지역 의료수가를 정부가 규제하지 않는다면 지역 간 의료 격차는 상당히 해소될 것이다. 물론 의료 격차를 완전하게 해소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 교육 환경 등도 병원 개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최고가격 제도가 지금처럼 유지되고 다른 조건이 변하지 않는다면, 10년이 지나 농촌에서 의무를 마친 의사들은 개업 장소를 도시로 옮길 것이라는 의협의 예상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즉 복지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은 지역 간 의료 인력 격차 해소를 위하여 어느 정도 역할을 할 것이지만 부작용은 그것보다 더 클 것이라는 점이다.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응급의학 등은 의사가 턱없이 모자라고 성형외과, 피부과, 정형외과 등에서는 의사가 차고 넘친다. 의사들의 진료과목 선택은 어떤 진료과목의 노력 대비 보상(최고가격은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과 미래 전망, 자유시장가격을 적용할 수 있는 의료수요의 크기, 적성 등에 의해 결정된다.예를 들어, 실리콘 유방 확대술과 같은 성형 수술은 자유시장가격일 뿐만 아니라 수요가 적지 않기 때문에 의사가 몰리는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와 분만실이 없어서 농촌을 포함한 중소도시에서 아기를 분만하는 일은 이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고도 정부는 사람들이 아기를 더 낳기를 바라고 있다.인구의 대부분이 6대 도시에 거주하고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는 의사의 수가 많기 때문에 국가별 의사밀도가 높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정반대이다. 이를 두고 의사의 접근성 측면에서 한국은 의사의 수가 부족하지 않다는 의협의 첫 번째 주장은 통계를 잘못 해석했다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수요자 입장에서는 진료비가 자유시장가격보다 매우 낮기 때문에 환자는 가벼운 증상에도 병원을 찾고,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병원을 전전한다. 이것은 의협의 두 번째 주장이 의료수가 규제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한 것이지 의사의 부족 여부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서울의 대형 병원으로 환자가 몰리는 것도 환자가 지불하는 비용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여기에 KTX와 같은 교통의 발달도 대형 병원을 중심으로 환자가 몰리는 현상을 부채질한다. 그 결과 대형병원에서는 병상이 부족하여 완치 때까지 입원 치료가 불가능하다.65세 이상의 노인 의료수가는 비노인 의료수가보다 더 낮다. 노인 의료수가는 노인 할인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한의원에 가면 다수의 고령자가 물리치료용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그런 경우야말로 어떤 최고가격보다 낮은 최고가격인 노인 의료수가 때문임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그 결과로, 노인 인구의 증대와 맞물려, 노인 의료비는 폭증해왔고 건강보험공단의 의료보험료 수입은 쉽게 적자가 될 수 있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최고가격 제도에서 환자들은 저렴한 의료 비용을 부담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최고가격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최고가격 제도에서 환자들은 최고가격(즉 금전적 비용) 뿐만 아니라 ‘비금전적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금전적 비용이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환자들은 진료를 위하여 상당한 시간을 대기해야 한다. 응급실과 그 인력이 충분하지 못하여 위급한 환자가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대형 병원들은 최근에야 환자 가족이 환자를 돌보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의료수가 체계로는 병원들이 환자가 요구하는 의료 서비스를 충분히 제공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한 마디로, 환자들이 지불하는 명목 비용은 최고가격으로서 매우 저렴하지만 비금전적 비용을 포함한 실질 비용은 매우 고가(高價)일 뿐만 아니라 개인마다 모두 다르다.김대중 정권 시절 의약분업을 시작하면서 정부는 의료수가(약가 포함)를 본격적으로 최고가격으로 규제했다. 그 이후 최고가격 제도는 지속되어 왔다. 그 결과 최고가격은 자유시장가격보다 지속적으로 낮아져 왔다. 다만 의료수가가 여럿이 있기 때문에 최고가격과 자유지장가격의 격차는 모두 다르다.한 마디로, 최고가격 제도의 폐해는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적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의료행위도 적지 않지만 그 대상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최고가격 제도와 함께, 공적의료보험은 보험금의 지속적인 인상, 건강보험공단의 비효율, 적지 않은 의료사고와 피해 구제의 어려움, 의사들의 과잉 진료, 병원들의 사기 행위, 보험료를 소득에 비례하여 부담해야 하는 부조리 등의 문제로 의료산업을 문제투성이로 얼룩지게 해왔다.즉 한국 공적의료보험도 환자에게 저렴한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제도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구가 감소하고 보험 대상을 지속적으로 높이면(예를 들어, 문재인 케어) 장기에는 현행 공적의료보험을 유지하는 일마저도 어렵게 될 것이다.의사 개인 차원뿐만 아니라 의료산업 전체 차원에서 의사 수의 부족도 최고가격이라는 규제 때문이다. 앞에서 서술한 문제들의 대부분은 가격, 즉 의료수가를 고정하면서 생겨난 결과이다. 최고가격 제도 때문에 발생하는 진료과목별, 지역별 의료인력 수급 불균형은 의료계 전체에서 발생하는 의료인력 수급 불균형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물론 이것은 필자의 직관에 의한 추정이다. 게다가. 최고가격의 폐해에 공적의료보험의 폐해가 중첩되어 왔다. 그 점에서 복지부의 주장이 의협의 주장보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두 주장 모두 결점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최고가격 제도와 공적의료보험의 폐해가 상존하는 현실에서 의무 근무 연한이라는 수량 규제를 추가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의료 인력의 부족을 포함한, 의료계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확실한 방법은 민간의료보험(여기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민간의료보험이 공적의료보험보다 우수하다)과 자유시장가격 제도이다. 그러나 정부는 단기에는 공적의료보험도 최고가격 제도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문제의 핵심은 좁게는 의료수가의 최고가격 제도이고 넓게는 그런 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공적의료보험이다. 게다가, 의료수가는 의료행위별 ‘상대가치점수’에 의해 일부 결정되고 그런 상대가치점수는 26개 의료 전공과목 학회장에 의해 결정된다. 즉 의료수가는 전공과목별 이익집단에 휘둘리게 되어 있는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최고가격 제도와 공적의료보험을 유지하면서, 가능한 한 가지 대안은 자유시장가격 또는 실질 비용을 최고가격에 최대한 반영하는 방법으로 최고가격들 간의 관계, 즉 의료수가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5천개가 넘는 의료행위의 자유시장가격 또는 실질 비용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려움을 감당한다면 앞에서 지적한 각종 폐해를 상당히 없앨 수는 있을 것이다. 비록 그 폐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의사의 수도 예외는 아니다. 환자가 지불하는 금전적 비용뿐만 아니라 비금전적 비용을 고려한다면, 장기적으로는 정부와 의료계가 민간의료보험과 자유시장가격 제도 도입을 심각하게 검토하기를 제안한다.전용덕 대구대 명예교수(경제학)

2020-08-31 11:00 전용덕 대구대 명예교수(경제학)

[시장경제칼럼] 부동산가격 상승원인은 투기인가?

이승모 경제평론가정부의 다양한 부동산 대책에도 불구하고, 부동산가격이 계속 폭등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를 시도하고 있다. 이 정책을 시행하는 이유는 정부가 부동산 가격폭등의 원인을 부동산투기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는 투기를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그러나 이런 정책은 부동산가격을 안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부동산가격의 폭등을 초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동산투기가 부동산가격 상승원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투기 규제로 미래 수요에 부응하지 못하는 공급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물론 투기꾼의 사재기로 인한 수요 증가로 가격이 상승할 수 있다. 하지만 투기꾼의 사재기로 인해 가격 상승현상이 발생하더라도 우리가 투기꾼 때문에 부동산가격이 폭등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눈에 보이는 빙산의 일각만 보고 빙산의 크기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효과보다는 중장기적인 효과를 살펴봐야 부동산투기의 효과 및 부동산가격 폭등원인을 올바르게 밝힐 수 있다.부동산투기의 장단기 효과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투기꾼들이 왜 사재기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투기꾼들이 사재기를 하는 이유는 싸게 구입하여 비싸게 팔아서 그 차익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비즈니스의 원칙이며 투기꾼에게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은 현재 구입가격보다 나중에 더 비싸게 팔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그들은 정보를 이용하여 미래의 수요와 공급을 예측하고 그에 따른 미래 가격의 상승과 하락을 예측한다. 만약 그들의 예측이 틀린다면 엄청난 손해를 볼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비용을 들여 미래를 예측한다. 만약 그들 예상대로 가격이 상승하면 그들은 투기를 통해 돈을 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가격이 상승하지 않거나 하락하면 그들은 손해를 보게 된다. 10여 년 전에 잘못 예측하여 막차를 탄 사람들이 엄청난 손실을 본 경험도 있다. 이것은 투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투기꾼들의 예상은 상당히 정확하다.현재 투기꾼들이 사재기를 계속하거나 팔지 않고 보유하는 이유는 부동산 정책과 여러 가지 경제여건을 고려할 때 미래시점의 수요에 비해 미래시점의 공급이 부족하여 가격이 계속 상승할 것이라고 예측하기 때문이다.부동산 투기에 대한 규제가 없을 때와 있을 때 부동산 가격변동을 비교해보자. 부동산 투기가 발생한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투기꾼들이 미래시점의 수요에 비해 미래시점의 공급이 부족하여 가격이 계속 상승할 것이라고 예측하기 때문이다. 현재 부동산 가격이 1,000원이라고 하자, 투기꾼들이 가격상승을 예상하여 부동산을 구입하면 현재 부동산가격은 1,200원으로 상승한다. 이 현상을 보고 투기꾼들이 부동산가격을 폭등시키고 실수요자에게 피해를 준다고 비난받는다.이런 투기꾼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투기를 규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보자. 부동산 가격상승으로 부동산 건설의 수익성이 증가하므로 부동산 건설이 예전보다 증가하여 부동산 공급이 증가한다. 그 결과 미래 부동산 가격은 약간만 상승하여 1,300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부동산 투기를 규제하면 부동산 가격이 미래수급을 반영하지 못하여 현재가격은 상대적으로 낮게 형성된다(예를 들면, 1,000원). 그로 인해 부동산 건설의 수익성이 상대적으로 낮아져서 부동산의 공급은 상대적으로 적게 증가한다, 그 결과 미래 부동산 가격은 1,500원으로 폭등하게 된다. 이런 폭등은 규제를 함으로써 미래 수요에 부응하지 못하는 공급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그리고 규제가 없을 때는 가격변동이 1,200원 ~ 1,300원으로 100원인 반면, 규제가 있으면 가격변동이 1,000원 ~ 1,500원으로 500원이 되어 훨씬 더 심해진다. 오히려 규제가 없을 때 가격이 안정화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규제가 없을 때 미래 수요에 부응하도록 적절하게 공급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투기꾼이 미래수급을 반영하여 현재가격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투기꾼은 상식과 달리 가격폭등 및 가격변동 심화의 주범이 아니라 오히려 가격안정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투기꾼들이 이런 역할을 시도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유용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집단의 사회적 역할을 그들의 의도에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의도가 아니라 사회적 결과이다.그리고 투기꾼이 있음으로써 오히려 실수요자들에게 이득이 된다. 단기적으로는 부동산 가격이 1,000원에서 1,200원으로 상승함으로써 실수요자에게 피해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장기적으로 가격이 안정화됨으로써 실수요자에게 이득을 주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규제를 하면, 미래 실수요자는 1,300원이 아니라 1,500원 이상을 지급해야 하고 그들이 구입할 수 있는 부동산의 공급도 상대적으로 적게 된다. 이처럼 부동산 투기꾼은 상식과는 달리 오히려 부동산의 적절한 공급 및 가격안정화에 기여함으로써 실수요자에게 이득을 제공한다. 부동산투기뿐만 아니라 모든 투기는 이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부동산투기를 규제하면 미래 수요에 부응하는 적절한 공급이 되지 못함으로써 부동산 가격폭등을 유도한다. 따라서 부동산 가격폭등의 원인은 부동산투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부동산 가격폭등 원인 중의 하나가 부동산투기에 대한 규제임을 알 수 있다. 역설적으로 부동산투기에 대한 규제가 오히려 비정상적인 부동산투기를 조장하게 되는 것이다.부동산가격이 폭등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미래 수요에 부응하지 못하는 공급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정부의 규제가 없는 시장에서는 미래 수요 및 공급에 따른 가격변동을 통해 적절하게 공급이 조정된다. 정부가 규제를 가하게 되면 적절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공급부족과 가격폭등이 발생한다. 따라서 부동산가격을 안정화하려면 정부는 부동산에 대한 규제를 모두 풀고 시장에 맡겨야 한다.혹자는 그렇게 하면 부동산투기가 극심해져 부동산가격이 비이상적으로 급등한다고 우려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정부가 규제를 풀면, 미래 수요에 부응하는 적절한 공급이 이루어져 부동산가격이 안정화될 것이라고 대부분 예상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오히려 부동산에 대한 비정상적인 투기가 감소하게 되어 부동산가격은 바로 하락하면서 안정화된다.한편 일부에서는 부동산투기 억제책을 시도하면서 부족한 공급 증가를 위해 공공주택 공급을 주장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적절한 공급은 시장의 가격변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투기를 규제하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미래 수요와 공급을 반영하는 가격이 형성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적절하게 공급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국이 경제계산에 입각하여 공공주택을 공급하려고 시도해도 역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래 수요와 공급을 반영하는 가격은 규제가 없는 시장에서만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계획당국은 미래 수요와 공급을 반영하는 가격을 절대로 계산할 수 없다. 그들이 계산한 가격에 의해 공급을 추진하면 어떤 지역에서는 과도하게 어떤 지역에서는 과소하게 공급이 될 것이다. 그리고 수요자들이 원하는 적절한 평형의 주택 공급도 이루어지지 않고, 원하는 질의 공급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과거 중국이나 러시아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계획경제에서 소비자들의 욕구가 충족되도록 재화(부동산도 포함)가 공급이 되지 않은 이유가 바로 당국 계산에 의한 계획경제였기 때문이다. 이미 그런 사회주의국가들은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당국 계산에 의한 공급을 포기했는데, 우리가 오히려 그런 문제점이 있는 방식을 채택하려고 하니 상당히 앞날이 우려스럽다. 그러나 정부가 부동산에 대한 모든 규제를 해제하더라도 부동산가격이 높게 상승할 수 있다. 부동산가격이 급격하고도 지속적으로 오르는 또 다른 근본적인 이유는 통화량의 증가이다. 일국의 총생산량 증가에 비해 통화량 증가가 많다면 물가는 상승한다. 총생산량이 10% 증가할 때 통화량이 20% 증가하면 물가는 10% 상승한다. 이와 같이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이유는 일국의 총생산량 증가에 비해 통화량 증가가 많기 때문이다. 유독 부동산가격이 다른 재화의 가격보다 더 많이 상승하는 이유는 부동산이 화폐가치(화폐의 구매력 : 화폐로 구입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의 하락을 보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통화팽창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시기에 부동산이 자산으로서 다른 어떤 재화보다 매력적이기 때문이다.이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부동산시장을 안정시키려면, 부동산 투기 규제를 비롯한 다양한 부동산 규제를 해제하고, 통화량도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 즉, 부동산 시장을 안정화시키려면 역설적으로 정부는 부동산시장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의 개입이 오히려 부동산시장을 불안정하게 하는 것이다.이승모(경제평론가)

2020-08-24 09:27 이승모(경제평론가)

[시장경제칼럼] 기술과 네트워크 중심의 기업지배구조규제로 전환해야

전삼현 숭실대 교수(법학)전 세계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시장재편의 파도에 직면해 있다. 특히, 인공지능·빅데이터·사물인터넷 등의 기술이 등장하면서 전 세계는 초연결사회로 진입했고 이 생태계에서는 사람(자연인, 법인)보다는 기술과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기업지배구조 규제는 기술이나 네트워크가 아닌 사람 중심의 법제도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어서 우려스러운 점이 많다. 사람 (개인 대주주, 지배회사)을 중심으로 법률로 정부가 기업지배구조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법률이 바로 상법과 금융회사지배구조법, 공정거래법 등이다.4차 산업혁명이란 산업간 융합을 통한 신산업인 AI, 로봇, 바이오, O2O (Online to Offline), P2P (Peer to Peer)를 통한 산업분야의 혁명을 의미한다. 즉, 기술과 네트워크가 시장과 기업을 지배하는 세상이 이미 도래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우리 정부는 기업지배구조 관련해 두가지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첫째는 제조업과 서비스업 등 산업별로 칸막이식 사전규제를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지분소유율을 중심으로 대주주를 견제하는데 필요한 사전규제식 기업지배구조를 법제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도의 신기술을 가지고 산업간 융합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4차 산업형 기업들이 우리 시장에서 새롭게 탄생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국내의 기존 기업들이 4차산업 기업으로 사업재편하기 어렵다는 의미다.우선, 현행법상 기업지배구조는 제조업과 서비스업 분야를 중심으로 각각 독립적으로 별개의 규제법으로 탄생 및 운용되어 왔다. 이는 1차, 2차, 3차 산업에 속하는 기업들이 산업간 융합을 통한 신기술 기반의 신산업으로 전환하는 것 자체가 다중 규제의 그물에 갖혀 실현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비교법적으로도 우리나라는 포지티브 (positive) 규제체제를 유지하고 있어서 네거티브 (negative)규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 등 선진국들과 비교해 볼 때 융합형 신산업이 탄생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이 4차 산업혁명시대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현행 기업지배구조법제에 대한 전면적 개편이 시급한 것이다.미래에는 소유경제가 아닌 공유경제가 초연결사회(超連結社會, hyper-connected society)에 진입한 세계 경제를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결합한 클라우드 기반의 공유경제가 세계경제의 주요 트랜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기업지배구조 역시 소유형 지배구조에서 공유형 지배구조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소유집중 억제 중심적 기업지배구조 규제로부터 공유경제에 적합한 규제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즉, 최대주주가 독단적으로 경영하여 오너리스크를 유발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법률로 지배구조를 규제하기보다는 기술과 네트워크가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를 예방할 수 있는 규제법제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특히, 우리나라는 금융산업에 대한 기업지배구조규제가 엄격해 국내 금융사들이 4차산업혁명의 파고를 잘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지난 수년간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와 관련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중계자 (TTP: Trusted Third Parties), 대표적으로 정부 및 대형 금융회사들에 대한 불신이 확대되면서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인 비트코인이 등장했다. 비트코인의 등장은 탈중앙화 (decentralization)에 대한 논의에 기름을 부은 효과를 가져 왔다.탈중앙화란 모호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어떤 네트워크 내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사실과 의사결정에 관련된 합의를 중앙의 권위있는 집단으로부터 네트워크 내 다수에게 분산시키거나 위임하는 프로세스”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되고 있다. 즉, 대형컴퓨터를 소유하면서 거래의 중개자 또는 수임자로 역할하는 주체 (TTP: Trusted Third Parties)들이 권력화되면서 거래참여자들의 의사나 이해관계가 배제되는 것을 개선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의 수립을 위한 시도인 것이다.물론, 탈중앙화가 기존질서 및 가치와 충돌되는 점이 많고 기술적 범용성의 한계가 노출되면서 최근에는 TTP와 탈중앙간의 조화를 유도하는 결합형 기술 (스테이블코인, 프라이빗 블록체인, CBDC) 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탈중앙화가 퍼블릭 블록체인 (public block chain)생태계에서 가치가 인정되고 기술적 진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만큼 입법정책 분야에서 이를 전면적으로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탈중앙화된 네트워크 상에서는 기업의 대주주가 누구이며, 해당 기업이 수직적 계열화 내지는 수평적 결합을 통해 기업지배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블록체인 생태계 내에서는 지분소유 중심의 기업지배구조는 그 의미가 희석되고 오히려 블록체인 기술과 네트워크상의 참여기업들간의 상호작용 중심의 지배구조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상법상의 기업지배구조 규제와 관련해 우리나라는 상법상 투자 및 거래 관련 사전규제, 즉 사람 중심의 기업지배구조 규제가 다른 선진국에 비하여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는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해서 국내 기업들의 사업재편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대주주 및 주요주주를 중심으로 이사회 구성 및 의결권 제한에 관한 법적 규제들을 선진국 수준으로 개선해야 우리나라가 4차산업혁명의 승자가 될 수 있다.금융회사의 기업지배구조 규제와 관련해서는 관치금융의 잔재인 금융회사의 주식소유제한, 금융회사 대주주의 정부 승인 및 적격성 심사, 금융회사 이사회 구성 및 감사선임에 대한 법적 규제를 가하고 있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을 대대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공정거래법상의 기업지배구조규제와 관련해서는 지주회사의 지분소유규제와 기업결합심사를 통한 시장지배력 점유율 규제를 동시에 실시하는 경우 사실상 국내시장에서 기술 및 네트워크 기반의 4차 산업형 글로벌 플랫폼 기업의 탄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하여 대한민국이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국내기업들이 사람 중심이 아닌 기술과 네트워크 중심의 사업으로 신속하게 재편할 수 있도록 기업지배구조관련 법제도를 시급히 개선해야 할 것이다.전삼현 숭실대 교수(법학)

2020-08-17 09:20 전삼현 숭실대 교수(법학)

[시장경제칼럼] 법의 위기

정기화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헌법은 개인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국가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는 여러 행위를 나열하고 있다. 이를 흔히 기본권이라고 한다. 이것을 권리라고 부르는 것은 국가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권력집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할 수 있다.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헌법은 국가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 것이다. 헌법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되지만 이와 함께 등장하는 민주정은 오히려 새로운 형태로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한다. 민주정에서 강제력을 행사하는 권력집단은 선거에 의한 선출된다. 이들은 선거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법을 제정하고 나아가 헌법을 개정한다. 그래서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하여 특정의 개인이나 집단에게 이익을 주는 법이나 헌법조항을 마련하기도 한다. 국가의 강제력을 통하여 특정의 개인이나 집단이 누리는 이익은 권리가 아니다. 권리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으로 타인의 간섭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타인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국가권력의 강제력을 배제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특정의 개인이나 집단이 누리는 이익은 누군가의 간섭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이들이 누리는 이익은 누군가의 간섭이 없다면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권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국가의 강제력으로 유지되는 특별한 혜택 즉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특권은 사회의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생계의 유지가 힘든 노약자, 보호자가 없는 아동과 장애자 등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들에 대한 도움은 국가의 도움이 없더라도 개인이 자발적으로 행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발적 도움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리고 누구나 이러한 처지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국가에 의한 도움은 일종의 사회 보험으로 작동한다. 누구나 보험료로 일정한 조세를 납부하고 그러한 처지에 빠지면 국가로부터 보험금을 지급받는 것이다. 이러한 보험을 민간 보험회사가 운용하기 힘들다. 모든 개인이 강제로 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이상 이익을 추구하는 민간 보험호사는 개인의 처지에 따라 보험료를 달리 책정할 것이고 정작 보험이 필요한 개인은 비싼 보험료 때문에 가입이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생계의 유지가 힘든 노약자, 보호자가 없는 아동과 장애자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사회보험으로서 유지 가능하려면 개인이나 국가의 소득수준에 따라 조세액이나 지원액이 결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선거의 승리를 위해 경쟁하는 정치집단은 특정한 집단에 대한 보호를 경쟁적으로 확대시킨다. 그래서 특정집단에 대한 보호를 위한 조세는 급격히 증가하고 이러한 조세는 소수집단에 집중된다. 다수의 지지 획득을 위하여 소수에 대해 약탈적 과세가 부과되는 것이다. 나아가 일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도 한다.소수의 개인에 대한 합법적 약탈은 법의 위기를 초래한다. 법이란 개인의 사회적 협동이 가능하도록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보편적 행동규범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법 이전에 누구나 따라야 하는 보편적 규범과 권리가 존재하였다. 하지만 사회의 확대로 불가피하게 법이 이를 강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법은 누구나 준수해야하는 규범으로 여길 수 있었다. 권력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강제력을 이용하였지만 보편적 행위규범을 부정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민주정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으면 모든 것이 강제될 수 있다. 그러면 개인 행위의 정당성은 보편적 규범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지지를 받느냐 또는 합법적이냐에 따라 결정되고 만다. 보편적 규범이 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행위의 규범성을 결정하는 셈이다.법이 행위규범을 결정하게 되면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한 법이 제정되도록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법을 누구나 따라야 하는 보편적 규범으로 여기지 않고 특정 집단에 유리한 행위규범으로 여기게 된다. 법을 누구나 따라야 하는 최소한의 도덕규범으로 여기지 않고 정치적 이해의 산물로 여긴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법은 누구나 따라야 하는 보편적 도덕규범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어기지만 않으면 되는 귀찮은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나아가 법이 사회적 협동을 조장하기보다 집단 간의 투쟁을 부추기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면 법이 지향하였던 사회의 유지는 어려워지고 법은 투쟁의 수단이 되고 만다.최근 들어 우리사회에서 법이 권력집단의 지배 수단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권력유지에 유리하도록 법을 제정할 뿐 아니라 사법체계를 운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우리사회는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의 갈등이 심해지고 물리적 충돌이 일상화되는 우울한 사회가 될 것이다.정기화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2020-08-10 09:01 정기화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시장경제 칼럼] 임대차 3법에 대한 자비로운 신(神)의 심판은?

김이석 시장경제제도연구소 소장거대 여당은 아예 야당이나 전문가들이 의견을 개진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군사작전 펼치듯 입법에 나섰다. 전·월세 신고제와 임대료 인상 상한제, 그리고 계약갱신청구권 등 이른바 ‘임대차 3법’ 가운데 임대료 인상 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 도입 등 2개의 법안은 야당을 배제한 채 국회상임위에서 임대차 관련법안을 통과시킨 다음날 국회 본회의와 국무회의를 하루마다 열어 이를 통과시키고 곧바로 관보에 싣는다. 무수한 시민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법안을 왜 이렇게도 서두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보편성에 입각하지 않고 특정 계층의 편에 서는, 이번 임대차 3법의 경우에는 임차인의 편에 서는 것이 가져올 문제에 더해 꼭 지켜야할 법률 제정의 일반적 원칙의 하나인 ‘불소급의 원칙’마저 어기고 있다. 그래서 이 법들은 임대인과 임차인 간에 갈등을 일으키고 소급적용에 따른 혼란과 부당하다고 여기는 반발을 빚을 게 불을 보듯이 뻔하다.그런데 왜 이렇게 서두르는가? 혹시 정부와 여당의 지도부가 스스로의 ‘무오류성’을 믿는 ‘치명적 자만’에 빠진 게 아닌가? 혹시 그런 자만에 빠져서 이견(異見)을 들을 시간도 아깝기 때문에 이렇게 군사작전을 하듯이 해서 하루라도 빨리 법안을 시행하려고 하는 것인가?그렇다면 과연 임대차 3법에 대해, 인간의 행복을 바라는 자비로운 神이 있다면, 그 神은 어떤 심판을 내릴까? 임대인은 강자이고 임차인은 약자이기 때문에 이 자비로운 신은 이 법률에 찬성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전세시장에 일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임대차 3법에 반대할 것인가? 저명한 경제학자인 기업가정신 이론의 대가, 이스라엘 커즈너(Israel Kirzner) 교수는 자신의 이론에 근거해서 그 신이 안타까워하면서 반대할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커즈너 교수는 현실의 경제현상을 주관적 가치를 지닌 개인들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어떤 상태에 대한 ‘규범적’ 판단을 내리는 기준으로 “조정”(coordination)이란 것을 제안했다. 신이 보기에 어떤 두 사람이 가진 것을 교환한다면 둘 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데 서로가 그런 줄 모르고 교환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이처럼 조정(coordination)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 대해 그 자비로운 신은 안타까워할 것이다.기업가정신을 발휘한다는 것은, 커즈너 교수에 따르면, 기업가적 기민성을 발휘해서 이런 상태를 조정되게 변화시킨다는 의미를 가진다. 앞의 사례에서 어떤 기업가가 이런 상황을 남보다 먼저 발견해서 두 사람의 거래를 성사시킨다면 인간의 행복을 바라는 자비로운 신의 안타까움도 줄어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더 바람직한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지금 임대차 3법의 시행을 예상하고 전세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도 우리의 자비로운 신의 안타까움을 덜어낼 수 있을까? 아니다. 정반대다. 우리의 자비로운 신의 안타까움은 더 커질 것이다.이제 전세시장에서 빚어지고 있는 현상을 살펴보자. 시장의 자연스런 기능을 ‘입법’을 통해 규제하려고 할 때, 특히 자연스런 가격의 인상을 규제 입법을 통해 막을 때 대상이 된 재화가 시장에서 사라지는 ‘품귀’ 현상이 빚어진다고 경제원론은 설명한다. 구(舊)소련에서 g당 쇠고기 값을 통제했더니 살점은 거의 없는 뼈가 대부분인 쇠고기만 시장에 나와 가격규제를 무력화하거나, 뼈가 별로 없는 토끼고기의 경우 시장가격을 강제로 인하하도록 했더니 토끼고기가 시중에서 사라졌다고 한다.‘임대차 3법’도 임대료 인상의 폭을 5%로 제한했다. 유사한 가격통제다. 지금까지 2년이던 계약기간을 2년 더 연장할 권한을 임차인에게 부여했다. 계약이 만료되어도 그 이상 올릴 수 없도록 규제했다. 다만 임대인 자신이 들어와 사는 경우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 수 있게 했다. 경제원론이 설명하듯이, 임대인들은 전세매물을 거둬들였고 그 결과 지금 시중에 전세매물이 품귀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이에 더해 4년간 올리지 못할 것을 고려해서 기존의 세입자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그 집을 당분간 비워두거나 자신이나 자녀가 들어와 살겠다는 임대인들이 많다고 한다. 전세매물의 품귀는 전세가격의 앙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런 앙등된 전세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임차인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그렇다고 임대인들이 행복한 것도 아니다. 2년 후 당시의 시장상황과 상관없이 5% 이내에만 가격을 올릴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전세로 들어와 살려는 임차인이 많은 지역인데도 임차인은 나가고 집주인은 아직 들어와 살지 않고 있어서 당분간 비어있는 주택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이런 주택을 볼 때 무엇보다 인간의 행복을 바라는 자비로운 신은 가슴이 아플 것이다. 그 신은 인간들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래의 기회가 이에 대한 무지(ignorance)로 방치되는 상태조자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이제 수요와 공급 상황에 따라 시장(전세)가격을 지불하고 살겠다는 사람이 있음을 공급자도 알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그런 주택이 비어있다고? 인간의 행복을 바라는 자비로운 신의 가슴은 찢어질 듯이 아플 것이다.김이석 시장경제제도연구소 소장

2020-08-03 09:01 김이석 시장경제제도연구소 소장

[시장경제칼럼] 소유와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로

김인영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코로나19 사태 대응 과정에서 국가가 어디까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지는 중요한 이슈다. 세계는 코로나19 대응으로 인한 개인의 자유 침해와 관련하여 여전히 논쟁 중인데 우리 언론은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자유 침해를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모습이다. 왜 그럴까? 개인이 먼저 있고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인데, 최근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자유 ‘쯤’은 희생될 수 있다는 사고가 사회에 팽배해지고 있다.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우리의 문화에 그리고 역사 속에 개인의 자유와 자유주의에 대한 관심이 적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초기에 스웨덴 정부가 취한 시민의식에 기반을 둔 집단면역 달성이 관심을 받았다. 봉쇄조치를 최소화하며 ’보건과 자유’ 사이에서 ‘자유’에 방점을 둔 것이었다. 물론 보건과 경제 사이에서 경제를 중시했다는 시각도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언론은 뉴욕타임즈(NYT)를 인용하며 스웨덴이 생명과 경제 둘 다 살리지 못했다는 식의 방역 실패 논평만 보도했다. 대대적 봉쇄조치에 힘을 기울인 주변 덴마크나 노르웨이에 비해 사망자는 훨씬 많았음에도 경제적 피해는 비슷했다는 논지였다.그러나 사실 뉴욕타임즈는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아 행복하고 만족해하는 스웨덴 사람들의 일상을 더 많이 보도했다. 또 뉴욕타임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느라 논지가 오락가락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봉쇄조치를 강화·확대하면 봉쇄로 인한 문제점을 지적했고, 경제활동 재개에 나서면 아직 통제가 필요함을 강조하는 식으로 왔다 갔다 했다.코로나19로 인한 자유의 침해에 대한 우리의 언론과 방송의 보도는 한심스러운 지경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정치적 자유, 언론의 자유, 민주주의를 외친 것을 가보(家寶)처럼 자랑했던 자칭 진보적 언론들은 표변하여 정부의 지나친 개인정보 추적과 감염자를 죄인시하는 가둬두기(격리)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물론 수많은 기사의 어느 구석에 문제점을 지적했을 수도 있다.하지만 코로나19 대책이 초래하는 개인의 자유 침해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심도 있게 다루지 않았다. 자칭 보수언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간간이 코로나19 대응 관련 정부의 지나친 개인정보 들추기, 권한 남용, ’마스크 쓰지 않을 자유’로 대립하는 미국 사회의 모습을 보도했다.코로나19 대처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큰정부’의 등장, ’온정주의(Paternalism) 정부’의 정착, 그리고 자유의 제한이 상시화 되는 현실이다. 국가가 전면에 나서고 개인과 시장은 뒤로 밀리는 큰 흐름이 당연시 되는 사회로의 길의 모습이다. 하이에크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로의 길’, ’노예로의 길’이 스멀스멀 우리 사회의 주류 사고로 자리 잡고“ 있다. 근대 자유인에서 봉건 노예로의 길이 역사의 후진인 줄도 모르고 ‘(정부가) 너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슬로건에 국민은 환호하고 있다.더 나아가 중국식으로 국가가 전염병 차단이라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삶을 무시한 지역 차단과 봉쇄가 당연시 되고 거기에 안주하는 상황이 될 것이 두렵다. 언론·방송이 거대국가의 귀환을 당연시하고 지식인들도 따라서 침묵하는 사회로 될 것은 더욱 두렵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넘어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 즉 전체주의 국가(totalitarian state)로의 길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결과는 히틀러의 나치 전체주의 독재였음을 기억해야 한다.지금 문재인 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정책의 실패들은 정부 개입과 거대정부에 대한 이념적 아집이 만들어 낸 결과다. 1차 추경 11조7000억원, 2차 추경 12조2000억원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35.1조원이라는 역대 최대 ’초슈퍼 추경’이 통과되었어도 “추경이 경제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돈풀기’에 대한 근본 논쟁은 찾기 어렵다.그저 ”정부가 잘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국민들, 추경에 자기 지역구 사업을 얹으려는 국회의원들, 돈을 풀어야 그나마 추락하는 경제를 지탱할 것이라 믿는 정부, 돈 쓰는데 재미가 붙은 정부 공무원들, 추경으로 ’돈풀기’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는 않고 입 닫은 ‘어공 바라기’ 지식인들의 합작품이다. 3차 추경의 주요 내용을 보면 ’돈쓰기’의 문제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고용안정 지원에 9조 1000억 원, 온누리상품권 1조 원 추가 발행 등 3조 2000억 원, 방역산업 육성 등 2조 4000억 원”이 거의 전부다. 추락하는 경제를 지탱하기 위한 땜질용 돈쓰기로 보인다. 미래 비전이 없는 임기응변식 예산 편성이기 때문이다.1,2차 추경은 다 썼는지, 제대로 쓰였는지 검증도 없이, 역대 최대 추경 17조3천 억 원(2013년)의 두 배 규모를 쓰면서도 정치권은 무덤덤하고, 국민은 ‘헌 번 더 재난지원금’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마이너스 경제성장 막기용 지출이 ’국민이 원하는바’라면 그게 민주주의다. 여기에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주라’가 포함되면 그건 포퓰리즘이다. 그러나 대중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결합은 재정 파탄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의 재정파탄은 대중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결합으로 시작됐다.다음 세대의 돈을 빼앗아 현 세대가 마구 쓰는 ’양아치 짓’에 대한 반성이나 의구심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일자리 추경’이 아니라 ’알바 추경’이라는 지적이 외면 받고, ‘기후 악당’이라는 비판을 넘어설 ’창의적 기후변화 대응’이 아니라 ‘무늬만 녹색’이라는 지적이 묻혔다.’정부는 만능이 아니다’, ‘큰 정부는 큰 실패를 낳는다’라는 국가주의 신화(神話)에 대한 근본 논쟁이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돈 벌어 세금내고, 일자리 만드는 기업과 기업인이 이렇게 정권으로부터 수난을 당해도 아무 말도, 아무 일도 없고 자칭 선진국이 되는 풍토가 된 것이다. 노조(勞組)를 걱정하면 ’정의’롭고, 기업(企業)을 걱정하면 ‘토착왜구’ 취급받고, 경제관료가 기업 걱정을 하면 ’정경유착’ 의심받고, 정당이 기업을 걱정하면 후원금 받았느냐고 지탄받는 현실은 잘못 되도 크게 잘못 되었다.진정으로 노동자의 일자리, 임금, 복지를 걱정한다면 기업이 장사 잘하고 ‘세금 팍팍’ 내는 경제가 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주장은 친기업 ’적폐(積弊)’로 찍히는 현실이다. ‘정부는 만능이 아니다’, ’정부보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에 대한 근본 성찰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개인의 자유’가 보장받지 못하니 ’개인의 소유’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의 본질은 개인 재산권 침해를 통한 집값 잡기다. 문정부는 6·17 부동산 대책을 통해 강남구 청담, 삼성, 대치동과 송파구 잠실동 전역을 ‘토지거래 허가구역’으로 묶었다. 부동산 정책 실패라는 비난을 받게 된 정부가 국민의 재산권과 거주·이전의 자유라는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하는 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헌법 제14조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로 규정된 기본권마저 부정당하게 되어도 우리 사회는 아무 말이 없다. 이념적 아집과 과도한 정치화(over-politicization)가 만들어낸 정책 실패를 국민의 자유 침해로 대응해도 지식 사회는 침묵하고 있다.아파트 1채만 허용하는 소유권 부정 현상이 고위공직자를 넘어 일반인에게까지 정착될까 두렵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이 발의한 “시장과 도지사가 정하는 아파트 전월세 인상액” 법안이 통과될까 공포스럽다. 그것은 공정사회도 아니고 국가주의 평균사회 또는 사회주의 평등사회로의 길이다.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이 중국보다 나은 점은 적어도 중국공산당의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개인 재산을 지키며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인의 자유와 소유권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우리의 현실이 매우 우려된다.김인영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

2020-07-27 10:37 김인영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

[시장경제칼럼] ‘부동산 국민공유제’는 망국적 발상

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현 정권의 주택 정책이 점입가경이다.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 재산세·양도세·취득세 인상, 거래허가제, 다주택 보유 규제, 초과이익 환수, 대출 규제, 조변석개하는 임대주택 정책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내는 정책에 어지러울 지경이다. 정권 출범 후 지난 7월 10일까지 세세한 것까지 포함하면 22번째인데, 이는 그 숫자 자체로써 정책의 방향이 틀렸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다. 실제로 그 동안 주택 가격과 임대료는 꾸준히 올랐다. 통화 증가와 규제가 그런 결과를 초래한다는 지적에 정권은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최근에는 주택 공급 확대를 위해 그린벨트를 일부 해제할 생각인 것 같으나, 지금의 시장 봉쇄 정책을 폐기하지 않으면 공급 효과는 그 만큼 줄어든다.현 정권은 부동산을 매개로 버는 돈은 불로소득이므로 이를 모두 환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붙잡혀 있다. 이를 허용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 질문은 과연 불로소득이 존재하며, 또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를 누구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정의로운지에 대한 것이 된다.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개인의 마음속 행복인데, 이는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를 안전하게 소유하고 즐길 수 있다. 둘째, 개인이 가진 신체의 외적 장점 등인데, 이는 약탈할 수는 있지만 약탈자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셋째, 근면과 행운으로 얻은 소유물인데, 이는 약탈 가능하고 약탈자에게도 이익이 된다. 또한 이런 것들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가용하지 않다. 따라서 재산 소유의 불안정성이 자원의 희소성과 함께 사회 형성의 주요 걸림돌이 된다.그런데 이기적 인간들이 남의 재산을 약탈하려는 정념에만 휩쓸리면 사회 질서가 파괴되고 원하는 욕구를 달성할 수 있는 통로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한다. 따라서 인간은 이런 속성의 정념을 제어하고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타산적 계산 아래 남의 재산을 넘보거나 약탈하지 않는 행위에 동의하게 된다. 그런 행위에 대한 동의는 도덕 규칙으로 확립되고 도덕 규칙은 정의감이라는 공감에 의해 지탱된다. 따라서 정의는 자원의 희소성과 인간의 이기심이 그 원천이며, 정의의 실현은 곧 소유의 안정성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다.사람들이 특정 장소에 특정 주택을 소유하는 행위에는 주거 목적도 있지만 미래에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도 있다. 그런데 어디에 어떤 주택을 소유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당면한 의사결정이며, 이는 기업가 정신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불로소득이라고 하는 횡재는 뜻밖에 얻은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미래의 불확실성에 잘 대처한 보상이다. 물론 순전히 운(運)에 의한 이익을 상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업가 정신에 의한 이익과 순전히 행운에 의한 이익을 구분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주택에 대해서는 투기적 수요와 실수요를 구분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도 없다.주택 소유에 따른 이익을 불로소득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에서 가져가면 사람들은 자원 사용에 있어 신중을 기하지 않는다. 어떤 행위에서 개인이 얻은 이익을 국가가 모두 환수한다면 이기적 인간들의 이윤 동기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또 이윤 동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결과물, 예를 들어 서울과 같은 세계적 평판을 얻은 도시는 그런 동기 제거와 함께 사라져버린다. 따라서 비록 사람들이 횡재라고 인식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원 소유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우선 자원의 효율적 사용을 위해 바람직하다. 이윤 동기의 박탈은 자원의 효율적 사용 유인의 박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다음으로 누가 무엇을 얼마나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윤리적 기준에 경제학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른바 불로소득을 환수해야 한다는 논거는 재산 소유자가 부가가치를 낳는 데 아무런 공헌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횡재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횡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재산 소유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재산 소유에 따른 이익을 그 소유자에게 귀속시키지 않는 것은 사유 재산 제도로 뒷받침하는 개인의 자유와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해치기 때문이다.그런데 그 동안의 부동산 정책이 주택 가격과 임대료 상승을 유발하고 시장 질서를 파괴함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이 이를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는 것을 보면, 우리는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바보천치가 아니고서야 그런 정책의 결과가 엉망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풍선원리는 부푼 풍선의 한 곳을 누르면 다른 곳이 튀어나오고, 튀어나온 곳을 누르면 또 다른 곳이 튀어 나오는 현상이 반복되는 원리를 일컫는데, 정부의 규제와 민간의 회피가 반복되는 현상의 설명에 자주 이용된다. 지금까지의 부동산 정책의 진행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 우리는 현 정권은 부동산에 대한 규제와 회피의 반복 과정에서 점점 더 규제의 강도를 높이고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부동산 시장이라는 시스템이 붕괴되어 아수라장이 되면, 그 때를 승시(乘時)하여 이른바 ’부동산 국민공유제’를 위한 여론을 조성해 갈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부동산 국민공유제란 사람들이 얻은 불로소득(?)과 개발이익을 세금으로 환수하여 부동산 공유 기금을 만들고, 이 기금으로 공공의 부동산 소유를 늘려 공공 임대주택, 토지, 건물이 필요한 기업과 개인에게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이다. 이는 최근 작고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2020년 신년사에서 제안한 것이며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최근 발언에서도 읽을 수 있다. 현재의 부동산 정책 입안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 망국적 발상이다.따라서 부동산 문제는 이제 단순히 부동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경제 체제를 바꾸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 추측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만약 맞는 것이라면, 그 때가 바로 대한민국의 자유 세력과 현 정권이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첨점(尖點)이 될 것이다.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

2020-07-20 09:02 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

[시장경제칼럼] 미국의 화웨이 제재, 그리고 5G 디커플링

미국은 여러가지의 제재를 통해서 세계가 화웨이의 5G 장비 사용을 차단하기에 나섰다. 화웨이는 1987년에 세워진 중국 통신 장비 제조 기업인데 지금은 5G 통신 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대가 되었다. 2018년 현재 시장점유율 31%이다. 미국의 화웨이에 대한 견제가 시작된 것은 2008년 부터지만, 전방위 압박으로 확대된 것은 트럼프 행정부 시대인 2018년부터다. 미 연방통신위원회는 중국 통신장비 사용업체에 대해서는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기업 제품 사용 금지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2019년 국방수권법(NDAA)’에 서명했다. 그 해 10월 캐나다 수사 당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런정페이 회장의 딸이자 화웨이 CFO인 멍원조우를 캐나다에서 체포했다. 2020년 5월 미국 상무부는 미국이 아닌 제3국에서 제조한 반도체라도 미국 기술이나 장비를 활용한 제품은 화웨이에 팔지 못하게 하는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미국 정부는 동맹국들에게도 화웨이 제재에 동참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본과 호주는 진작부터 동참을 선언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미국의 요구에 미온적이전 나라들도 중국의 코로나 사태 대응 태도와 홍콩 국가안전법 강행 사태를 보면서 제재에 동참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어 가고 있다. 반면 러시아 이란 터키 파키스탄 등 권위주의 정권이 통치하는 나라들은 화웨이 장비응 화웨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화웨이 5G 장비의 사용 여부는 이제 미-중 디커플링의 또 다른 얼굴이 되었다.미국이 화웨이 제재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국가안보 차원의 고려다. 화웨이의 통신장비를 통해 자유세계의 정보가 중국에 도청당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화웨이 장비에 기반한 사회가 파괴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물론 아직까지 악용의 구체적 사례가 드러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우려하는 것은 앞으로 악용될 가능성이다. 점점 드러나고 있는 중국 공산당의 행동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걱정해야만 하는 위험으로 보인다.자율주행 자동차, 원격 의료, 화상 교육, 스마트 시티, 사물 인터넷, 안면 인식 시스템 등 앞으로 형성될 세상에서 5G 통신망은 가장 중요한 인프라이다. 만약 5G 통신망을 지배하는 자가 악용하려 한다면 경제와 사회의 구석구석을 통제할 수도 있고 마비시킬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5G를 담당하는 통신사는 소비자의 이익에 충실히 봉사하는 기업이어야 한다. 시장경제 국가의 대부분 기업들은 당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고객을 잃어서 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중국 기업인 화웨이는 다를 수 있다. 중국의 어떤 기업이라도 중국 공산당이 명령하면 복종해야 한다. 법조문에 그렇게 쓰여 있기도 하지만 법이 없더라도 중국의 기업이든 개인이든 공산당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중국 기업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에 중국 기업인 화웨이가 다른 나라의 통신망을 설치하고 관리할 경우 소비자 주권의 관철될지 자신할 수 없다. 특히 중국 공산당에 의해 악용될 소지는 항상 있다.미국의 제재는 세가지 경로로 화웨이에 타격을 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첫째는 시장 차단이다. 미국 정부의 중국 제품 사용자에 대한 보조금 지급 중지, 국방관련 시설에서의 화웨이 장비 사용 금지 등은 미국내 화웨이 매출을 감소시킬 것이다. 일본, 호주, 영국 등에서도 화웨이의 시장을 잃고 있다. 판매가 줄어드는 만큼 규모의 경제를 누리기도 어려워서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둘째는 5G 장비의 중요 부품인 반도체 공급에 지장이 초래되고 있다. 5G 장비에는 7nm 급의 최첨단 AP(Application Processor) 반도체가 필요한데 그것을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은 대만의 TSMC 와 삼성전자만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SMIC 등 중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7nm 수준의 정교한 반도체 생산기술을 갖출 때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TSMC는 이미 화웨이에 대한 중단을 결정했고 삼성전자 역시 최근 화웨이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화웨이의 5G 비즈니스는 부품 조달 차원에서도 난관에 부딪혀 있다.세번째의 타격은 기술확보 경로의 차단일 것으로 보인다. 특허 컨설턴트인 패턴트 리절트의 분석에 따르면 화웨이가 보유한 최고 기술들의 2/3는 미국, 캐나다 등 서방 기업에서 매입했거나 그 나라 출신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해서 얻은 것들이다. 미국 정부는 그 경로도 차단하고 나섰다.이처럼 중국은 서방의 시장과 부품 서플라이 체인과 기술 및 인력 시장으로부터 디커플링 되어 가고 있다. 디커플링의 결과는 무엇일까? 극단적인 경우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과 중국을 중심으로 국가들이 서로 별개의 분리된 차세대 통신망을 만들고 사용하게 될 수 있다. 사실 지금도 중국은 세계와 분리된 별개의 인터넷망을 운영하고 있다. 차세대 통신망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진영국들의 통신망과 중국을 따르는 나라들의 통신망이 서로 분리되어 설치, 운영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5G 와 똑 같은 것일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그렇게 된다면 전세계가 통합된 단일 5G 시스템을 택할 때에 비해 보급되는 속도와 시기는 늦어질 것이고 품질도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화웨이의 최대 강점이던 가격 역시 화웨이가 있을 때보다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한국은 어떤 네트워크에 속하게 될까? 지금까지는 SKT와 KT는 에릭슨, 노키아, 삼성전자의 장비를 섞어서 사용해왔고, 화웨이 장비를 사용한 곳은 LGU+ 뿐이다. 따라서 기업과 소비자가 선택한다면 미국 중심의 네트워크를 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정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좌파 정부가 계속 집권할 경우 중국 주도 네트워크를 선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미국의 화웨이 제재는 5G 통신망의 디커플링을 초래하고 있다. 그로 인해 통신과 산업의 발전은 지장을 받을 것이고, 소비자 역시 큰 손해를 입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화웨이 제재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불신이다. 그들이 5G 통신망을 통해 세계를 자신의 지배 하에 두려 할 것이라는 의심 때문이다.그 의심이 합리적인지 아닌 지에 대한 판단은 보는 사람이 관점에서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최소한 필자는 합리적 의심이라고 생각한다. 화웨이처럼 공산당 지배를 받는 기업은 보통 기업과 달리 봐야 한다. 거래 상대방 기업은 경제적 이익만으로 거래에 임하지만 화웨이 같은 기업은 숨은 의도, 공산당의 숨은 목표를 경제적 이익 뒤에 감추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LGU+ 이 사례에서 보듯이 보통의 기업들은 상대방의 숨은 의도가 무엇이었든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마다하지 않으려 할 가능성이 높다. 화웨이와의 거래는 디커플링을 감수하더라도 차단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김정호 서강대학교 겸임교수

2020-07-13 10:03 김정호 서강대학교 겸임교수

[시장경제칼럼] 인플레이션인가, 디플레이션인가

안재욱 (경희대 명예교수, 경제학)인플레이션은 물가수준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인플레이션은 통화팽창을 의미하였다. 그러던 것이 현대에 와서 통화팽창의 결과로 나타나는 지속적인 물가상승만 인플레이션으로 쓰이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통화팽창을 화폐인플레이션(monetary inflation), 지속적인 물가상승을 물가인플레이션(price inflation)으로 구별하여 사용하는 경제학자들이 있긴 하다.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저금리 정책 등을 통해 엄청난 돈을 풀었다. 그 결과로 통화량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2009~2019년 기간 동안 한국의 경우 M1과 M2가 각각 144.5%와 86.0% 증가했고, 미국과 일본의 M2도 각각 51%와 32% 증가했다. 전 세계적으로 GDP 대비 통화 비중이 2009년 111.17%에서 2019년 127.07% 늘어났다 (World Bank 데이터 참조).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각국에서 더 많은 돈이 풀렸다.그렇게 많은 통화량이 증가하였는데도 물가는 그렇게 많이 오르지 않았다. 소비자물가 지수가 2009년 88.452(2015년 기준)에서 2019년 104.850으로 18.5% 증가하였으며, 인플레이션율이 2009년 2.8%에서 2019년 0.4%로 꾸준히 하락했으며 2009~2019년의 평균 인플레이션율이 1.82%에 불과했다. 이러한 추세는 한국뿐만 아니다. 동일한 기간 동안 미국의 평균 인플레이션율은 1.58%, 영국 2.05%, 유로지역 1.26%, 일본 0.30%였고, 전 세계적으로는 2.69%였다. 그리고 코로나19 이후에 경제가 쇠퇴하며 물가가 계속 하락하고 있다. 낮은 인플레이션과 함께 경제성장률이 저조해지지자 디플레이션을 우려하며 돈을 풀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관찰하는 인플레이션은 소비자물가지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비자물가지수에 포함되는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 통화량 변동에 따른 물가의 변동의 범위는 소비자물가지수에 포함되어 있는 재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 범위는 경제전반에 걸친다. 통화량이 증가하여 소비자물가지수에 포함되지 않는 재화의 가격을 심각하게 변동시켜 경제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면 소비자물가지수만을 보고 통화정책을 수행할 경우 커다란 오류를 범할 수 있다.그 단적인 예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당시 미국은 저금리 정책 등을 통해 많은 돈을 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물가지수를 바탕으로 한 인플레이션이 2% 내외였다. 그러나 저금리정책으로 풀린 많은 돈은 주택시장으로 흘러들어가 주택가격이 폭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중앙은행인 Fed는 소비자물가지수만을 바라보고 인플레이션 우려가 없다는 판단 하에 돈을 계속 풀었다. 그것은 결국 주택시장의 버블을 만들었고, 그것이 꺼지면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터졌다.통화팽창은 실물의 물가만을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니다. 자산의 가격들도 끌어 올린다. 그래서 우리는 재화 인플레이션뿐만 아니라 자산인플레이션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불어난 많은 돈이 실물보다는 자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자산가격을 크게 상승시켰다. 주가(KOSPI)가 2009~2019년 동안 89.1%, 금값이 43.7%, 채권가격이 23% 올랐다. 이러한 추세는 미국과 유럽도 마찬가지다. 2009년부터 2019년까지 기간 동안 미국의 SAMP;P500와 유럽의 고수익회사채(high yield bond)지수가 각각 300%와 250% 이상 올랐다. 이것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의 확대통화정책으로 풀린 돈의 대부분이 실물부문이 아닌 주식과 채권 등 금융부문으로 흘러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실물부문이 성장하지 않은 채 금융부문만 성장하는 것은 사상누각처럼 위험하다. 지금은 디플레이션을 우려할 때라며 돈을 더 풀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자산인플레이션을 우려해야 할 시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돈을 더 풀었다가는 지난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와 마찬가지로 자산가격 버블이 형성되었다가 꺼지면서 경제위기를 맞을 수 있다.게다가 통화팽창과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다. 통화팽창이 소득불평등을 야기한다는 사실이다. 통화량을 늘렸을 때 새로 투입된 통화량이 구성원 모두에게 동시에 똑같이 배분되지 않는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 따라 늘어난 통화량은 제일 먼저 은행의 지준금으로 들어가 은행을 통해 시중에 나오게 된다. 은행대출을 통해 새로운 화폐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입수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들이 오르기 전보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실질구매력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높다. 그러나 가장 나중에 새로운 화폐를 입수한 사람은 거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이 오른 뒤이기 때문에 새로운 화폐가 수중에 들어와도 그의 실질구매력은 증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새로 유입된 통화를 일찍 손에 넣는 사람과 나중에 입수하는 사람 간에 소득격차가 발생한다. 최근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갈수록 소득불평등이 커지고 있다. 통화팽창은 소득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지금 한국경제가 심각한 불황을 겪는 이유는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코로나19의 영향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정부가 취한 각종 규제로 인해 경제활동의 활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돈을 풀게 아니라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유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기업 활동을 옥죄고 있는 각종 규제를 철폐·완화해야 하며,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만드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오히려 자산인플레이션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통화팽창에 따른 소득불평등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안재욱 (경희대 명예교수, 경제학)

2020-07-06 11:20 안재욱 (경희대 명예교수, 경제학)

[시장경제칼럼] 사회주의 국가론: 온정주의 vs. 어버이주의

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의 핵심가운데 하나는 “나의 삶 책임지는 국가”다. 나의 삶에 필요한 소득, 일자리, 건강, 노후, 자녀교육 등을 책임지는 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런 국정 어젠다를 지지하는 세력이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국정철학의 바탕에 깔려있는 문제, 즉 ‘왜 개인의 삶을 국가가 책임져야하는가’의 문제, 간단히 말해서,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문제다. 이는 국가철학의 핵심 문제 가운데 하나다.흔히 국가론을 인간의 이기심에서 도출하는 게 일반적이다. 자본주의는 이기적이기 때문에 효율적인 질서가 형성될 수 없다는 이른바 ’홉스의 문제’(Hobbsian Problem)가 야기된다는 것이다.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체제를 계획경제로 교체해야 한다는 게 토마스 홉스 전통의 국가주의다.주목할 것은 ‘온정주의’(paternalism)와 ’어버이주의’(parentalism)를 근거로 하여 국가의 존재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두 가지는 성격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구분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전자만을 고려하여 국가주의를 설명했다. 칸트, 미제스, 하이에크 등 자유주의자들은 복지국가를 비판할 때 주로 온정주의를 비판했다. 국가개입의 존재 이유로서 그들은 어버이주의를 간과했던 것이다.◇온정주의는 하향식 국가론온정주의 국가론은 개인은 국가의 도움이 없으면 합리적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국가의 존재 근거를 설명한다. 먹방(먹는 방송)규제, 비만세(肥滿稅)처럼 스스로 건강도 돌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과 민초를 대신해서 국가가 강제로 그들의 건강을 돌봐야 한다는 온정주의태도가 국가개입을 정당화한다.어버이주의는 시민들이 자신을 대신해 필요한 것을 정부가 해주기를 바라는, 국가에 의존하고 싶어 하는 태도다. 시민들은 자신을 대신해서 국가가 선택하고 책임져주기 바란다. 온정주의는 민초나 백성은 삶에 대한 확실한 가치관 또는 선호를 가질 수 없거나 설사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불합리하기 때문에 국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통치자가 자신의 가치관이나 선호를 강제로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정주의는 이 같이 엘리트적 태도다. 국가의 지지 태도에서 온정주의는 하향식인 반면 어버이주의는 상향식이다.◇어버이주의는 상향식 국가론이 맥락에서 오이겐 뵘-바베르크(E. B?hm-Bawerk)가 발견한 ‘미래선호를 경시하는 인간의 성향’은 흥미롭다. 이자가 왜 생겨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적용되는 그의 ’미래선호 경시법칙’은 실업.연금· 건강과 관련된 국가의 강제보험과 같은 복지국가의 존재이유를 설명한다. 실업.연금· 건강문제와 같이 미래에 생겨날 문제를 경시하는 성향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자발적인 보험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 의한 강제보험은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국가의 노예가 되기 싫은 시민을 노예로 만드는 게 온정주의인 반면에 어버이주의는 국가의 노예가 되고 싶어서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는 태도다. 이는 사회주의 지지태도가 상향식이다.어버이주의는 부모와 어린 자녀 간의 관계와 동일하다. 어린아이는 어버이 품에 안겨서 보호받을 때 아늑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면 붙들어주고 상처가 나면 치료해주고 행동이 지나쳐도 책임을 묻지 않고 흔쾌히 용서한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그렇게 해줄 걸 알기 때문에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확실하다고 해도 두려움 없이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어린아이가 성장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환경에 직면하면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일자리나 소득, 건강이나 노후도 불안해져서다. 자녀를 보육하고 교육시켜야 하는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책임·독립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다. 인류는 그런 개념 없이 5만 세대 동안이나 살았다. 그래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유와 독립을 싫어한다.◇신은 죽었다. 국가가 대안이다인간은 본능적으로 의지할 것을 찾는다. 한동안 성황당, 신령님, 종교 등 신(神)에 의지했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 니체의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망망대해에 버려진 것이다. 시장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보기 때문에 시장사회에 의지할 수도 없다. 시민종교로서의 자유주의는 한국 사회에 자리 잡지 못했다. 자생적 질서도 낯설다. 자유, 독립도 어쩐지 생소하고 두렵다.한국인이 의지할 유일한 곳은 국가뿐이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가 인기 있는 구호인 이유다. 신의 죽음과 국가의 탄생은 동전의 양면이다. 시민의 애환을 어루만져주는 정부가 좋다. 어린아이를 키워주고, 학교에 보내주고,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소득을 늘려주고, 병을 치료해주고, 늙으면 보살펴주는 등,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기만 하면 자유는 희생돼도 좋다. 시민들이 국가로부터 안정감을 얻는 대가로 자유와 자립을 포기하고 싶은 동기에서 사회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독립보다 예속이 더 좋다는 뜻이다. 그런 포기과정을 설명한 게 에리히 프롬(E. Fromm)의 《자유로부터 도피》가 아니던가!◇자유주의의 과제자유주의가 온정주의와 어버이주의를 극복하여 시민들을 자유의 길로 안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유주의에게 온정주의에 대한 비판의 대상은 국가다. 시민들은 스스로 삶을 이어갈 능력이 있거나 스스로 학습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국가가 간섭하지 말라고, 또는 국가가 나서는 건 지적 자만이요 위선이라고 비판할 할 수 있다.그러나 어버이주의에 대한 비판과 설득은 온정주의와 비교할 때 비교적 어렵다. 흔히 ’대깨 x들’(대갈통이 깨져도 xxx를 좋아하는 사람)들 또는 ‘x빠들’(x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노예가 되고 싶은 시민들을 교육시켜 자유주의로 전향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좌익 정부의 기만과 위선을 보여줄 수 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결과는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이라는 걸 그리고 국가의 노예가 되면 필요한 때는 국가로부터 등을 돌려 자유를 찾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동시에 자유주의에서는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누구나 홀로설 수 있는 기회가 충분이 마련되어 있다는 걸 보여 줄 수 있다.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2020-06-29 14:56 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시장경제칼럼] 자사고와 국제중 강제 폐지는 교육의 다양성과 선택자유를 죽인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작년에는 고등학교, 이번에는 중학교다. 지난해 서울 세화고, 부산 해운대고, 경기 안산동산고 등 10개 학교가 자사고에서 일반고로 강제로 전환되었다. 최근엔 대원중학교, 영훈국제중학교가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재지정 취소처분을 받았다. 대원과 영훈은 내년부터 일반중학교로 전환될 위기에 놓였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교육부에 두 학교의 국제중학교 지정 취소 절차를 밟겠다고 밝혔다.조희연 교육감은 중학교 의무교육 단계에서 국제중학교가 모든 학생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보장하고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국제중학교는 지정 목적과 달리 일반 학교 위에 서열화된 학교 체제로 인식돼 이를 위한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고, 영어유치원에서 사립초등학교, 특수목적고로 가는 과정 중 중학교가 단계 목표가 됐다는 이유를 들었다.이런 조희연 교육감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며, 정부의 교육정책 실패의 책임을 자사고와 국제중에 떠넘기는 것에 불과하다. 한 학생이 국제중학교에 가는 것이 어떻게 다른 학생의 균등한 교육 기회를 박탈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또, 한 학교가 다른 학교에 비해 보다 나은 교육을 하여 많은 학생들의 선택을 받는 것이 어떻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박탈한다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학생이 원치도 않는 학교에 정부가 강제로 배정하는 것이야말로 공권력을 동원해 학생의 균등한 교육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아닌가. 또, 그런 좋은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막는 것이야말로 학생의 교육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아닌가. 공교육을 황폐화시킨 사람들이 우수한 교육을 하고 있는 학교를 학교 서열화의 주범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일이다.전국 17개 시도 교육감 중 좌파 교육감이 있는 곳은 14곳이다. 이들은 교육의 수월성과 다양성보다는 평등주의 교육을 내세워 자사고와 국제중을 전면 폐지하려 한다. 문제는, 그들이 내세우는 교육정책의 결과가 좋기는커녕 매우 참담하다는 데 있다.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를 보면, 좌파교육감 10년에 교육 불평등은 더 심화되었으며 학력 저하는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까지 떨어졌고, 기초학력미달 학생 수도 증가했다 (조선일보 2019.03.28.). 또한 사교육비도 폭등했다고 한다.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010년 24만원에서 2019년엔 32.1만원으로 올랐다. 특히 문재인 정부 출범 후 2018년과 2019년에 사교육비가 급등했다고 한다. 고등학생의 월평균 사교육비는 2019년에는 9.1%나 상승했다고 한다.더구나 그들은 ‘자사고는 귀족학교요 고교입시와 일반고 황폐화의 주범이다’, ‘일반고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사고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자신들의 자녀들은 그 ‘귀족학교’에서 수월성 교육의 코스를 밟았다. 전형적인 ‘내로남불’ 행태다. 조희연 교육감의 자녀 두 명도 명덕외고와 대일외고 출신이며, 장만채 전남교육감의 아들은 대원외고를 다녔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딸은 한영외고에 다니는 등 현 정부의 고위공직자의 자녀들은 자사고와 외고에 다녔거나 외국에서 유학했다.사정이 그러하고 보니 그들이 교육을 순수하게 교육의 철학을 갖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교육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자사고는 과목 편성, 학습 방법, 교재 선택 등에서 학교에 자율을 줘서 운영하는 학교다. 국제중학교는 국제화 시대에 맞는 인재를 키우고, 지나친 조기 유학을 억제하고 수준 높은 외국어 교육을 위해 설립된 학교다. 혁신학교는 현 정부와 좌파 교육감들이 입시 교육에서 탈피해 체험과 토론수업 위주로 학교 수업을 다양화시키자는 취지에서 세워진 학교다.학생과 학부모들의 다양한 교육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훨씬 더 다양한 종류의 교육을 지향하는 학교들이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사고든 혁신학교든 국제중이든 학생들이 마음껏 자신의 재능과 소질을 키우게 하고 다양한 교육 활동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가 다양한 학교를 제시하고, 학생과 학부모 등 교육 수요자들이 학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가운데 학생과 학교가 선의의 교육 경쟁을 한다면, 우리나라 미래의 교육은 더 건강해지고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자사고에 이은 이번 국제중학교의 일반 중학교로의 강제 전환은 우리나라 교육에서 최소한의 다양성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들린다. 그만큼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도 한층 어두워질 것이다. 풀빵처럼 같은 모양, 같은 맛으로 찍어내는 학교교육은 그 자체가 비극이다. 학교와 교육이 다양해지면 질수록, 자기 성향과 능력에 맞는 교육 기회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커진다. 교육 시장에서도 자유와 선택의 매커니즘이 적용되어야 한다.김소미(교육학박사/용화여고 교사)

2020-06-22 13:17 김소미(교육학박사/용화여고 교사)

[시장경제칼럼] 시장은 사라지고 정부만 남은, 돈 풀기에 미쳐버린 세상 속에서

송상우 보현한의원 원장지난 해 말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사태는 전 세계인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국가 간 이동이 극도로 제한되고, 한 국가 안에서도 외출이나 모임 등의 일상적인 활동조차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과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제한된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결국, 코로나 사태는 급격한 시장의 위축을 불러왔다. 국가마다 차이는 있지만, 많은 곳에서 대규모 실직이 발생하고 자영업자들의 폐업이 이어졌다. 부도 위기에 빠진 기업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그렇듯 정부는 경기 하강을 막기 위해 개입에 나섰다. 신속성과 규모면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돈을 시장에 풀기 시작한 것이다.문제는 이런 형태의 정부의 개입으로 인해, 코로나 사태가 해결되어도 위축된 시장 상황이 그대로 지속되거나 더 심한 불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원래 시장이 수행했던 기능을 정부가 대체해버렸기 때문이다.일부 사람들이 직업을 잃거나 소득의 상당부분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일시적으로 생계유지를 위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지원은 최소한에 그쳐야 하고, 그전에 각자가 예상치 못한 위기를 위해 준비한 저축이나 사적 보험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이번 사태를 계기로 신설된 양육에 대한 보조금이나 격리자를 대상으로 한 지원금도 과한 측면이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강화되어온 실업급여정책이다.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을 연장하고 수령액을 늘리는 것은 근로자들의 고용유지 의욕을 떨어뜨리고, 실직상태를 길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하루 8시간 애써 일해서 버는 돈과 실업급여가 비슷하다면 누구든 후자를 택할 것이다.결국 정부가 지급하는 실업급여가 시장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빠르게 늘어난 실업급여 지급액은 정부 부채를 늘리고, 궁극적으로 성실하게 납세하는 고용주와 근로자에게 그 부담이 돌아갈 것이다. 코로나 사태이후 실업급여 지급액은 5월에 월간 1조를 돌파하여 역대 최고를 기록 중이다.코로나 사태로 인해 개인들뿐 아니라 많은 기업들도 위기에 빠졌다. 기업이 무너져서 생길 대규모 실업을 예방하기 위해 정부는 막대한 지원책들을 발표했다. 지원 대상 기업 중에는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정상적으로 운영되었을 기업들도 일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시장에서 마땅히 구조조정을 받거나 퇴출되어야 할 부실기업들도 그대로 존속하게 되었다는 점이다.시장에서 소비자 선택을 통해 결정되어야 할 기업의 흥망성쇠가 정부의 선택에 맡겨지게 되었다. 물론 코로나 이전에도 대마불사 등의 논리에 따라 마땅히 사라져야 할 기업들이 정부 지원 덕에 좀비처럼 살아남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정부정책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결정되는 경향이 더 일반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이 문제다.시장경제의 우월성은 경쟁을 통한 ‘거름과정’이 작동함으로써 더 효율적인 기업이 더 많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되는 것에 의존한다. 정부의 임의적인 결정이 이런 시장의 ‘거름과정’을 대체함으로써 시장은 제거할 수 있었을 수많은 비효율을 남길 수밖에 없고, 그 결과 혁신은 점점 더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궁극적으로 경제성장은 늦춰지거나 정체되고 말 것이다.극심한 불황이 예상되는 또 다른 이유는 정부의 엄청난 ‘돈 풀기’가 화폐의 타락속도를 가속화했기 때문이다.개인에 대한 지원책이지만 재난지원금과 같은 형태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현금살포는 실업급여와는 약간 성격이 다르다. 이것은 시장에서 경제활동을 통해 획득되어야 할 재화와 서비스를 정부가 배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단지 정부가 지급한 돈으로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지급하는 쿠폰으로 생필품을 구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재난지원금은 생계가 위협받는 사람들을 위한 긴급구호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양적완화정책의 하나에 불과하다. 재난지원금 외에도 다양한 코로나 관련 대출상품들, 한국은행이 단행한 금리 인하,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채 매입 등을 종합하면 ‘돈 풀기’가 대책의 전부다. 이것의 본질은 위기에 빠진 개인과 기업을 위한 구호활동이 아니라 자신들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를 인위적인 경기부양을 통해 회피하려는 시도일 뿐이다.코로나 사태가 아니었더라도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제한, 소득세 인상 등의 인기영합(populism)적 정책의 영향으로 불황은 이미 예견되어 왔다. 이번 사태가 아니었더라도 ‘돈 풀기’는 좌파적 성향의 정부에게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쩌면 코로나 사태로 인한 전 세계적인 양적완화 경향은 이번 정부의 ‘돈 풀기’ 정책에 일종의 면죄부가 된 셈이다.문제는 이런 식의 인플레이션 정책은 결코 위기를 극복하고 실업률을 낮출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현대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들에서 반복되는 경제위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화폐의 타락이 있다. 무분별한 양적완화는 화폐의 구매력을 떨어뜨린다. 구매력의 급격한 저하는 결국 화폐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화폐의 신뢰가 무너진 곳에서는 대규모의 자본유출이 일어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기축통화국이 아닌 나라들에서 자본유출은 더욱 급격하게 나타나고, 결국 경제공황으로 이어진다.구매력의 저하는 또한 물가상승을 의미한다. 하지만 물가상승은 결코 모든 재화와 서비스에 동시에 발생하지 않는다. 부동산이나 주식, 교육이나 의료 등 특정 분야의 자산과 서비스의 가격이 먼저 오르게 된다. 그 결과 이런 형태의 자산을 소유하거나 이런 분야의 직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빈부격차는 급속도로 커진다. 성실한 근로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수익의 상대적 가치는 점점 줄어들고, 그것은 신중하게 소비를 줄이고 꾸준히 저축하는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준다.결국 사회에서 가장 성실한 사람들마저 근로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그들 또한 저축을 포기하고 그 대신 대규모 레버리지를 일으켜 한탕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미제스가 지적했듯이 경제성장의 유일한 원동력은 저축이다. 저축이 아닌 빚으로 성장한 사회는 언젠가 그 성장을 반납할 수밖에 없다.이번 사태가 완전히 해결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궁극적으로 시장에 의존해야만 한다. 우리가 시장에 의존하는 이유는, 특정 개인이나 정부가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시장에서 발견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자유주의자를 문제 해결에 있어서 시장의 자연발생적 힘에 의존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수많은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각자가 지닌 최선의 지식을 시장에 내놓고, 그런 아이디어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과정에서 효율적인 해결책이 발견될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시장을 포기하고 정부에 의존하는 것은 인류가 문명의 진화를 통해 얻은 가장 강력한 문제해결 수단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송상우 보현한의원 원장

2020-06-15 15:45 송상우 보현한의원 원장

[시장경제칼럼]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개인의 자유는 지켜져야

곽은경 자유기업원 기업문화실장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우리의 일상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하루에도 수차례 방역당국이 발송한 안전문자를 받고, 코로나 확진자의 동선을 확인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외출 시 손소독제와 마스크를 사용하고 약국에 들러 공적 마스크를 구입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가 된지 오래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은 각국 정부의 적극적인 방역 조치들을 불렀다. 각 국가는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시민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했고, 국경을 봉쇄하기까지 했다. 사무실과 공장이 멈추고, 학교, 학원, 체육시설 등 다중 이용시설이 문을 닫았다.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이라는 인식이 퍼졌다.치료약도 예방 백신도 없이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감염자와 수십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사람들의 공포감이 극대화됐다. 각 개인이 감염예방에 최선을 다하더라도 지역사회 안에서 타인에 의한 감염이 가능하다. 그 때문에 시민들은 불편을 감수하며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고, 외출 시 마스크를 착용하는 등의 방역지침을 따르고 있다. 서로를 배려하고 공동체를 지키는 차원이다. 보건당국이 상황에 맞게 적절한 지침을 제시하고 시민들이 이를 따르는 것은 보건위생의 특성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한 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방역을 이유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침해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매일 방역당국이 보내주는 확진자의 개인정보를 아무거리낌 없이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시로 마스크 착용, 손씻기 생활수칙 등의 안내문자를 받고 있으며, 타지역으로 이동을 하면 해당 지역 지자체에서 발송하는 안전문자를 받게 된다. 우리 모두가 방역당국의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된 셈이다.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거나 노출된 사람에 대한 인권 침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치료와 확산 방지를 위해 확진자가 의무적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는 것은 공동체 일원으로 기꺼이 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감염차단을 이유로 개인의 통신기록, 신용카드 사용내역, CCTV까지 추적하는가 하면, 국적, 나이, 성별, 직업, 거주지, 방문지 등의 개인정보를 낱낱이 공개하는 것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 그로 인해 개인과 특정 집단에 대한 대중의 비난을 초래하기도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해 개인정보가 공개되는 것이 더 두렵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다.자가격리자에 대한 위치추적 역시 명백한 인권침해다. 자가격리자는 의무적으로 휴대폰에 위치추적이 가능한 어플리케이션을 깔아야 하며, 지침을 어기고 무단이탈을 하는 경우 위치추적 밴드를 몸에 착용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프랑스, 영국, 노르웨이 등 서유럽 국가들조차 코로나를 이유로 감시와 통제를 위한 위치추적 어플리케이션을 도입했다. 빅브라더식의 감시와 통제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권한을 갖게 되면, 이를 다른 용도로 활용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한번 시작된 간섭과 통제는 반복되거나 일상화되기 쉽다. 정부는 방역을 이유로 개인의 정보를 통제하고, 자유로운 이동, 결혼식, 장례식장 방문과 같은 일상생활까지 금지했다. 다중이용시설, 유흥업소를 강제로 휴업시키며 자유로운 영업행위를 침해하는 것을 당연시 했다. 코로나 사태를 빌미로 시작된 개인에 대한 통제와 감시의 권력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코로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시민들이 방역시스템에 적극 협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지속가능하기를, 그 속에서 본인의 자유와 재산권, 인권이 보호되기를 바라는 차원이었을 것이다. 전자출입명부로 정부가 개인의 이동 정보를 감시하는 사회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자유의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나의 사생활, 타인의 정보가 공개되는 것이 일상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각 개인은 나와 나의 가족이 속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배려와 노력은 지속하되, 타인의 자유와 인권이 침범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곽은경 자유기업원 기업문화실장

2020-06-08 10:17 곽은경 자유기업원 기업문화실장

[시장경제칼럼] 뉴딜의 경제위기 극복은 신화다

권혁철 자유기업센터 소장경기가 크게 후퇴하고 불황의 조짐이 보이자 우리 사회에 뉴딜, 소위 ‘한국판 뉴딜’이 정치인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일례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비상경제회의에서 “정부가 나서서 5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해 국민에게 제공하겠다”면서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로서 이른바 한국판 뉴딜을 추진할 기획단을 신속히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지난 5월에도 ‘대규모 일자리 창출 사업을 전개하겠다’면서 ‘한국판 뉴딜’에 대해 재차 언급했다. 조만간 구체적인 프로젝트들이 발표되고, 실행에 옮겨질 기세다.‘한국판’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는 하지만, 과거의 뉴딜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한국판 뉴딜 정책’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를 예상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1930년대 대공황의 치유책으로 도입되었던 뉴딜 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부분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즉 이와 관련해서 지난 수십 년간 학계에서 이뤄졌던 논의와 토론을 통해 분명해진 것은 뉴딜 정책이 대공황의 치유책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단기적인 경기후퇴를 장기간에 걸친 대공황으로까지 몰고 간 원인이었다는 사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와 관련해서 정치인과 많은 국민들 사이에서 ‘경제 위기 극복의 처방약’으로 ‘뉴딜’이라는 단어가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구호(救護, relief), 대규모 공공사업과 일자리 만들기 등을 통해 연결되는 이른바 ‘뉴딜 연합’을 구성해서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튼튼하게 만들고자 하는 정치적 셈법도 당연히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실제로, 뉴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노조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 중산층 개입주의자(Liberals), 남부의 백인 농민, 그리고 흑인 등의 소수 인종을 묶어 ‘뉴딜 연합’을 구성하고 이를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만듦으로써 재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뉴딜 연합’은 1980년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크게 흔들릴 때까지 30년 이상 미국 민주당의 탄탄한 지지기반이 되었었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들도 - 특히 자칭 ‘진보’ 진영 - 권력과 예산으로 뒷받침되는 정책을 통해 사회, 경제적 약자들의 삶을 개선하고, 그들이 진보의 정치적 기반이 될 수 있도록 결속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뉴딜을 바라보고 있다.또 다른 이유는 대공황 및 뉴딜과 관련해 잘못 알려진 ‘신화’들이 사람들에게 여전히 뉴딜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내용이라 하더라도 일단 한 번 방송되고 난 후에 그것을 바로잡아보려는 모든 시도가 별 효과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신화들은 사람들 사이에 자유 시장경제는 경제위기를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킨다는 환상과, 또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는 환상을 심는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두 가지 ‘신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첫 번째 신화는 ‘뉴딜 정책이 미국을 경제 위기에서 구했다’는 것이다. 이것처럼 명백한 거짓말도 없다. 1929년 발발한 대공황은 1940년대로 진입할 때까지,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시행된 지 몇 년이나 지났음에도 미국 경제는 여전히 휘청거렸고, 고실업도 여전했기 때문이다. 1930년 8.9%였던 실업률은 뉴딜정책이 시행된 1933년 24.9%로 정점을 찍고 조금씩 내려오기는 했지만, 1934년 21.7%, 1935년 20.1%, 1936년 17.0%로 여전히 아주 높았다. 1938년과 1939년에는 실업률이 19.0%와 17.2%로 다시 올라가는 일까지도 있었다. 미국의 높은 실업률은 1941년이 되어서야 10% 이하로 내려오게 된다.뉴딜정책이 공황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은 대공황과 다른 불황의 경우를 비교하면 보다 확연해진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불황은 2년 이내에 끝이 났고, 길어도 5년 이내에는 모두 종식되었다. 일례를 들자면, 1921년 불황 당시 실업률은 11.7%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1년 후인 1922년에는 실업률이 6.7%로 낮아졌고, 그 이듬해인 1923년에는 2.3%까지 떨어졌다. 이렇게 순식간에 끝나버린 불황이지만, 여기에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은 없었다. 오히려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에 의지했었다. 반면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대공황은 장장 1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과연 뉴딜이 대공황을 끝낸 것이 맞는가?시장경제에 맡겨서는 공황이 종식되지 않는다는 환상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전임 대통령인 후버와 관련된 신화에서 기인한다. 즉 후버는 자유시장 정책을 펴서 불황의 골을 깊게 한 반면에, 루즈벨트는 정부의 적극적 시장 개입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이 아닌 신화에 불과하다. 후버의 회고록은 1929년 주식시장이 대폭락하자 연방정부 안에 재무장관 멜론으로 대표되는 자연치유파(시장경제 메커니즘을 통해 부실이 청산되고 경제가 회복된다는 파)와 자신을 필두로 한 적극적 개입파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회고록에는 적극적인 정부 개입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후버는 노동시장과 임금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 스무트-할리 관세법을 통과시켜 무역을 대규모로 축소시키고 세계적인 보복관세 전쟁을 일으켰으며, 대형 공공사업과 보조금 및 구제금융 등으로 대규모 재정적자를 만들어 낸 큰 정부 지향의 인물이었다. 그가 시행했던 정책들을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에 빗대 ‘작은 뉴딜 정책’ 혹은 ‘축소판 뉴딜 정책’이라 부르듯이, 후버는 자유시장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먼 사람이었다.경기후퇴와 불황에 대한 처방을 공황을 12년 동안이나 지속시킨 뉴딜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불과 2년 만에 끝난 1920년대 초반의 불황에서 그 해법을 찾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처방전은 한마디로 ‘시장경제’이다.권혁철 자유기업센터 소장

2020-06-01 10:25 권혁철 자유기업센터 소장

[시장경제칼럼] 세상을 해석만 할 것이 아니라

신중섭 교수(강원대 윤리교육과)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칼 마르크스 묘비에 기록되어 있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포이에르바하 테제, 11)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은 세상을 수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자신의 의지대로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상이 완전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려면 우리는 의도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세상이 좀 더 나은 세상인가에 관한 생각이 사람마다 집단마다 달라서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라는 것에는 서로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이 갈등을 가장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제도적 장치가 바로 민주주의의 선거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피를 흘리지 않고, 좋은 세상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하는 정치 집단을 바꿀 수 있다. 민주주의 아래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고, 선택을 받지 못했으면 다음 기회를 준비해야 한다.“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에는 ‘해석’과 ‘변화’가 대비를 이루고 있다. ‘변화’는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서 일어나고, ‘혁명’을 위해서는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간결하고 힘 있다. 변화는 혁명이고, 철학자가 아니라 노동자가 혁명의 주체다.마르크스가 구체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철학자는 헤겔이다. 헤겔은 세계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관조했다. ‘해석’은 헤겔 철학에 나타나 있는 세계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다. 헤겔 철학의 관조와 해석은 철학의 오랜 전통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경기장의 운동선수가 아니라 운동 경기를 구경하는 관람자들을 철학적 태도의 모범으로 삼았다. 사물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사물을 성찰하는 것이 철학자의 올바른 자세라는 것이다. 이론의 어원이 관조라는 사실은 철학적 사색의 결과가 이론임을 말한다. 철학자는 현실에 대한 이론의 생산자이지 그 이론을 수단으로 삼아 현실을 바꾸는 주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해석하는 철학자의 태도는 헤겔의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나타나 있다.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라. 존재하는 바를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이성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각 개인은 그 시대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또한 철학이란 사상으로 포착된 그의 시대다. 철학이 그 자신의 시대를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 나이를 뛰어넘을 수 있고, 로도스 섬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중략) 그 개인의 이론이 실제로 그 시대를 넘어선다고 하면 그리고 그가 하나의 세계를 준비한다고 하면, 이 세계는 오직 그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헤겔에 따르면 철학은 사색이지 행동이 아니다. 철학은 이해의 영역이다. 철학은 기존 현실을 다루는 이론적 활동이다. 헤겔은 그가 살던 당시의 세계를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여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철학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가 아니라 완성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헤겔이 당시 프로이센을 신성화시켰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현실 긍정의 철학, 이해의 철학에 반대하여 ‘변화’를 내세웠다.마르크스의 ‘해석’과 ‘변화’의 대비는 현대 정치철학에서 철학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할 때 그대로 재현된다. 바라다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가 일련의 철학적 신념에 기초하고 있지만, 철학과 이데올로기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점에서 구별된다. 첫째 철학은 지적으로 깊이가 있다. 철학은 인간 존재를 꿰뚫어 보려 하고 인생 자체의 실제적 의미를 검토한다. 철학은 대상을 아주 복잡하고 전일적(holistic)인 방식으로 다룬다. 이와 달리 이데올로기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이데올로기는 세계를 대단히 단순한 용어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옳음’과 ‘그름’의 구분이 명백하고,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를 믿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도록 요구받는다.둘째로 철학은 사회 전체의 운행이 일련의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 철학을 지지하는 것은 개인이다. 철학책을 읽고 감동하는 주체는 개인이지 집단이 아니다. 개인이 철학책을 쓴 저자와 소통한다. 반면에 이데올로기는 대중을 동원한다.셋째로 철학은 성찰을 촉진한다. 철학의 목적은 우주를 설명하고 독자들이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철학은 지속적인 숙고를 요청하고 인간의 조건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검토한다. 철학은 사회 개선을 위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조언을 할 수 있지만, 핵심은 행동이 아니라 이해다. 이데올로기는 세계를 단순하게 설명하고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명백한 조치를 취할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맞게 세계를 바꿀 것을 요구한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복잡하고 근본적인 인간 존재의 변수들을 탐구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철학과 달리 이런 이데올로기는 계몽시대의 산물이다. 계몽주의는, 인간은 수동적 삶을 거부하고 능동적인 노력을 통해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연 환경뿐만 아니라 사회 환경도 인간의 의지대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정치 혁명을 유발했다. 근대의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는 산업혁명이 초래한 경제적ㆍ사회적 상황에 정치가 대응하려는 노력에서 나왔다. 이 이데올로기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화된 상황에 대응하는 이론으로서 추종자들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세계를 만들려고 했다. 이데올로기는 정치적 용어이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고, 행동 지향적이고, 대중 지향적이고, 보통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용어를 구사하고, 자신이 설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행동의 동기를 부여한다.물론 마르크스가 이론의 필요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한 것은 아니다. 원천적으로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은 해석만을 거부했다. 자유주의 지식인도 마르크스의 말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철학자의 이론이나 해석을 받아 구현할 마땅한 정당이 없을 때, 자유주의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반드시 선동가라야 합니다. 경제적 자본주의에 대하여 적대적인 현 시류를 돌려세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세계의 인구는 너무도 많아서 자본주의가 아니고서는 이들을 다 먹여 살릴 수가 없습니다. 만일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제삼 세계는 굶주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이미 에티오피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이에크가 89세 때 한 이 말은 자유주의 지식인에게 해석만이 아니라 행동해야 한다는 촉구처럼 보인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 하는가?신중섭 교수(강원대 윤리교육과)

2020-05-25 08:50 신중섭 교수(강원대 윤리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