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장경제칼럼

[시장경제칼럼] '꼰대 타파' 외치는 젊은이들', 그들은 누구인가

신중섭 강원대 교수(철학)“라테는 말이야(Latte is a horse).”를 즉시 이해하지 못하면 안타깝게도 ‘꼰대’일 가능성이 높다는데, 안타깝지는 않지만 나는 이 말을 즉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세상 참 좋아졌어.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지 않아도, 나는 ‘꼰대’인가. 자신의 경험과 신념만을 ‘절대 진리’로 생각하고, 상대와 타협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하는 기성세대를 젊은이들은 ‘꼰대’라고 부른다. 영국 BBC가 지난 9월, 우리말 ‘꼰대(Kkondae)’를 ‘오늘의 단어’로 선정하면서, ‘꼰대’를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으로 정의했다. 한국말 ‘꼰대’가 국제적 지위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꼰대 타파’를 외치는 젊은이들이 정치 세력화되지 못한 현실은 안타깝다. 그들은 ‘꼰대’들의 위세에 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다.기성세대를 ‘꼰대’로 규정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펴낸 밀레니얼-Z세대 트렌드 2020은 90년대에 태어난 ‘밀레니얼-Z세대’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첫째, 마이사이드. 내 안의 기준을 세우고 따르다. 둘째, 가취관. 가볍게 취향을 중심으로 모이다. 셋째, 소피커. 나의 소신을 거리낌 없이 말하다. 넷째, 팔로인. 검색 결과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따르다. 다섯째, 실감세대. 오감을 만족시키는 현실 같은 감각에 끌리다.그들은 ‘다만추 세대’로 다양한 삶을 만나며, ‘나’와 같은 또는 다른 삶을 엿보면서 다양한 가능성에 도전한다. 본격적인 마이웨이 시대를 열어간다. 온라인에서 누구와도 서슴없이 친구가 된다. 먼저 행동해서 선한 변화를 끌어낸다. 참여할 수 있는 ‘판’을 열고 논다. 소유보다 공유로 소비의 밸런스를 맞춘다.이미 오래 전에 디지털과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새로운 세대에 주목하여 N세대의 무서운 아이들을 저술한 돈 탭스콧은 디지털 네이티브(2009)에서 넷세대 또는 N세대(2008년 현재 기준 11-31세)를 ‘디지털 네이티브’라 불렀다. 그에 따르면 넷세대는 적극적인 창조자이며 협력자이고 조직자이면서 독자이자 작가이자 전략가다. 그들은 단순 관찰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그들은 묻고, 모색하고, 토론하고, 논의하고, 증명하고, 비판하고, 정보를 교환한다. 넷세대는 이전 세대에 비하여 더 똑똑하고, 빠르고, 더 많이 다양성을 포용한다. 그들은 정의와 당면한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고, 일반적으로 학교나 직장, 커뮤니티에서 어떤 식으로든 시민활동에 참여한다. 탭스콧은 넷세대의 특징으로 8가지를 제시했다.첫째, 그들은 자유, 특히 선택의 자유를 중시한다. 둘째, 물건을 자신의 개성에 맞게 고쳐서 쓰는 걸 원한다. 셋째, 천부적으로 협업에 뛰어나다. 넷째, 강의가 아니라 대화를 즐긴다. 다섯째, 새로운 감시자다. 여섯째, 성실성을 중시한다. 일곱째, 학교와 직장에서도 즐겁게 생활하기를 바란다. 여덟째, 스피드는 일상적인 것이고, 혁신은 생활의 일부이다.물론 넷세대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은 기성세대가 그들의 나이였을 때보다 더 멍청하고. 컴퓨터와 인터넷에 중독되어 사교의 기술을 잃어버렸고, 운동이나 건강에 좋은 활동을 할 시간을 갖지 않는다. 부끄러움이 없다. 세상에서 방향을 못 잡고 표류하고, 진로 선택을 두려워한다. 절도범이다. 온라인상에서 친구를 괴롭힌다. 폭력적이다. 노동윤리를 갖고 있지 않으며, 엉터리로 일한다. 나밖에 모르는 me-generation이다. 조금도 베풀 줄 모른다”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기성세대와 비교하여 구분되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미 그들은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대가 되었다.무엇보다 그들은 자유, 특히 선택의 자유를 중시하기 때문에 자유주의의 핵심 철학을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사이드’나 ‘아웃사이드’가 아니라 내 안의 기준을 스스로 세우고 따르는 ‘마이사이드’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원초적으로 외부의 간섭을 싫어한다. ‘마이사이드’에다 철학을 입히면 자유주의가 된다. ‘마이사이드’는 나를 나의 삶의 주권자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철학’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사회ㆍ정치ㆍ경제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적 태도를 지니지 못할 수도 있다. 생활 태도로서 자유주의가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그들을 자유주의자로 인도할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지만, 그런 계기와 동기 유발은 기성의 자유주의자의 몫이다.신중섭 강원대 교수(철학)

2019-12-23 10:21 신중섭 강원대 교수(철학)

[시장경제칼럼] 분양가 상한제가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는가?

이승모 경제평론가정부는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부동산 투기억제책과 더불어 최근에 분양가 상한제를 시행했다. 그런데 과연 분양가 상한제가 정부의 의도대로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 아마도 일시적으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라도 조만간 가격은 오히려 더욱 더 폭등할 가능성이 높다.분양가 상한제는 가격규제의 일종인 최고가격제이다. 최고가격제는 시장에서 공식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최고가격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며, 그 최고가격은 일반적으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시장가격보다 낮게 설정된다. 따라서 분양가 상한제를 시행하면 최고가격제의 효과가 필연적으로 수반될 것이다.최고가격제의 효과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강제로 규제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가격은 규제 없을 때보다 낮아진다. 둘째, 가격이 낮아짐으로써 수익성이 악화되어 향후 공급이 위축되고 부족현상이 발생하여 가격은 상승하게 된다. 셋째, 재화의 질이 하락한다. 가격이 하락하여 수익성이 낮아지므로 공급자들은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해 질을 하락시킨다. 넷째, 공식적인 가격 이상으로 거래되는 암거래 및 암시장이 발생한다. 가격 상한제로 재화가 부족해지므로 소비자들은 공식 가격인 최고가격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즉 상한제를 실시하지 않을 경우의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서라도 구입하려고 한다.분양가 상한제에도 이와 유사한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첫째, 분양가 상한제를 시행하지 않을 경우에 비해 가격이 규제됨으로써 부동산 가격이 일시적으로 안정될 수도 있다. 둘째, 분양가 상한가를 적용받는 건설회사 혹은 재개발업자의 수익성을 악화시켜 아파트 공급물량을 위축시킴으로써 앞으로 아파트의 부족현상은 심해져서 가격은 상승하게 될 것이다. 셋째, 분양가 상한가를 적용받는 건설회사 혹은 재개발업자들은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전에 비해 품질이 낮은 아파트를 제공할 것이다. 넷째, 완공 후 실거래 가격은 높을 것이다. 따라서 당첨된 사람들은 로또에 당첨된 것과 같고, 이것은 수요자 간의 부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특혜가 된다.물론 이를 방지하고 가격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전매 제한을 하지만 암거래가 발생할 것이므로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다섯째, 가격 상승이 예상됨으로써 기존 아파트의 매물이 줄어들고 수요는 증가하여 단기적으로도 가격이 안정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분양가 상한제는 정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부동산 가격상승을 부채질하는 정책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경제 원리에 입각하여 가격규제 등 시장 간섭을 하지 않아야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다.마찬가지로 정부는 부동산투기 억제책도 시행해서는 안 된다. 투기는 일반 상식과 달리 오히려 가격안정화의 역할을 한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가격의 상승 요인은 수요 증가나 공급 감소다. 문제의 초점인 투기꾼의 사재기 역시 수요의 증가 요인이다. 따라서 투기꾼의 사재기 때문에 가격이 상승한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투기꾼의 사재기로 인한 수요 증가로 가격이 상승하는 현상이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투기꾼의 사재기 때문에 가격이 폭등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효과만 평가하는 것이 된다. 실제적인 중장기적인 효과를 살펴보아야 투기의 효과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투기꾼들이 사재기를 하는 이유는 싸게 구입하여 비싸게 팔아서 그 차익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비즈니스의 원칙이며 투기꾼에게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은 현재 구입가격보다 나중에 더 비싸게 팔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그들은 정보를 이용하여 미래의 수요와 공급을 예측하고 그에 따른 미래 가격의 상승과 하락을 예측한다. 만약 그들의 예측이 틀린다면 손해를 볼 것이기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 미래를 예측한다. 만약 그들 예상대로 가격이 상승하면 그들은 투기를 통해 돈을 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가격은 상승하지 않거나 하락하면 손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정확한 예측을 위해 많은 비용을 들인다.가격 상승의 예상에 입각하여 투기꾼이 사재기를 한다. 그 결과 현재 가격은 상승한다. 시간이 지난 후 투기꾼의 예상대로 가격이 상승하면 그들은 전매차익을 얻기 위해 팔기 시작하고 가격은 다시 하락한다.만약 투기꾼이 없을 때 현재가격과 미래가격이 각각 1,000원, 1,500원이라고 한다면 투기꾼이 있을 때 현재와 미래의 가격은 각각 1,200원, 1,300원이 되는 것이다. 투기꾼이 없을 때 가격변동은 1,000원에서 1,500원으로 500원의 변동이 발생한다. 반면에 투기꾼이 있을 때 가격은 1,200원에서 1,300원으로 변동한다. 가격변동의 폭은 투기꾼이 있을 때 오히려 더 적게 나타난다. 즉 투기꾼이 있을 때 가격이 안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투기로 인한 가격 변동으로 경제가 불안정하게 된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투기를 억제하는 것이 오히려 가격안정화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일부학자들은 부동산 이외의 다른 상품에 대한 투기는 위에서 본바와 같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부동산의 특수성, 특히 공급의 고정성 때문에 부동산 투기가 부정적인 효과만 낳는 백해무익한 것으로 보고 있다.그들은 상품을 새롭게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투기의 긍정적 역할은 사라지고 부정적 효과만 초래한다는 것이다. 투기가 가격 폭등을 초래하고 가격 폭등은 다시 투기를 초래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투기는 자연적으로 소진되지 않고 가격을 계속 폭등시켜 경제의 다른 분야에 엄청난 타격을 가한 후에야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가격이 상승할 때 공급 증가가 불가능한, 즉 공급의 고정성을 갖는 대표적인 것이 토지이다. 토지 위에 건물 공급은 늘릴 수 있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그러므로 부동산 투기는 악순환뿐만 아니라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고 일부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들이 다른 상품과 달리 부동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근본적인 원인인 부동산의 특수성, 특히 공급의 고정성을 검토해 보자.주택과 아파트 같은 부동산은 공급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공산품이나 농산품에 비해 공급이 비탄력적일 뿐이다. 토지도 공급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토지 전체의 양은 간척 등이 없는 한, 거의 일정하다. 그렇지만 토지의 가격은 토지 전체의 공급과 수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별 용도별로 결정된다. 특히 용도에 초점을 두게 되면 토지의 공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한다. 예를 들어, 택지 수요의 증가로 택지 가격이 상승하면 공장부지, 농지, 임야 등이 택지로 전환된다. 따라서 부동산 투기도 부정적 효과를 초래하지 않고 다른 상품처럼 긍정적인 효과를 초래한다.부동산 가격이 급격하고도 지속적으로 오르는 근본적인 이유는 통화량의 증가이다. 일국의 총생산량 증가에 비해 통화량 증가가 많다면 물가는 상승한다. 총생산량이 10% 증가할 때 통화량이 20% 증가하면 물가는 10% 상승한다. 이와 같이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이유는 일국의 총생산량 증가에 비해 통화량 증가가 많기 때문이다. 유독 부동산 가격이 다른 재화의 가격보다 더 많이 상승하는 이유는 부동산이 화폐가치(화폐의 구매력 : 화폐로 구입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의 하락을 보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부동산이 자산으로 다른 어떤 재화보다 매력적이기 때문이다.정부가 분양가 상한제 등의 규제를 실시하거나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는 시장 간섭을 해서는 부동산 가격의 안정화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통화량을 적절히 통제해야 한다.이승모 경제평론가

2019-12-16 11:41 이승모 경제평론가

[시장경제칼럼] 시장경제질서 파멸의 끝에는 UBI와 MMT가 있다

배진영(인제대 교수, 경제학)전면 무상급식 반대에 자신의 직을 걸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자신의 신념에 많은 시민들이 동조하여 투표장으로 나갈 것으로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그런 무모한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투표율은 개표 요건인 33.3%에 턱없이 모자라는 25.7%로, 그는 서울시장 직에서 물러났다. 보수 몰락의 시발점이었고 복지의 ‘보편성’을 우리 곁에 짙게 스며들게 한 한국 근대사의 큰 사건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당시 무상 급식의 포퓰리즘을 규탄하고 그것의 체제 파괴적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그들의 외침은 시민들을 투표장으로 이끄는 데 실패했다.당시 대다수 서울 시민들이 투표장으로 나서지 않은 것은 전면 무상급식을 지지해서는 아닐 것이다. 자신들의 삶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작은 일이며 ‘좋은 일’을 하겠다는 데 굳이 나서서 반대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관심이 보여준 작은 틈과 방심의 나비효과는 실로 무서운 실체로 변모해 갔다. 이제 ‘전면무상’ 급식에 적극적으로 이의를 달고 항의하는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그러니 하고서 받아들이고 있으며, ‘전면무상’ 급식 주장자들의 논리가 오히려 정당하지 않았는가 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는 사이 좌파 정권이 들어섰고 과거에는 도저히 내놓고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던 ‘퍼주기 식’ 복지와 각종 지원금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가리지 않고 전 방위로 살포되고 있다. 공무원 수 확충과 더불어 거의 준(準) 배급제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그 끝은 어디일까? 그 끝은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이하 UBI)’과 UBI를 작동케 하는 ‘현대통화이론(Modern Monetary Theory, 이하 MMT)’일 것이다. UBI가 처음 우리 곁에 온 것은 2016년 6월 세계 최초로 UBI 제도 실시 여부를 묻는 스위스의 국민투표이다. 스위스는 국민투표를 통해 일하는 사람이든지 일 안하는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18세 이상 모든 성인에게 대략 월 300만원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는 제도를 도입할 지의 여부를 물었다. 그 결과는 76.7% 반대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었다. 마크 투웨인(Mark Twain)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조각상이라 했던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빈사(瀕死)의 사자상(Lowendenkmal)’이 말해주듯, 과거 용병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기구한 스위스 국민들에게 그저 주는 월 300만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UBI 옹호자들은 노동을 대체하는 기술의 발전으로 상당수 사람들이 실직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UBI의 단초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의 실질적 배경에는 현재의 선별적 복지시스템에 의한 ‘선별받기’가 싫다는 것이다. UBI에서는 선별받기 위한 재산 조사도 없고 일할 의사 여부도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감수해야 하는 마음의 두근거림도 없으며 무엇보다 모두가 똑같은 소득을 받으니 자존감의 상처도 없다. 이것은 우리의 ‘전면무상’ 급식 논쟁 때 좌파 진영에서 나온 논리와 아주 유사하다. 그들의 논리는 가난한 집 학생 부잣집 학생 상관없이 모두가 무상으로 급식 혜택을 받아야, 가난한 집 학생들이 공짜 대상이라는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소는 누가 키울 것인가?’ 즉, 이를 위한 재원은 무엇으로 조달할 것인가? UBI 주창자들은 현재의 복지시스템을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재원조달 문제는 없다고 한다. 현재의 복지시스템을 유지하는 재원이 UBI 하에서도 마련될 수 있다면, UBI도 하나의 대안으로 검토해볼만 하다. 그러나 핀란드의 UBI 실험에 관한 OECD 연구 결과는 UBI가 개인의 노동시간을 단축시킴을 분명히 보여준다. UBI가 일하지 않는 기회비용(노동으로부터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만족)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UBI에 의한 노동력공급의 감소는 논리적으로 당연하다. 그렇다면 UBI는 노동력 감소와 이로 인한 개인소득의 감소를 가져오게 하고 이것이 다시 세수 감소로 이어지게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UBI는 결국 이를 위한 재원을 없애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이것은 UBI가 그 스스로 자신의 시스템을 작동하지 못하게 함을 의미한다.UBI 주창자들은 UBI가 가정과 직장 그리고 시장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켜줌으로서 개인의 사회경제적 독립을 약속해준다고도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멋진 제도인가! 좌파 진영은 이렇듯 물질적 평등 구현을 위해 인간 감성의 약한 고리를 건드리는 데 탁월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결국 누군가가 “소를 키워야 한다.” 누가 그 일을 맡을 것인가? 결국 개인의 사회적 독립의 장밋빛 전망도 허망한 눈가림에 불과하다.그래서 UBI가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무작정 돈을 찍어내는 수밖에 없다.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논리가 현대통화이론(MMT)이다. MMT는 UBI의 엔진으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이끄는 UBI와의 쌍두마차이다. 현대통화이론, 얼마나 화려하고 멋진 용어인가? ‘현대’라는 말로부터 무언가 앞서가는 내용을 담은 듯하고 그럴 듯한 수학적 탈을 쓰고서 이론이라고 하니 논리적 완벽함을 갖춘 것처럼 비치게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적인 것도 아니고 진정한 이론도 아니다. 그것은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을 통한 끝없는 퍼붓기에 불과하다.마르크스는 1875년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from 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to each according to his needs).”라는 강력한 선동의 힘을 지닌 슬로건을 내걸었다. 모두에게 필요한 만큼 주겠다는 UBI와 그것의 엔진 MMT는 마르크스 슬로건의 현대판이 아니고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그 슬로건 후 50년이 채 안 되어 소비에트 연방이 결성되었고 그 후 전 세계의 1/3이 사회주의 국가 체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100년이 넘는 그 거대한 실험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실패로 끝났다. 체제 경쟁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현실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우려감을 낳고 있다. 미국의 최근 여론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43%(갤럽) 또는 10명 중 4명(해리스)이 이런저런 사회주의 형태가 좋을 것으로 믿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현 정권의 수많은 실정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은 여전히 40% 이상이니 말이다.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1990년 동구권 체제의 붕괴는 그 체제 하의 사람들이 사회주의 이념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해서가 아니다. 그 체제가 만든 현실이 어쩔 수 없어서 포기했을 뿐이다. 그것은 여건만 성숙된다면 언제든지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힘이 작동할 것임을 시사한다. 이미 보편적 복지에 맛을 들여 놓은 상태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길 어디쯤에서 우리는 멈출 수 있을까? 진정 다시 ‘죽어봐야’ 죽음을 알 것인가? 시장경제질서를 파멸로 이끄는 파고를 넘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주어진 엄중하고 험난한 과제임에 분명하다.배진영(인제대 교수, 경제학)

2019-12-09 14:02 배진영(인제대 교수, 경제학)

[시장경제칼럼] 모병제가 징병제보다 훨씬 정의롭다

전용덕 대구대 명예교수(경제학)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지난 달 6일 ’인구절벽’ 때문에 모병제를 총선공약으로 검토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청년들 사이에서 한 때 모병제에 대한 찬반 양론이 뜨거웠다. 자유한국당은 논평을 통해 ‘민주당은 인구절벽을 모병제의 근거로 들고 있지만 실상은 청년 일자리 정책이고 바로 그 이유로 총선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여당이 모병제를 위한 재정 대책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야당은 지적했다. 이번 모병제에 대한 논란의 한 가지 특징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좌파 정당이 모병제를 찬성하고 우파 정당이 모병제를 반대했다는 점이다. 사실 정상적이라면 우파 정당이 모병제를 찬성하고 좌파 정당이 반대했어야 한다. 즉 이번 모병제에 대한 논의는 좌우가 바뀐 것이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병제에 관한 한 우파 정당은 지향점, 즉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없는 것이고 좌파 정당은 표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다는 포퓰리즘 정당이라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민주연구원은 모병제의 필요성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무엇보다도 인구절벽의 시대에 모병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입영 가능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모병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모병제 전환이 군가산점으로 인한 역차별 논란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때문이다. 셋째, 남녀 간 갈등 문제도 피할 수 있다. 넷째, 사병을 18만 명 감축하면 GDP(국내총생산)가 16조 5000억 원 상승한다며 경제적 효과도 있다고 연구원은 밝혔다.모병제 찬성자와 반대자를 막론하고, 모병제에 대한 논의에서 빠져있는 것은 ’징병제가 정의롭지 못한 제도’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징병제는 사병의 인신을 구속하고 약탈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인신, 자유, 재산 등의 보호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점을 우리는 종종 잊고 지낸다. 그것은 마치 공기와 같은 것으로 너무 당연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병제 논의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징병제에 비해 모병제야말로 정의로운 제도라는 점이다.그러면 모병제의 경제적 측면을 검토해보자. 병사 1인당 연봉 4000만원을 40만 명 정도에게 지불한다고 하면 그 비용은 16조 원 정도가 예상된다. 정부 1년 예산 500조 원 시대에 16조 원이라는 비용은 그렇게 크지 않다. 하물며, 복지비용으로 1년에 수백 조 원을 쓰는 시대에 사병에게는 한 달에 겨우 몇 십 만 원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너무 맞지 않는다. 물론 국방비용은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국방비용에서 인건비만을 고려할 때 16조 원은 그렇게 큰 돈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의무 복무로 청년들이 잃게 되는 손실은 안 보이는 것이지만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의 크기는 16조 원을 훨씬 능가할 것이다.모병제와 징병제의 차이를 만드는 다른 요인을 보기로 한다. 징병제에서 사병은 연간 몇 백만 원의 예산이 소요되는 노동자이지만 모병제에서 사병은 몇 천 만원이 소요된다. 군대를 지휘하는 입장에서 보면 사병의 가치는 그가 지금 받고 있는 연봉이기 때문에 그런 연봉에 맞는 대우를 하고 각종 지원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그 결과 모병제에 비해 징병제에서 더 많은 사병이 무고하게 희생될 수밖에 없다.미국은 1960-1970년대 베트남전에서 무기, 참전인원, 전쟁비용 규모 등에서 북베트남을 크게 능가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베트남에게 패했다. 이 때 밀튼 프리드만과 같은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동기부여라는 측면, 정의로운 제도라는 측면 등에서 모병제가 징병제보다 우수하다는 이유를 들어 모병제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이후 미국은 모병제를 채택하여 글로벌 전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지난 달 민주연구원이 모병제를 제안했을 때, 우파의 가치를 대변한다고 여겨지는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등은 더 진지하게 모병제를 검토하고, 좌파 정당이 제안했다고 무조건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모병제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어야 했다. 청년의 표 때문이 아니라 모병제가 징병제보다 훨씬 정의롭기 때문이다.전용덕 대구대 명예교수(경제학)

2019-12-03 18:18 전용덕 대구대 명예교수(경제학)

[시장경제칼럼] 홍콩 시위

김영용 전남대학교 명예교수홍콩은 홍콩섬, 가우룽(九龍)반도, 신계(新界), 란타우섬과 200여개의 다른 작은 섬들로 구성된 중국의 특별행정자치구이다. 청나라의 아편수입 금지 조치로 1840년부터 1842년까지 2년에 걸쳐 영국과 청나라 간에 벌어진 제1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 1842년에 체결된 난징조약에 의거 홍콩섬이 영국에 할양(割讓)되었다. 이어서 1860년 애로우호 사건으로 알려진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뒤, 청나라는 가우룽 반도의 시가지를 영국에 추가로 할양하였으며(제1차 베이징조약), 1898년에는 영국이 신계를 99년 동안 조차(租借)하였는데(제2차 베이징조약), 신계의 조차 기간이 끝나자 영국은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전제로 1997년 7월 1일 할양 지역을 포함한 전 지역을 원래의 주인인 중국에 반환했다. 이제는 힘을 가진 나라가 된 중국의 압력과 신계가 없는 나머지 지역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는 영국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영국에 할양될 당시의 홍콩은 중국의 현지(縣誌)에도 기록되지 않을 만큼 보잘 것 없는 어촌이었으며, 그 부근은 해적들의 소굴이었다고 한다. 홍콩의 육지 면적은 1,106 km2으로서 중국의 9,300분의 1에 불과한 도시이다. 2018년 현재 인구는 749만 명이며 GDP는 U$3,630억(경상 가격)으로서 195 국가 중 37위다. 1인당 GDP는 U$48,450(경상 가격)으로서 한국의 1.45배, 중국의 5배, 미국의 0.77배에 이르는 매우 높은 수준이다. 또 홍콩의 수출입 규모는 국제무역항답게 GDP의 380%에 달한다. 국제무역으로 성장한 경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의 79%와 일본의 37%에 비교하면 홍콩의 교역 규모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홍콩은 자유무역과 국제금융센터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일본과 싱가포르 다음으로 풍요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부존자원이라고는 화강암 박토와 바다밖에 가진 것이 없는 홍콩이 이렇게 놀랄 만한 경제적 부를 이룩하게 된 바탕에는 자유 시장경제가 있다. 홍콩이 사회주의 노선의 중국 통치하에 있었다면 오늘의 경제적 성과를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밀튼 프리드만(Friedman)은 그의 에세이집 『선택의 자유』에서 시장경제의 눈부신 성과의 사례로서 홍콩을 곧잘 예로 들곤 했다. 개인들의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는 시장경제 체제가 홍콩의 번영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이는 곧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경제 체제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그런 홍콩이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한 홍콩 청년이 대만 여성과 함께 여행하던 중 여성을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주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홍콩 정부가 추진한 ‘범죄인 인도법’ 제정을 둘러싸고 터진 홍콩 시민과 홍콩 및 중국 정부 간 대립이다. 홍콩 정부는 중국을 포함해 대만과 마카오 등,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사안별로 범죄인들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입법을 추진했으며, 범죄인 인도 여부는 홍콩이 사안별로 중국 본토와 개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홍콩 정부가 9월 4일 입법 추진을 공식 철회했으나 시위는 계속되고 있으며, 11/23일의 지방의원 선거 결과에 따라 시위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어떤 나라(A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다른 나라(B국)로 도주한 범인을 B국이 A국으로 인도하는 것 자체는 문제 삼을 것이 없다. 그러나 홍콩 시민들은 법이 제정되면 형사 용의자는 물론, 정치범, 특히 홍콩 민주화를 주도하는 인사들의 중국 인도가 가능하게 되어 일국양제 체제는 물론, 개인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여 법 제정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즉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중국 공산당이 요구하는 질서를 거부하고 홍콩이 예전에 누려왔던 개인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것이다. 반면에 중국 정부로서는 사실상의 홍콩 독립이 이뤄지면 신장 위구르나 티베트와 같은 다른 자치구의 요구가 이어질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홍콩 시위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개인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개인이라는 사실이다. 또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유린하고자 할 때에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러한 국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최근 한국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과연 누구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키려는 것인지가 모호하기 그지없는 현 정권의 대북 정책, 무소불위의 강제력을 휘두를 수 있는 리바이어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끝없이 커지는 정부 예산, 근로 시간 제한, 주택 분양가 상한제, 특정 개인이나 일부 집단이 내세우는 ‘공정’사회 등은 모두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들이다. 이는 바로 국민을 위해 만들어진 국가가 국민의 최대 위협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공의(公義)가 아닌 국가의 강제로부터 개인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키는 일은 남이 아닌 바로 자신들이 해야 한다는 점을 최근의 홍콩 시위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깨어나 문제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지킬 수 없다.김영용(전남대학교 명예교수, 경제학)

2019-11-25 12:51 김영용 전남대학교 명예교수

[시장경제칼럼] 18세기 프랑스가 한국경제에 주는 시사점

안재욱(경희대 교수, 경제학)17세기 후반과 18세기 내내 프랑스는 심각한 경제 문제와 재정 문제에 시달렸다. 많은 국민들이 식료품 부족에 시달렸고, 국가는 끊임없이 파산 일보직전에 내몰렸다. 루이14세 때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콜베르의 중상주의 정책과 루이14세 및 그 후계자들의 방만한 재정 지출 탓이었다. 콜베르는 수출이 수입보다 많은 것이 국가에 유리하다는 토마스 먼(Mun)의 ‘무역차액설’을 믿고 수출은 늘리고 수입을 줄이고자 했다. 이를 위해 무역을 비롯한 여러 부문에 대해 세세하게 규제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의 자급자족을 달성하고 국가의 부를 축적하고자 했다. 그러나 콜베르의 정책은 프랑스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루이14세에 이어 루이15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나이 5세였다. 어린 루이15세를 대신해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가 섭정을 했다. 당시 프랑스는 루이14세의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국가가 파산위기에 처해 있었다. 오를레앙 공은 경제와 재정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하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존 로를 영입했다.존 로는 경제와 재정 문제를 통화 부족으로 봤다. 그래서 그는 방크제너랄을 설립했다가 방크로얄로 국유화해 기존의 금화를 배제시키고 불환지폐인 방크로얄의 은행권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인도회사(Compagnie des Indes)를 설립해 정부 채권을 인수하는 대가로 미시시피 지역에서의 배타적인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정부 채권을 회수하기 위해 이 회사의 주식을 발행하며, 방크로얄을 통해 투자자들에게 인도회사의 주식매입 대금을 대출해주는 편의를 제공했다. 인도회사의 신주 발행 때마다 은행권 발행 한도를 늘렸다. 이런 은행권 남발로 인도회사의 주식가격이 폭등했다가 폭락했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미시시피 버블’이다. 은행권의 남발로 인한 결과는 인플레이션이었고 경제 파탄이었다.루이14세의 경제정책에 대한 초기 비판가들 중의 한 명이 피에르 드 부아길베르(Boisguilbert)였다. 그는 국가는 안전과 정의를 확립하는 역할만 하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는 것(laissez faire la nature)이 국가경제에 이롭다는 주장을 했다. 반세기 후 루이15세 때 부아길베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중농주의자 케네(Quesnay)는 통치자의 생각을 바꿔 놓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했다.루이16세가 왕위에 오른 1774년 튀르고(Turgot)가 재무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중농주의자의 그룹에 속해 있지는 않았지만 경제정책에 관련해 중농주의자들의 불간섭주의(laissez faire)를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불간섭주의(laissez faire)에 입각해 개혁에 착수했다. 수년 간 괴롭혀 온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곡물 교역을 자유화하고, 많은 산업에 대해 진입을 제한했던 길드를 폐지했다. 강제노동으로 해오던 도로건설을 지주들에 대한 과세를 통해 그 건설비용을 조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수많은 기득권과 충돌했다. 그 반대자들이 루이16세를 움직여 그를 실각시킴에 따라 그의 개혁도 자연스럽게 폐기되었다. 튀르고 실패 이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만일 튀르고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산업혁명이 프랑스에서 먼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17세기와 18세기 프랑스의 역사는 구조개혁을 하지 않은 채 통화 발행을 통해 경제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는 프랑스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20세기에 영국과 독일에서도 일어났다. 오늘날 경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가 대표적인 국가들이다.한국경제가 지속적으로 추락하고 있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1%대에 불과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폐업하는 자영업자가 속출하고 일자리를 잃어 실업급여로 생계를 잇는 사람이 대폭 증가했다. 설비투자가 줄고, 이자비용도 내지 못하는 한계기업들이 늘어나는 등, 기업의 경제활동이 극도로 위축되고 있으며 해외로 빠져 나가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민간경제의 활동을 가로막고 있는 제도개혁은 하지 않은 채 돈을 풀고 재정 투입에만 집착하고 있다. 기준금리를 연 1.25%로 0.25%포인트 인하한 것은 물론이고, 제로금리 이야기까지 흘리고 있다. 올해 470조원 규모의 슈퍼예산에 이어 내년에 사상 처음으로 513조 5천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편성하면서 정부의 지출을 더욱 늘리겠다고 한다.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돈을 푸는 것이 아니다. 기업에 대한 규제와 간섭을 줄이고 노동시장 개혁을 비롯한 구조개혁을 단행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경제는 과거 여러 국가들이 경험한 경제 파탄을 겪을 것이다.안재욱(경희대 교수, 경제학)

2019-11-18 17:49 안재욱(경희대 교수, 경제학)

[시장경제칼럼] 뷰캐넌의 헌법경제학이 주는 교훈을 찾으려면

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한글로 번역된 합의의 계산 (1962)만을 가지고는 뷰캐넌의 사회철학을 제대로 알 수 없다. 한글판으로 번역되지 않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권의 책만이라도 더 읽어야 한다. 하나는 Limits of Liberty between Anarchy and Leviathan(1975)이다. 이 책은 존 롤스의 정의론(1971), 노직의 아나키,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1974)와 함께 1970년대 세계 지성계의 최고의 학문적 업적으로 꼽는다. 반드시 읽어야 할 다른 하나는 Freedom in Constitutional Contract(1977)다. 한국에서 뷰캐넌에 관한 논의는 1962년 합의의 계산에 그치고 있다.(민경국·김행범 교수는 예외).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뷰캐넌이 훌륭한 아이디어를 유산으로 우리에게 남겨놨지만 서고에서 외로이 잠자고 있다. 그의 사상을 깨워서 한국사회가 당면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사점을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흥미로운 것은 헌법정치경제학이라고 말할 만큼 뷰캐넌이 헌법을 중시한 이유다. 현대 사회에 대한 진단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예를 들면 미국은 복지국가 실현을 위해 50%를 상회하는 국민소득 대비 정부지출, 무역·금융·노동부문 등, 모든 분야에서 첩첩히 쌓여가는 정부규제를 특징으로 하는 거대국가, 즉 리바이어던이었다.뷰캐넌에 의하면 현대사회의 제도들은 어느 누구도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의미에서 비효율적인, 동시에 자유를 억압한다고 한다. 그래서 사회계약을 통해서 미국사회를 제설계해야 한다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헌법계약은 만장일치를 의미한다. 이런 인식에서 뷰캐넌은 두 단계의 헌법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첫 번째 헌법계약은 개인의 행동을 제한하는 행동규칙, 소유권 재분배 규칙, 그리고 보호국가의 집행을 위한 규칙을 계약적으로 체결하는 과정이다. 계약의 결과는 사법사회(private law society)로서 비정치적 헌법이다. 이를 다룬 게 뷰캐넌의 1975년 저서다.헌법계약의 두 번째 단계는 정치적 헌법이 결정되는 단계다. 공공재생산을 위한 생산국가(공법사회: public law society)다. 이는 흔히 법학에서 말하는 국가헌법이다. 생산국가는 대의민주제다. 생산국가에서 적용할 표결원칙(단순다수 또는 가중다수 등)을 계약을 통해서 합의한다. 생산국가와 관련된 다양한 표결원칙은 1962년 저서에서 논의되고 있다. 생산국가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공공선택론(theory of public choice)이 아니던가!생산국가와 관련된 뷰캐넌의 계약론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보호국가가 생산국가보다 먼저 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산국가는 보호국가를 통해서 억제되어야 할 대상이다. 개인의 재산권과 사법(private law)은 대표의회에서 정할 수 없다. 대표의회는 오로지 공공재의 생산과 관련된 과제만을 담당한다.뷰캐넌의 세계에서 재산권과 사법은 공공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시민들 전체가 참여하는 계약의 대상이다. 뷰캐넌이 두려워 한 것은 생산국가의 과제만을 담당할 대의민주가 자신의 고유한 과제를 넘어서 사법사회로 침범하는 경우다. 이 침범은 정부실패 또는 정치실패가 아니라 헌법실패라는 것이 뷰캐넌의 인식이다.뷰캐넌은 민주주의를 적절히 제한하는 헌법장치가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가중다수 등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해관계의 정치가 아닌 원칙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원칙을 헌법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뷰캐넌이 든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의 예를 들면, 차별입법을 금지하는 법의 지배 원칙을 헌법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득주도성장을 위한 최소임금 강제인상, 노동시간 강제단축, 비정규직의 강제적 정규직화 등은 특정한 계층을 위한 정책이 이라는 이유에서 원칙이 아닌 이익을 위한 정치다. 보조금, 인허가 등도 한통속이다. 차별 입법은 법을 지대추구, 정실주의를 위한 수단이다.균형예산원칙도 의회의 권력을 제한하는 장치로서 헌법의 중요한 대상이다. 케인스의 장막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는 적자예산 성향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적자 속의 민주주의라는 뷰캐넌의 유명한 말이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이다. 누진세 대신에 비례세제도를 헌법에 도입하여 정부의 조세 권력을 제한하고자 했다 그는 통화헌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통화공급의 준칙주의를 헌법에 도입하여 통화당국의 재량적인 통화정책을 억제하고자 했다.이런 간단한 설명에서 우리가 확인할 것은 뷰캐넌에게 다수결이든 가중다수결이든 의회의 정치적 표결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회가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의회권력을 제한하는 장치를 헌법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뷰캐넌의 헌법경제학적 사상은 헌법계약을 통한 자유(1977,) Power to Tax(1980), 이해관계의 정치가 아닌 원칙의 정치(1994)에서 읽을 수 있다.뷰캐넌의 의도가 한국헌법에 주는 시사점은 대단히 크다. 그의 헌정 사상에 비추어보면 한국 헌법은 국가권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헌법적 장치가 부실하다. 오늘날 급진좌파의 정책을 막아내어 사적영역을 보호하지 못하는 이유다. 정치적으로 다루지 못할 문제가 거의 없다. 누가 어떤 권력을 가져야 하는가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 즉, 권력구조 문제와 표결문제에 집착한 헌법이다. 뷰캐넌의 사상은 하이에크와 대결하기에 충분한 패러다임을 개발한 인물이다. 그는 단편적으로 다루기에는 매우 아까운 인물이다. 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2019-11-11 09:01 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시장경제 칼럼] 왜 가중 다수결인가?

황수연 전 경성대 교수날로 심해지는 복지 국가화 경향에 대한 우려가 높다. 정부의 경제 개입으로 경제가 추락하고 있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포퓰리즘의 극성에 대해 정부를 향한 비난이 거세다.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이런 추세는 중단은커녕 늦추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영원히 계속될 정치적 역사일지도 모른다. 수사(修辭)로 큰 시장·작은 정부를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정치인도 이익 집단도 유권자도 진정으로 그 대의에 따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시장 경제 교육과 자유주의 사상 전파를 열심히 한다 해도 사정이 크게 바꿔질 것 같지 않다.시장 자유주의자로서 나름 이 점을 오랫동안 생각해 온 필자의 견해로는, 그런 반(反)자유 시장적 추세는 헌법에 가중 다수결을 규정하지 않는 한, 억제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부가 지금처럼 무슨 일이든 다수결로 처리해서 수행할 수 있는 한, 이런 폐단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시장 경제 교육을 잘 시킨다? 교육을 잘 시켜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시장 경제 교육이 헌법에 가중 다수결을 넣도록 자극해야만 시장 경제 교육이 진정한 효과를 볼 것이다. 시장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훌륭한 지도자를 뽑는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의 재임 기간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진정한 해답은 헌법에 정부가 수입, 지출 활동에 대해 가중 다수결을 얻게끔 요구하는 것이다.그런데 이런 주장을 많은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다수결(과반수결)이라는 생각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이다. 결정을 가중 다수결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면 반론이 즉각 나온다. 가중 다수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인데, 이것은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공부를 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볼 수 있다. 가중 다수결의 의의를 그만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되고 과반수결에 대한 미신의 정도가 아주 심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의사 결정 규칙들에 관해 누구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기실 대부분이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올해는 제임스 뷰캐넌 탄생 100주년이다. 뷰캐넌은 고든 털럭과 함께 가중 다수결이 바람직하다는 점을 역설한 책 ≪국민 합의의 분석≫을 썼다. 그 책은 공공선택론의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정작 정치학, 경제학, 그리고 철학의 다른 지도적인 학자들은 가중 다수결에 관한 논의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만큼 다른 학자들이 가중 다수결의 의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오늘날 갈수록 심해지는 전 세계적인 복지 국가화 및 경제적 개입주의의 경향을 보면서 필자는 그 두 학자가 얼마나 뛰어난 혜안을 가지고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다른 한 편, 자기들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자들과 일반인들에 대해 그들이 얼마나 실망하고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애덤 스미스 이후, 루트비히 폰 미제스도, 아인 랜드도, 밀턴 프리드먼도, 제임스 뷰캐넌과 고든 털럭도 정부의 역할에 관해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정부는 꼭 자기가 해야 할 일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시장과 개인에게 맡겨야 한다. 정부가 할 일이란 국방, 치안, 사법, 그리고 국민들(시민들)이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는 것이다. 국방, 치안, 그리고 사법도 국민들이 정부의 기능으로 만장일치 합의하는 것들이므로, 결국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란 국민들이 만장일치로 정부가 해야 한다고 합의를 보는 일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이것들만 정부가 하고 합의를 볼 수 없는, 사람들끼리의 선호가 다른, 나머지 문제들은 개인과 민간 시장에 넘겨서 처리해야 한다. 빨강색 자동차를 타고 싶은 사람들은 빨강색 자동차를 타고 검정색 자동차를 타고 싶은 사람들은 검정색 자동차를 타도록 자동차의 생산과 판매는 시장에 맡겨야 한다. 재산권을 보호하는 일은 잠재적인 도둑도 동의하면서 만장일치 합의를 얻는 일이므로, 이런 일은, 그리고 이런 일만, 정부가 해야 한다. 아인 랜드가 한 마디로 요약했듯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국방, 치안, 사법, 그리고 국민들이 합의를 보는 것들이다.정부가 국민들의 만장일치 합의를 보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할 때, 결과에 초점을 두면 국민들이 만장일치 합의를 볼 수 있는 일들이 좀처럼 없다. 손해 보는 사람들은 반대할 것이고 이익 보는 사람들은 찬성할 것이기 때문에, 만장일치 합의가 쉽게 나올 수 없다. 그러나 결과를 가져오는 절차에 초점을 두면 만장일치 합의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절차는 다른 말로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국민들은 결과에 만장일치 합의를 볼 수 없을지라도 규칙에 대해서는 만장일치 합의를 볼 수 있다.규칙들은 단계를 이루고 있다. 대통령을 유권자의 과반수로 선출한다는 규칙, 정부의 지출 프로그램에 국회의원 2/3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규칙, 그리고 최저 임금제의 실시에 국회의원 3/4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규칙을 담은 규칙(헌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정부의 지출 프로그램에 대해 만장일치를 사용하면 소수파가 피해(외부 비용)를 입지 않아서 좋다. 그러나 만장일치를 사용하면 꼭 필요한 정부 지출 프로그램의 채택을 막게 되는 비용(의사 결정 비용)이 커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두 비용을 고려하여 만장일치에서 벗어난 2/3결을 규칙으로 채택한다. 두 비용을 고려하여, 대통령 선출에 대해서는 과반수결을, 최저 임금제에 대해서는 3/4결을 채택한다. 이와 같이 사안에 따라 다른 의사 결정 규칙을 사용하지만, 그것들을 담은 헌법(상위의 규칙)은 만장일치 찬성을 얻는다. 다시 말해, 어떤 문제에 대해 그 규칙이 만장일치 규칙이어야 할 필요는 없고 과반수 규칙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문제에 과반수 규칙을 사용하기로 하는 규칙(헌법)에는 만장일치 합의가 있어야 한다.이와 같이 어떤 문제에 대해 외부 비용과 의사 결정 비용을 고려해서 적정한 규칙을 사용해야 하는데, 많은 경우 2/3결과 같은 가중 다수결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과반수결을 사용하면 국가에 돌아가는 편익이 사업 수행에 드는 비용의 반밖에 되지 않는 것도 통과될 수 있다. 2/3결을 사용하면 편익이 비용의 2/3밖에 되지 않는 것도 통과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비효율적인 사업이 통과되는 것을 막으려면 만장일치 규칙을 사용해야겠지만, 만장일치를 사용하면 지나치게 의사 결정 비용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만장일치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비상사태 등 처리가 긴급한 경우나 국민들의 선호들이 대칭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많은 경우 의사 결정 비용보다 외부 비용이 더 문제가 되므로, 만장일치에서 조금만 내려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요컨대, 가중 다수결이 많은 문제들에 적합하다.다시 원래의 문제로 돌아가서, 기라성 같은 시장 자유주의자들이 정부의 역할을 잘 밝히고 있음에도 어째서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세계 각국의 국민들이 복지 국가화와 정부 개입주의로부터 고통을 겪고 있는가? 왜 전임 후임 정부 가릴 것 없이 정부들이 복지 지출을 경쟁적으로 늘리고 있는가? 왜 전임 후임 정부 가릴 것 없이 최저 임금을 올리고 기업 활동을 규제하며 친노동 정책들을 전개하고 있는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심지어 그렇게 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식견 있는 온갖 사람들이 역설하고 있는데도, 왜 이런 추세는 수그러들지 않는가? 그 이유는 정부의 의사 결정들이 거의 항상 단순 과반수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견고한 처방은 가중 다수결을 사용하도록 헌법에 규정하는 것이다.좌우 가릴 것 없이, 정부 개입주의의 폐해를 모르는 국민들이 많지만, 좌파들이 우파들보다 더 정부 개입주의의 폐해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좌우 가릴 것 없이 정부 개입으로부터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민노총과 전교조의 예에서 보듯, 좌파들이 우파들보다 정부를 상대로 한 이익 추구가 더 심할 것이다. 정부 개입의 폐해를 모르는 사람들은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이 경제의 발전을 가져 오고 국민의 삶을 더 낫게 한다고 진정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면 모두의 경제생활이 향상되는 것보다 국민들 사이의 격차가 줄어드는 것이, 설사 그 결과 개개 국민의 상태가 더 나빠진다 할지라도, 더 낫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반면 정부 개입주의의 폐해를 아는 사람들도 자기의 이익 때문에 여전히 정부 개입주의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할지 모른다. 나쁜 정책이고 모두를 망하게 하는 정책이지만, 현 체제에서 내가 점잖게 그 정책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달라지는 바도 없고 나만 손해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공유지의 비극 또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 처해 있는 각자는 결과가 어떻게 되건 상관없이 나의 것부터 챙기고 보는 것이다.이런 두 가지 이유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온갖 경제 악화, 부조리, 폐단, 후유증이 생긴다. 또한 이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처방을 제시하고 그 실시를 역설한다. 처방들의 표현들은 갖가지이지만, 같은 내용이다. 기업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게 하고, 시장의 자율을 높이며, 정부의 크기와 기능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에 이를 위한 제도적 요건들도 갖춰져 있다. 정부의 삼권을 분립시키고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를 따로 두며 시장의 자율을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어떤 것을 시장에서 처리하고 어떤 것을 정부에서 처리할 것인지가 모호하고,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국민들마다 서로 견해가 달라, 정부 개입주의자들에게 정부 개입의 빌미를 제공한다. 그렇다고 정부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일일이 헌법에 명시적으로 규정해 놓기도 어렵다. 이런 연유로 헌법에 가중 다수결을 규정할 필요성이 대두된다.반복하자면, 복지 국가화와 정부 개입주의의 폐해를 정말 막으려면, 헌법에 가중 다수결을 도입하여야 한다.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실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EU 헌법에서 가중 다수결 도입의 노력이 있었다. 제임스 고트니 등이 쓴 ≪상식의 경제학≫에서는 가중 다수결을 도입해서 정부 활동을 억제하기 위한 헌법 개정 시안을 제시하고 있다. 가중 다수결의 도입이 어려우면 가중 다수결의 효과를 가지는 양원제도 도움이 될 것이다. 설사 양원 각각에서 과반수결로 처리한다 하더라도 그 복합 효과로서 단원제의 가중 다수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가중 다수결을 헌법에 넣는 데 이해(利害) 문제는 크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이 정부 행동의 결과에서 상대적으로 더 먼 절차에 관한 규정이어서 국민들의 거부감이 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련 교육에 대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그 제도가 헌법에 도입될 수 있을 것 같다. 가중 다수결의 의미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理解)가 부족하기 때문이다.황수연(전 경성대 교수, 행정학)

2019-11-04 11:15 황수연 전 경성대 교수

[시장경제칼럼] 공수처 설치를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

김인영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과)공수처 논란과 국민 분열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관련 논란이 뜨겁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검찰 개혁’이라는 이유를 들어 공수처 설치에 찬성하고 있고, 자유한국당은 ‘정권의 보위부’가 될 것이라고 반대하고 있다.‘조국 사태’로 나라가 둘로 갈리더니, 공수처 설치 때문에 국민이 또 둘로 나뉘었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적폐 청산’, ‘탈원전’으로 국민을 둘로 나누더니, 곧 이어서 대북관계, 한일 갈등으로 국민을 둘로 쪼갰고, 이제는 선거법 개정, 공수처 설치 문제로 국민을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있다. 사회통합을 외치며 정당 명칭까지 ‘더불어’ 민주당으로 지었음에도 실은 자신들의 진영의 통합만 생각했지 진영 밖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보인다. 정치적 상대방을 적(enemy)이 아니라 경쟁자(rival)로 생각하고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민주 정치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386세대’(현재는 586세대)에게는 경쟁자조차 ‘독재 타도’식 ‘전멸시켜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공수처 설치와 우려되는 것들이 글은 공수처 설치는 ‘검찰 개혁’과 동의어가 아닌 전혀 다른 사안이며, 공수처가 ‘권력에 대한 견제’라는 헌법적 가치에 어긋나는 반자유민주주의적 기관이 될 수 있는 상황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공수처 설치를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첫째, 정부와 여당이 주장하는 ‘검찰 개혁’을 위해 ‘공수처 설치’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검찰 개혁’은 한마디로 ‘검찰 힘빼기’이고, ‘공수처 설치’는 ‘고위공직자들의 부패를 전담하는 기관’을 만드는 서로 다른 사안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검찰 개혁’의 핵심은 ‘검찰의 중립성 확보’와 ‘검찰권의 남용 방지’이다. 그런데 공수처를 설치한다고 검찰의 중립성이 확보되고, 검찰권 남용이 방지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이러한 가정은 황당하기까지 하다.더욱이 검찰로부터 고위공직자 관련 수사를 빼면 검찰의 힘을 뺄 수 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더불어민주당이 제출한 공수처법에는 권력을 좌우하는 대통령, 대통령 비서실, 국회의원 등 실세 최고 권력자들에 대한 기소가 모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실세 최고 권력자들에 대한 기소를 검찰만 할 수 있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검찰 힘빼기’가 아니다. 기소란 수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검찰의 수사와 기소권은 그대로일 것임이 분명하다. 또 검찰의 수사를 믿을 수 없으니 공수처를 설치하여 수사를 맡기자는 것은 ‘검찰 개혁’ 논지의 훼손이다. 검찰 수사를 불신하게 만든 것은 정치권의 외압일진데 공수처를 만들어도 대통령과 여당으로부터 외압이 바로 올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에서 공수처로 수사와 기소를 옮겨도 외압이 그대로라면 공수처 설치의 이유는 사라지게 된다. 외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특검 제도가 더 나을 수 있다.개혁의 핵심이 검찰에 대한 외압임은 지난 7월 25일 있었던 윤석열 검찰총장 임명장 수여식에서도 나타난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윤 총장님”이라 부르며 “권력형 비리에 대해서 정말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권력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자세로 엄정하게 처리해서 국민들 희망을 받으셨는데, 그런 자세를 앞으로도 계속해서 끝까지 지켜 달라.”고 했다. 윤석열 검찰총장 임명장 수여식까지만 해도 외압을 이겨내고 공정하게 처리해 달라는 주문을 했고, 공수처 신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관철해야 할 사안이 아니었다.그런데 갑자기 ‘공수처 신설’이 여당과 정부의 시급한 관철 사안이 된 것은 ‘조국 전 장관 및 가족 관련 수사’가 브레이크 없이 지속된 이후이다. 정권의 말을 듣지 않는 검찰로부터 중요 사건에 대한 수사권과 기소권을 빼앗아 대통령 및 집권당의 영향권 내에 둘 필요가 새로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공수처 설치에 현 정권의 권력 유지라는 불순한 동기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합리적 의심을 갖게 된다.제왕적 대통령에게 또 하나의 감찰기관을 주자는 것둘째, 공수처 신설은 간접적이지만 대통령에게 공직자 ‘범죄’ 수사 및 기소의 권한까지 주는 것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시켜 현재의 ‘제왕적 대통령’을 ‘황제 대통령’ 또는 ‘히틀러급 총통’으로 만드는 행위다. 따라서 공수처 설치는 자유민주주의를 역행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 되어 있다.현행 헌법에서는 대통령이 대법원장 임명권으로 사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검찰총장과 경찰청장의 임명권으로 검찰과 경찰을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현행 헌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통령의 권한을 지나치게 크게 보장하여 ‘제왕적 대통령’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고, 이는 학계의 일치된 의견이다. 그런데 그런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에게 또 하나의 거대한 권력 기관을 쥐어주는 것은 민주주의를 거꾸로 역행시키는 일이라는 의미다.이런 비판에 대해 ‘공수처장 추천위원회’가 국회에 있으니 대통령이 공수처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법안에 숨어 있는 ‘디테일의 악마’를 외면한 것이다. 법안으로만 보면 공수처 관련 더불어민주당안(백혜련 법률안)과 바른미래당의 권은희안 모두에 “수사처는 그 권한에 속하는 직무를 독립하여 수행한다”(제3조 #9462;항)고 되어 있다.하지만 핵심은 공수처장의 임명권을 대통령이 가진다는 조항이다. 민주당안에 따르면 공수처장 임명을 ‘추천위원회가 2명 후보자 추천, 그 중 1명을 대통령이 지명한 후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공수처장 추천위원회’는 7명으로 구성되어 ‘법무부장관, 법원행정처장, 대한변협회장, 대통령이 소속되었던 정당 교섭단체 추천 2명, 그 외 교섭단체 추천 2명’으로 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대통령의 영향권 내에 있는 인사가 법무부장관, 법원행정처장, 대통령 소속당 추천 2인이다. 7인 가운데 적어도 4인이 대통령측 인사라면 결국 공수처장은 대통령의 임명이라고 해야 옳다. 반면 권은희안은 ‘추천위원회가 2명 후보자 추천, 그 중 1명을 대통령이 지명한 후 인사청문회를 거쳐 국회 동의 필요’로 되어 있어 국회의 동의가 추가적으로 필요하지만 국무총리 임명과 같이 대통령과 여당의 의사대로 임명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때문에 공수처장은 대통령의 임명이다. ‘공수처장 추천위원회’가 국회에 있더라도 대통령의 인사권 내에 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수처는 오직 대통령만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의 권한이 비대하여 자유민주주의의 진전을 방해하고 있는데 거기에 추가로 공수처라는 ‘친위 수사대’격의 기관까지 갖게 되는 것이다. 쉽게 자유민주주의 후퇴를 예상할 수 있다.영미법 체계에서 성공했다고 대륙법 체계에서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셋째, 외국에서 성공한 제도라고 한국에서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주장은 지극히 자의적 논리에 근거한다. 공직수사처의 현실적, 이론적 모델은 홍콩의 염정공서(ICAC, Independent Commission Against Corruption)와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CPIB, 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 중국의 국가감찰위원회다. 이들 기구의 특징은 모두 ‘반부패(Anti-corruption) 기구’라는 점이다.하지만 부패의 원인은 정부권력의 비대화, 부패에 대한 국민의 의식, 지나치게 과대한 규제 등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부패 사정 기구를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부패가 감소하지도 근절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부패는 정부 규제를 피해가고자 하는 기업과 국민의 의식과 행동 때문이므로 ‘규제 철폐’가 부패를 감소시키는 가장 좋은 방식으로 학술적으로 규명되어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선거 당시 제기했던 ‘반부패 기구’로서 공수처 설치의 본래 목적은 슬그머니 버리고 ‘검찰 개혁’으로 초점을 바꾸어 버렸다.‘반부패 기구’이기에 더불어민주당의 백혜련안의 명칭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이고 권은희안은 ‘고위공직자부패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안’이다. 백혜련안은 ‘고위공직자 범죄’에 초점을, 권은희안은 ‘고위공직자 부패’에 초점을 두고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주된 수사대상이 된다. 즉, ‘고위공직자 범죄’ 수사라면 ‘범죄’를 무엇으로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남용의 가능성이 넓어지는 대신, ‘고위공직자 부패’로 규정하면 수사권 남용의 가능성은 줄어든다.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위공직자 부패’만을 따로 기구를 두어 수사하고 기소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법치(法治)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 ‘법 앞의 평등’을 의미하는데, 고위공직자라고 특별한 기구에 의해 특별하게 취급당하는 것은 ‘법 앞의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고 ‘법적 정의’에도 어긋난다. 고위공직자가 부패 등에 엄격한 자기 처신을 해야 한다는 것과 ‘법 앞의 평등’은 다른 이슈라는 것이다. 도리어 부패 감소를 위해서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감사원을 국회로 이전하여 감사원의 기능을 활성화하고 행정부와 권력기관이 국회의 감시를 받는 것이 권력분립이라는 헌법정신에 일치한다. 그렇게 되면 검찰의 고위공직자 수사 역할이 줄어들고 그와 함께 검찰의 권한도 약해질 것이라는 의견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더 나아가 공수처의 모델인 홍콩 염정공서와 싱가포르 탐오조사국이 나름의 성과를 내고 또 작동하는 이유는 영미법계 형사사법 제도 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려진 바대로 대륙법계로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하여 처벌하다는 법체계 속에서, 그리고 다양한 사정기관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부패 척결이라는 ‘공수처’의 본래 목적이 달성될 수 있을지 의심이다. 대륙법 체계에서 ‘공수처’의 존재로 기소권의 혼란만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사법부, 검찰, 경찰의 독립을 저해할 것넷째, 공수처는 제왕적 대통령의 추가적인 권한 강화라는 부정적 결과뿐만 아니라 사법부와 검찰, 경찰의 독립을 저해하고 또 군(軍)의 중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 고위공직자와 그 가족의 범죄를 수사하고, 판사·검사·경무관급 이상 경찰에 대해서 기소까지 할 수 있는 기관인데 설립 이후 이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 기구로 전락하여 결국에는 매우 위험한 권력 유지 기관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때문에 공수처를 대통령과 집권당의 ‘보위부’, ‘게쉬타포,’ 또는 중국 공산당의 국가감찰위원회와 같은 ‘친위 수사기관’이 될 것이라는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많은 평론가들의 예상은 수긍이 된다.공수처가 판사, 검사, 고위 경찰, 군 장성들에게 공포의 기관이 될 것임은 명확하다. 구체적으로 여당의 공수처법안의 명칭(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에 ‘공직자 범죄’가 들어 있는데 ‘범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대다수 판사와 검사가 공수처의 집중 수사 대상으로 될 수 있다. 청와대나 대법원으로 배달되는 판사와 검사의 비리에 대한 고발장과 진정, 수사 요구가 매년 수십만 건에 달하는데 판사와 검사에 대한 ‘직권 남용’ 투서가 쉽게 공수처에 비리 증거로 전환될 것이다. 그리고 ‘직권 남용’에 대한 수사 착수 여부는 공수처장의 몫이 되는데 그렇다면 결국 판사와 검사, 고위 경찰의 운명이 대통령의 손 안에 들어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공수처의 수사 개시로 사법부와 검찰의 독립은 쉽게 침해될 것이다.‘감찰 정치’로 가고자 하는가?그렇다면 공수처 설치를 통해 집권 여당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대통령과 여당이 사법부와 검찰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공포 정치’, ‘통제 정치’로 가겠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후반부 정국 운영을 공수처를 통한 ‘공안 통치’, ‘감찰 정치’로 끌고 가려는 것이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하다. 설사 더불어민주당이 2020년 4월 15일 치러질 21대 총선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설치된 공수처의 위력으로 문재인 정부 후반기 정국 운영에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정치적 중립을 지켜야할 군(軍)의 장성들 역시 공수처에 목이 매여 정치적 중립을 위반할 수 있음도 예상할 수 있다. 그 동안 군 수사 기관의 수사를 받던 군장성들도 공수처의 수사와 기소 대상에 포함되기 때문이다(백혜련안 제2조 ①항에 따르면 군 가운데 ‘장성급장교’를 수사대상으로 한다).공수처는 누가 감시하는가다섯째, ‘공수처는 누가 감시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는 시민의 자유 확보를 위해 권력 기관을 견제하는 장치의 마련이다. 입법, 행정, 사법으로 권력을 나누고 서로 견제시키는 제도는 시민의 자유 확보를 위해 존 로크(John Locke)가 고안하고 몽테스키외(Charles De Montesquieu)가 발전시킨 방안이었다.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원리가 국민의 자유 확보를 위한 ‘권력의 분산과 견제’임을 고려할 때 민주당이 만들겠다는 공수처는 검찰로부터 권력을 떼어내 대통령에게 주고 대통령의 권력을 한층 강화시키는 역할 이외의 기능을 찾기 힘들다. 결국 공수처 설치는 권력분립에 의한 상호견제라는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가치를 위협하고 파괴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공수처가 검찰·경찰로부터 수사를 이첩 받아 뭉갤 위험성여섯째, 공수처는 대통령 가족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하거나 수사를 회피하고 또는 뭉갤 수 있을 가능성이 검찰보다 훨씬 더 높다. 과거 검찰은 대통령 친인척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여 기소하고 감옥에 보냈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의 구속,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의 구속,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김홍업과 김홍걸의 구속,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의 구속 등 대통령 친인척의 구속과 감옥행, 이 모두를 이뤄낸 것은 검찰이었다.하지만 이러한 검찰 조직과 달리 대통령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공수처의 경우 대통령 배우자나 가족(백혜련안 제2조 ②항에 따르면 “‘가족’이란 배우자, 직계존비속을 말한다. 다만, 대통령의 경우에는 배우자와 4촌 이내의 친족을 말한다.”)에 대한 수사를 검찰이나 경찰로부터 ‘이첩’ 받아(백혜련안 제24조 ①항) 수사를 흐지부지 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검찰이나 경찰 등 수사기관이 수사하고 있는 사건을 빼앗아 올 수 있는 제어 장치 없는 공수처는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이 되어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더불어민주당과 일부 야당이 패스트트랙에 올린 안에 따르면 공수처장의 임기는 3년이고, 공수처 수사 검사의 임기는 6년이다. 검찰총장이 2년의 임기를 보장 받는 데 비하여,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수처장의 임기는 3년이다. 검찰총장보다 긴 공수처장의 임기 보장은 기소권 소지 국가기관에 대한 헌법정신에 어긋나고 위헌 소지도 보인다. 매우 위험한 기관의 신설이다.‘견제와 균형’이라는 자유민주적 헌법질서에 어긋남요약하면 공수처의 설치는 궁극적으로 ‘견제와 균형’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기본 원리에 어긋나며, 법 앞에 만인 평등 원칙에 어긋나며, 대통령만을 위한 통제와 감시 기구로 전락하여 정권 유지의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공수처 설치는 ‘검찰 개혁’도 아니며, 견제 받지 않는 새로운 감찰 기구가 되어 자유민주주의 후퇴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1787년 헌법제정회의(Constitutional Convention)에서 “어떤 국가를 만들었느냐”는 한 여성의 질문에 “공화국이지요.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한에서만.”(“A Republic…. If you can keep it.”)이라고 답했다. ‘다른 사람’(them)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you)이 지켜야 하고 그것도 ‘지킬 수 있다면(if)’이라고 의심 가득한 부정적 가정의 답을 했다. 자유민주공화국을 갖기도 지키기도 쉽지 않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김인영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과)

2019-10-28 10:15 김인영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과)

[시장경제칼럼] 공수처법은 정치 사찰과 공무원 장악에 있다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법은 검찰과 분리된 별도의 특별 기구를 만들어 공직자의 직무와 관련된 위법사항을 수사하겠다는 것이다. 공수처법은 법원 판사와 검사는 물론 국회의원, 군 장성, 정보기관 등 모든 고위 공무원을 별도로 수사하고 기소하겠다는 것이다. 정부조직과 분리되어 수사 및 영장청구와 기소권을 갖는 특별기구라는 것인데, 도대체 ‘독립성’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인지가 관건이다.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지 않는 준사법기관이라면 그것은 곧 권력의 특명(特命)기관이 되는 것이다. 공무원에 대한 감찰기구이자 사정기관으로 갈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누구나 염원해왔듯, 검찰개혁의 본질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견제할 제도적 방안을 찾는 데 있다. 공무원과 관련된 모든 주요 범죄와 부정부패의 온상은 늘 권력과 그 주변에서 발생해왔지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검찰개혁이란 곧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검찰이 권력과 그 주변에서 펼쳐지는 범죄를 공정하게 법의 심판대 앞에 세울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권력과 관련된 부정부패를 수사한 용기 있는 검사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게 만드는 데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정부가 공수처를 설치하자는 취지를 보면 권력에 대한 견제는 없고, 반대로 권력의 뜻에 따라 좌우될 감찰기관을 만드는 데 맞춰져 있다.무엇보다 공수처는 전문성을 중심으로 운용돼야 할 공무원 조직의 정치적 중립을 유린하게 될 것이다. 공직자의 직권남용, 정치관여, 비밀누설, 직무유기 등을 보겠다는 것인데 하나같이 주관적이고 자의적이 것들이다. 예를 들면 공수처 설치에 찬성을 표하거나 찬성 집회에 참석하는 공무원은 그냥 넘어가자만, 공수처 설치에 반대하는 공직자는 정치관여와 직권남용 등으로 언제든지 희생시킬 수 있다.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대북정책을 반대하는 정보기관과 고위 군 인사는 사법처리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찬성하는 공무원은 수사하거나 기소하지 않는 공수처로 가게 될 것이 너무도 빤하다. 하나같이 직업 공무원 제도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것이고, 공무원을 권력의 도구이자 동원 대상으로 몰아가게 되어 있다.결국 공수처는 정치중립과 전문성의 잣대가 아니라 특정 권력이 지향하는 정치적 잣대에 의거하여 범죄의 경중과 유무죄 여부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검찰의 중립과 독립이 아닌 권력이 원하는 하명(下命)사항과 관심(關心)사항에 따라 사법적용의 기준을 달리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공수처는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정치사찰 기관이 되는 것이다. 소위 ‘적폐수사’때도 보았듯이, 직업 공무원제가 확립된 현재의 검찰조직에서도 권력이 주문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물불 안 가리는 가혹한 수사로 정치보복에 동원되며 국론분열의 원인이 되어왔다. 직업공무원제가 보장된 검찰도 승진과 보직을 위해 권력의 의도에 따라 수사와 기소권이 좌지우지되는데, 대통령이 임명하고 3년마다 재임용되어야 할 외부에서 온 검사들은 누구보다도 권력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이다.더 무서운 것은 공수처의 위상이다. 공수처는 헌법의 삼권 분립에 따른 정치권력에 대한 견제 제도를 무너뜨리며 사법부 및 의회와 군 조직 및 정보기관까지 장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공수처는 대법원장이나 검찰총장과 경찰청장, 국회의장과 국회의원 및 군참모총장과 정보기관장을 포함한 모든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다. 사법부의 대법관 및 판사와 및 국회의원으로부터 견제를 받아야할 대통령은 오히려 견제기관을 대상으로 특수 감찰조직을 가동시키는 격이다. 지금까지도 청와대는 경찰로 구성되는 특명반을 두고 운영했지만 이제는 수사와 기소권까지 갖춘 사법조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소신과 전문성은 팽개치고 국민만 보고 가야할 군 장성과 정보기관은 권력의 의도에 맞게 처신해야 하고, 판사들은 판결할 때 공수처 눈치를 봐야하고, 검사들은 수사와 기소를 할 때 권력과 공수처의 눈치를 봐야하는 나라로 가는 것이다.또한 공수처법은 중복되는 다른 수사기관의 범죄수사에 대해서 공수처가 이첩을 요청하면 각 수사기관은 강제적으로 따르도록 되어있다. 공수처는 모든 사법기관 위의 사법기관으로, 실제적으론 독재를 의미하는 ‘인민 감찰기관’이 되는 것이다. 검찰개혁을 명분으로 내걸었던 전 법무장관 조국은 본인 작성 논문에서 ‘인민의 규범’이 법을 대체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던 바 있다. 국가의 법과 ‘인민 규범’을 분리시키고 ‘인민’을 내세우는 것 자체가 좌파 내지 사회주의적 목적에 따라 법집행을 해나갈 별도 특수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법치의 확립이 아니라 ‘인민 수사’와 ‘인민 재판’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재적 사법기관을 지향하는 것이다.공수처장과 공수처 검사의 임용 방식도 후보추천위원회와 인사위원회를 둔다는 것이데 7명의 후보추천위원회나 인사위원회는 모두 대통령과 국회의장 및 다수당이 다수를 형성하도록 되어 있다. 문재인 정권이 구성하게 될 공수처도 소위 ‘민변’출신의 좌파 변호사로 구성될 것이 빤하다. 청와대 법무팀이나 법무부는 물론, 대검 감찰조직까지 소위 ‘우리법’과 ‘민변’세력이 장악해왔는데, 공수처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라는 것은 또다시 국민에게 바보가 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검찰개혁을 원하지 않는 국민은 없다. 누구나 알고 있듯, 그 방향은 권력으로부터의 검찰 독립에 있다. 검찰개혁의 엄격한 정치중립 유지와 권력의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독립성을 갖는 방향이여야지, 권력 하명기관이자 공무원을 장악할 도구로서의 사찰기관을 만드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공수처법은 폐기돼야 한다. 대신, 권력이 자의적으로 좌우할 수 없는 검찰 인사제도를 확립시킴으로써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성역 없이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당면한 검찰개혁의 과제이다.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2019-10-21 10:52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시장경제칼럼] 文대통령이 꿈꾸는 세상과 대한민국 국민들이 기대하는 세상

김우택 한림대 명예교수개천절 휴일 광화문 일대에서 “조국 감옥! 문재인 하야!”를 외친 국민들은 며칠 후 자신들의 외침은 간 데 없고, ‘모아진 국민의 뜻은 검찰 개혁’이라는 문대통령의 가짜뉴스 생성 전파에 분통이 터졌다. 그래서 반짝 추위에도 불구하고 한글날 다시 광화문으로 나가 ‘검찰 개혁은 가짜개혁!’ 이라는 피켓을 들었다. 이날 언론에는 문대통령의 지지율이 취임 후 최저인 32.4%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되었다. 국정 운영을 잘못하고 있다는 49.3%의 의견이 광화문 광장의 외침이 된 것임을 보여주는 조사이다.그간 문대통령은 조작된 통계로 사실을 왜곡하면서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검찰의 조국수사를 방해하면서 이를 ‘검찰개혁’으로 포장하려는 것도 예상 밖의 일은 아니다. 이제 그의 대통령 취임 후 2년 5개월간의 국정 운영의 행적과 언행에 기초해서 그의 정체성과 그가 만들려는 세상, 주류 교체를 통해 이루려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을 가늠해 보자.문 대통령 취임 후 의욕적으로 추진한 첫 번째 범주의 정책들은 그가 가장 중요한 과제로 생각한 대선 공약의 비전1 ‘부정부패 없는 대한민국’이라는 슬로건의 실천인 일련의 사법? 행정 조치들과 진행 중인 제도 개혁들이다. 국민들에게는 ‘적폐청산’으로 뇌리에 새겨진, 정적을 제거하고 무력화시키는 데 권력을 남용한 조치들; 적재적소 인사로 신뢰받는 공직사회 만든다며 행한 캠코더, 낙하산 인사; 경기규칙을 경기 상대방의 동의 없이 자기들끼리 바꾸겠다는 선거법개정안;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본원적 문제를 덮으려는 ‘가짜검찰개혁’과 공수처 신설안; 친위세력인 언론노조를 매개로 한 언론장악 등이다.이 범주의 조치들은 선출된 독재 정권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합법을 가장한 권력독점 수단들이다. 쿠데타에 의한 권력 장악에서와는 달리 체포 구금 등의 명백한 반민주적 행위들이 눈에 띠지 않기 때문에 이해 당사자, 언론인, 깨어있는 일부 지식인들을 제외하고는, 생업에 바쁜 일반인들은 독재로의 ‘레드라인’ 경고등을 보지 못했다.두 번째로는 경제 및 사회복지 관련 정책들을 보자. 대선공약의 비전2 ‘더불어 성장으로 함께하는 대한민국’, ‘일자리가 마련된 대한민국’을 만드는 정책들이라고 시행한 최저임금 인상, 법인세 인상, 근로시간 단축(주 52시간제), 지주회사 규제 강화, 탈 원자력발전, 대규모 SOC사업에 예비타당성 조사면제, 시장원리를 외면한 규제 일변도의 부동산 정책, 국민연금 동원한 대기업 핍박, 기득권 보호 위해 미래 산업의 싹 자르는 규제 남발 등이다. 시행 전부터 전문가들이 ‘나라 살림 거덜 내고, 경제기초 허무는 정책’이라고 비판한 정책들이다. 예견됐던 결과를 확인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소득불평등은 심화되고, 투자는 감소해 세계적 호황 속에서도 홀로 성장률이 뒷걸음질 쳐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나가는 상황이 되었다.그런데 문대통령은 “우리 경제의 기초 체력은 튼튼하다.”, “근본적 성장세는 건전하다.”, “경제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등 일관되게 현실을 외면한 발언을 해왔다. 이상하지 않은가? 후퇴하는 성장률을 보면서 건전하다든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국민들을 향해 하는 말에 국민들이 속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에 대통령의 발언 의도가 다른데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만 하다. 하나의 가설은 문대통령이 존경하는 신영복의 경제관에 영향을 받아 제로 성장이 더 바람직한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지 하는 추측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비해 이노베이션의 요인이 훨씬 적습니다. 그러나 저는 멀쩡한 기계, 기술, 자원을 효율이나 생산력의 입장에서 폐기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성장에 대한 어떤 환상, 이것이 바로 자본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유럽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성장을 안 하는 것이 좋다는 제로 성장론이 마음에 듭니다.”이런 신영복의 견해에 문대통령이 공감해서 소득주도성장 정책 때문에 경제가 후퇴해도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만족할 수는 있더라도, 일자리가 줄어들고 소득분배가 악화되는 것도 바른 방향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그래서 또 하나의 가설이 필요하다. 이는 저소득층이 일자리를 잃고 소득이 감소하더라도 정부가 복지수당으로 이를 보전해 주기만 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복지수당 수혜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좌파정권 연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라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어쩌다 머리에 떠오른 공상의 산물이 아니다. 독재 정권 연장에 유용한 수단임이 현실에서 입증된 가설이다. 그 사례가 베네수엘라이다. 마두로 정권이 반정부 시위에 시달릴 때마다 맞불시위로 이들을 막아낸 정부 지지자들이 다름 아닌 복지카드 소지자들이었다. 이미 노무현 정권 시절부터 차베스 혁명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현 집권세력이 이같이 유용한 수단을 간과했을 리가 없다고 상정하는 것이 합리적이 아닐까?세 번째로 안보 국방 외교 관련 정책을 보자. 남북분단이라는 한국 특유의 현실 때문에 이 분야의 핵심문제는 남북관계일 수밖에 없다. ‘강하고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약속하며 임기를 시작한 문대통령은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9.19평양공동선언에도 서명했지만, 2005년 비핵화합의 후 1년 만에 1차 핵실험을 감행한 북한과의 9.19평양공동선언은 그저 선언에 그칠 것으로 생각한 전문가들의 공동선언에 대한 비판은 그 부속 문서인 9.19남북군사분야합의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실제 실행될 합의문서인데 남한에게 매우 불리한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국민들이 느끼는 안보 불안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북핵 폐기의 가능성은 희박해지는 반면 북의 우리를 겨냥한 미사일 개발 속도는 가속화되고 있는데 우리 군은 국방의 의지가 있는지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간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해준 한미동맹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고 있지 않은가. 그 책임으로부터 문대통령은 자유로울 수 없다. 외국 언론으로부터 ‘김정은의 수석대변인’ 소리를 듣게끔 행동했으니까. 혹시 김정은도 “문대통령은 쓸모 있는 바보야(useful idiot)!“라며 파안대소하지 않았는지 누가 알겠는가? ‘국익 우선외교’를 약속했는데 어느 나라 국익인지 국민들이 헷갈리는 정도니까. 이는 대미, 대북 관계의 문제만이 아니다. 대 일본, 대 중국 외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외교의 실패 원인은 국제무대, 특히 4강+북한과의 관계에서, 다시 말해 6자 관계에서 우리 자신의 위치설정(positioning)을 잘못 했기 때문이다. 19세기말 조선의 실패 경험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이렇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17년 초부터 종북?좌파의 정신적 지주라는 백낙청 교수가 제기한 ‘이면헌법 폐기’주장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이면헌법이란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와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운용되면서 일종의 관습법이 된 국가 관행”을 지칭한다. 여기서 말하는 관행이 다름 아닌 반공과 반북이다. 그러니까 이면헌법 폐기주장은 반공 반북 의식이 남북관계 개선에 장애가 되니, 북한을 ‘반국가단체’ 또는 ‘주적’으로서보다 교류 협력 및 궁극적 재통합의 대상으로 보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국가보안법 폐지와도 바로 연결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제시한 이면헌법 폐기 방법이다. 남북 관계의 개선 발전을 통한 국민의식 변화, 즉 심리적 무장해제를 추진하라는 주문이다. 그런데 문대통령의 대북정책 뿐 아니라 공개 발언들도 백낙청 교수의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따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북한 노동당의 지령과 자금을 받아 활동한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 복역 중 전향서를 쓰고 출소한 후 사상전향을 부인하며 교수 생활을 한 신영복 존경발언, 6.25 전범에 해당하는 김원봉 서훈 논란, ‘빨갱이’ 단어 친일 잔재 발언 등이 그 예이다.지난 2년 5개월간의 문대통령의 정책수행 행적과 언행에 기초해서 그가 만들려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추론해 보았다. 그 결과는 해상도의 차이가 큰 두 부분의 그림이다. 그가 꿈꾸는 세상으로 가는 길의 윤곽은 비교적 뚜렷하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주류 교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고, 그가 염두에 둔 주류의 롤 모델은 신영복, 김원봉 등이라는 것과 주류교체의 방법은 그간 문정권의 인사 청문회 과정을 통해서 또 지금 조국 사태에서 경험하고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다. 하지만 목적지의 모습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에는 단서가 너무 부족하다. 성장이 멈춘 세상이라는 것, 삶의 거의 대부분을 정부가 통제할 것이라는 것 정도를 빼고는.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 세상이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 한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부합하는 세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대통령은 취임 선서에서 맹세한 대한민국 헌법을 수호할 의무를 저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가 꿈꾸는 세상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을 온 몸으로 막아야 한다.김우택(한림대 명예교수, 경제학))

2019-10-14 14:00 김우택 한림대 명예교수

[시장경제칼럼] ‘반일종족주의’가 불러온 기대와 좌절: 류석춘 교수의 사례

김이석 시장경제제도연구소장1. 베스트셀러가 된 ‘반일종족주의’ 지난 7월, 전에 없던 일이 벌어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치사회 부문 베스트셀러 1위가 과거처럼 좌파 서적이 아니라 이영훈 교수 등이 쓴 ‘반일종족주의’라는 논쟁적인 우파 서적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10위권 안에 ‘노예의 길’, ‘치명적 자만’ 등 대중적인 서적으로 보기 어려운 ‘자유주의’ 서적들까지 들어가 좌파 일변도 출판시장에 변화가 감지됐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우파 사상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대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갈등을 확대시키지 않으면서 한·일간 문제 등 현안들을 풀어가는 데도 힘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베스트셀러 ‘반일종족주의’가 출판될 무렵 징용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 대법원의 판결로 악화일로를 걷던 한일관계는 결국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파기로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많은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이로 인해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한미동맹까지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친일파라는 낙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본 식민지 지배 시절의 토지조사사업, 징용, 위안부 문제 등 민감한 주제들에 대해 사료(史料)에 근거해서 기성 통설을 논박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는 앞으로 사실 관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이에 입각해서 합리적으로 당면 문제를 풀어갈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2. 잘못된 기대그러나 그런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이 책의 저자들이 테러를 당하고 출판기념회에 참여했던 부산대 사회대학장인 이철순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김행범 행정학과 교수가 언론과 대학에서 공격을 당했다. 또 이 책을 교재로 강의하려던 연세대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의 강의가 중단됐을 뿐만 아니라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사실 강의 내용이나 이를 진행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과목의 수강을 취소하면 된다.이 강의에 있어 논쟁적인 위안부 문제가 강의 주제였고, 논란이 됐던 “학생이 해볼래요”라는 류 교수의 발언은 강의를 진행하는 방식에 해당한다. 류 교수는 이 발언이 “연구를 해보겠느냐.”는 의미였으며, 일부의 곡해처럼 “매춘을 해보겠느냐.”는 의미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가 해명을 했는데도 이미 강의는 취소됐으며 “사과하라.”고 강압하는 목소리는 계속되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강의의 진행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강을 취소하면 된다. 그 강의를 듣고 싶은 학생들도 있을 텐데 일방적으로 강의가 취소되고 검찰의 수사까지 받는다니.더구나 그가 강의실에서 발언한 내용도 기본적으로 ‘반일종족주의’의 연구들에 기초한 것인데도 좌파 언론들은 류 교수를 “근거 없이 위안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식으로 비판한다. 그런 비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일종족주의’의 내용에 대한 엄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런데 ‘반일종족주의’에 대한 학계의 학문적 비판과 이에 관한 열띤 토론은 보이지 않고 언론과 좌파 시민단체들의 저자들과 책의 내용에 동의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친일파’ 내지는 ’매국노’라는 낙인찍기만 요란하게 진행되고 있다.3. 정치인과 교수강제적인 강의의 중단과 검찰의 수사는 ‘학문’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심지어 소위 우파로 분류되는 정당이나 신문에서도 이에 대한 지적은 하지 않은 채, 류 교수가 부적절했다든가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등의 지적만 하고 있다. 아마도 류 교수가 사회정치적 활동을 많이 하는 영향력이 있는 교수이기 때문에 더 신중했어야 했다는 지적일 것이다. 그러나 강의실에 선 그는 ’진실’을 추구하는 지식인일 뿐, 여론을 고려해야 하는 정치인의 신분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그런 점에서 강의실 강의 내용을 녹음해서 이를 언론사에 보낸 행위 자체가 학자와 정치인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문제가 있지만, 이런 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도 매우 낮은 것 같다. 사실 대중의 설득을 통해 집권해서 특정한 이상을 실천하려는 정치가라면 현재 대중의 일반적 인식과 이들의 이해관계와 같은 여러 요소들을 잘 감안해서 원하는 변화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다.‘미시정치’라는 책에는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이 극한적 투쟁을 일삼는 석탄 노조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민영화 등의 성과를 냈는지를 다루는데 공공주택 입주자에게 소유할 기회를 주는 정책을 통해 공공주택의 민영화에 대한 극렬한 반대를 극복한 사례가 나온다. 이미 저렴한 공공임대료의 혜택을 받은 이들에게 소유할 기회를 주는 것이 ‘정의롭지 않다’는 반대가 있겠지만 정치가로서 그런 반대를 무릅쓴 전략을 썼다.그래서 미국의 자유주의 학자들도 ’론 폴’ 같은 자유주의 정치인의 행동에 대해 ‘학자’에게 요구하는 논리적 엄격성을 요구하지 않고 전략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정치인으로서의 제약을 이해하기 때문이다.그러나 강의실에서의 류석춘 교수는 정치인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에 대한 진실을 추구하는 학자다. 강의실의 그에게 정치인처럼 전략적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학문적 엄격성을 추구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자유로워야할 ’학문’의 시장에서 자신의 지적 양심(intellectual integrity)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슈에 대해, 비록 그것이 논쟁적이라고 하더라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했다고 지금 단죄를 받고 있다.4. 우리 사회의 ‘전체주의’ 경향: 토론문화도 없는데 아예 이견(異見)까지 통제?인간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할 수 있는지는 그 차제로 인간의 행복 추구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에 더해 그런 학문의 자유가 더 중요해지는 것은 학문의 자유를 추구할 때 엉터리 주장들이 걸러질 수 있다는 경험적, 결과론적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존의 통설과 다른 주장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시야를 넓히거나 잘못된 시각을 수정할 기회도 함께 사라진다. 그런 곳에서는 잘못된 천동설이 계속 옳은 지동설을 누르고 지배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탈(脫)원전 문제에서부터 위안부 문제에 이르기까지, 과학적 논의가 충분히 가능한 주제에 대해서도, 아예 이견(異見) 자체를 통제하려는 경향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그런 경향은 전체주의 국가일수록 더욱 강하기에 우리 사회가 전체주의화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김이석 시장경제제도연구소장

2019-10-07 13:23 김이석 시장경제제도연구소장

[시장경제칼럼] 다시 찾아본 ‘사회주의 계산 논쟁’

복거일(소설가)1919년 노이라트(Otto Neurath)는 ‘전쟁경제를 통해서 현물경제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1919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러시아의 경제 체제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때였다. 노이라트의 주장에 대해 미제스(Ludwig von Mises)는 이내 반론을 폈다. 미제스는 전쟁 수행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 받는 ‘전쟁 사회주의(war socialism)’가 실은 전쟁 수행을 방해했고 “국가주의(statism)의 필연적 붕괴를 피하려 애썼지만 붕괴를 재촉했을 따름이다”라는 주장을 폈다.1920년에 발표된 ‘사회주의 연방에서의 경제 계산(Economic Calculation in the Socialist Commonwealth)’에서 미제스는 사회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시장에선 수많은 개인들과 기업들이 끊임없이 방대한 정보를 처리해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룬다. 정부는 그런 정보 처리 능력이 없다. 그래서 사회주의 체제는 정부가 수집한 아주 적은 정보들로 거칠게 계산해서 만든 허술한 계획에 의지하게 된다.“자유 시장이 없는 곳엔, 가격 기구가 없다. 가격 기구가 없으면, 경제적 계산이 없다.”고 미제서는 명쾌하게 설명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지만, 당시엔 아직 사회주의의 청사진이 제시되지 못한 때였다. 미제스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회주의 체제에 사망 진단을 내린 것이다.20세기 사회과학의 가장 중요한 논쟁들 가운데 하나인 ‘사회주의 계산 논쟁(Socialist Calculation Debate)’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주로 빈, 베를린 및 프라하 같은 독일어권에서 이루어지던 논쟁은 오스트리아에서 나치가 득세한 뒤 주로 영어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자유주의 진영은 영국에 정착한 하이에크(Friedrich A. von Hayek)가 대표하게 되었다.하이에크는 사회주의가 정보에 관한 그른 가정에 바탕을 두었음을 지적했다. 사회 운영에 필요한 정보는 거의 다 개인들이 지녔고 정부가 이내 이용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가 그런 정보를 모으는 데는 근본적 한계가 있는데다가 큰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므로, 정부는 늘 빈약하고 묵은 정보만으로 경제를 운영하게 된다.아울러, 하이에크는 시장이 지식을 생산해내는 기구임을 지적했다. 자유로운 시장에선 기업들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으려고 경쟁한다. 그래서 보다 나은 제품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하려고 끊임없이 애쓴다. 그 과정을 통해서 시장은 가장 나은 제품들과 생산 공정 및 유통 경로를 찾아낸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경쟁을 ‘발견적 절차(discovery procedure)’라고 불렀다.이런 발견적 절차를 지녔으므로, 시장은 빠르게 진화하고 사회도 발전한다. 시장이 본질적으로 정보 처리 기구이고 시장은 궁극적으로 지식을 생산해낸다. 진화가 환경에 맞는 지식의 습득이라는 깨달음이 생물학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기 전에 하이에크는 진화의 본질을 깨달은 것이다.논쟁이 진행되자, 사회주의자들도 정보 처리의 중요성과 시장의 효율적 정보처리 능력을 깨닫게 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정부가 시장과 비슷한 기구를 만들어 정보를 처리하는 ‘시장 사회주의(market socialism)’를 제시했다.하이에크의 반응은 간명했다. 시장 사회주의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의사 경쟁(pseudo-competition)’이어서, 시장이 이미 존재하는데 ‘짝퉁 시장’을 일부러 만드는 것이다. 그것으로 ‘사회주의 계산 논쟁’은 실질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1990년대에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로 미제스의 예언이 증명되었다.20세기에 나온 과학 지식의 발전에서 근본적 중요성이 부각된 개념들은 ‘정보’와 ‘진화’이다. 생명 현상은 정보 처리라는 깨달음에서 우주의 근본적 요소는 정보라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정보가 우주의 근본이라는 견해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생명체들만이 아니라 우주 자체도, 진화한다는 사실이 점점 널리 받아들여진다.그리고 이 두 개념들은 근본적 수준에서 연결된다. 진화는 환경에 적절한 정보들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정보도 진화의 과정을 거쳐 생성된다.‘사회주의 계산 논쟁’을 살피면,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주장들은 정보와 진화의 근본적 중요성에 대한 깊은 인식에 바탕을 두었음을 깨닫게 된다. 정보 처리 능력에서의 우열이 시장경제와 명령경제의 성패를 결정하리라는 미제스의 단언과 정보의 존재 형태에 대한 하이에크의 통찰은 처음부터 그 논쟁의 결말을 예고한 셈이다. 그리고 ‘경쟁이 발견적 절차’라는 하이에크의 통찰은 진화가 본질적으로 지식의 습득이라는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이 점에서 하이에크는 당시 진화 생물학자들보다 앞섰다.되살아난 사회주의가 점점 기세를 떨치는 지금, 꼭 한 세기 전에 시작된 ‘사회주의 계산 논쟁’을 다시 찾아보는 것은 뜻이 깊다. 정보와 진화의 근본적 중요성을 잊으면, 인류는 다시 그른 이념과 체제를 추구해서 혼란과 비참을 맞볼 것이다. .다른 편으로는, 인공지능(AI)이 발전하면서, 이런 구도에 변화가 나올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 개인들의 행태에 관한 정보를 집적한 ‘거대 자료(Big Data)’를 처리해서, 당사자들도 모르는 행태적 정보들이 생산된다. 그런 정보들을 ‘채굴한’ 기업들은 개인들의 행태를 미리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주로 대기업들이 이런 능력을 갖추었지만, 정부가 이런 정보들을 취합하면, 사회에 관한 전반적 예측이 점점 정교해지고 정책적 대응도 점점 정교해질 것이다.이런 사정은 미제스가 제기한 전체주의와 명령경제에 대한 반론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이제 자유주의자들은 인공지능의 발전이 불러온 이런 가능성과 거기 담긴 함의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복거일(소설가)

2019-09-30 10:03 복거일(소설가)

[시장경제칼럼] 우리 사회의 도덕성 위기

정기화(전남대 교수, 경제학)최근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가족을 죽게 하였다는 피의자나, 가족을 위해 서류를 조작하였다는 피의자나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증거가 있느냐고 따진다. 마치 인기 드라마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 진실이 드러날 때가 되면 당신이 보았냐고 따지는 것 같다. 이들은 유죄 판결을 받지 않으면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였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범죄를 입증하지 못하였다는 것일 뿐, 행위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행위의 정당성은 도덕에 기초하며 합법적 행위가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다양한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개인들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기본적인 도덕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명과 신체, 재산을 소중히 여기면 타인의 생명과 신체, 재산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률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은 타인을 신뢰하면서 서로 협동하고 사회적 분업을 한다. 도덕률이 지켜지지 않으면 누구나 타인을 신뢰할 수 없다. 그러면 사회적 협동이 어려워지고 사회의 유지가 힘들어진다.초기 사회에서 도덕률이 유지된 것은 개인적 양심 때문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타인과의 공감이며 타인이 자신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타인에게 행하지 않는 것이 양심이다. 양심을 지키지 못하면 누구나 타인 앞에서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이러한 부끄러움이 도덕률을 유지시킨다. 누구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다. 누구나 타인의 재산을 훔치면 부끄러워한다. 때로는 사회에서 도덕률을 지키지 않은 개인은 타인과 교류할 수 없도록 배제되기도 한다.낯선 개인과 살아가는 확장된 사회는 도덕률에만 의존할 수 없다. 부도덕하게 행동하는 개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매일 마주쳐야하는 개인의 재산을 훔치다 들키면 부끄럽다. 하지만 다시는 대면하지 않을 타인의 재산을 훔치는 일은 부끄러움이 덜하다. 그래서 확장된 사회에서 도덕률을 지키지 않는 개인은 증가한다. 모든 개인이 부도덕하게 행동하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사회의 유지를 위해 도덕규범을 강제하는 법의 등장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법이 모든 도덕규범을 강제할 수 없다. 사회의 다양한 집단에 다양한 도덕률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도덕률을 강제하는 것이다.강제력을 집행하는 국가 권력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보편적 도덕률에 어긋나는 법도 강제한다. 보편적 도덕률에 어긋나지만 권력집단에 유리한 법이 강제되는 것이다. 이러한 부도덕한 법은 민주정이 등장하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한다. 민주정이 등장하면 입법 여부는 법의 도덕성보다 다수의 지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다수가 지지하면 도덕적 정당성이 결여된 법이 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수가 소수의 재산을 약탈하여 나누어 갖는 것은 부도덕하다. 하지만 민주정에서는 다수의 표를 얻기 위해 약탈을 합법화하는 법이 쉽게 제정된다. 도덕성을 상실한 법은 합법의 탈을 쓴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옛 성현에 따르면 개인의 모든 행위를 법으로 다스리는 사회에서 개인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개인들은 다만 법을 지켜 처벌을 면하고자 할 뿐이라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상실한 사회에서는 도덕이 바로 설 수 없다. 그런 사회에서는 행위의 도덕성은 사라지고 행위의 합법성만 남는다. 도덕률이 사라지고 법만이 지배하는 사회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나 공정한 사회가 아니다. 정의와 공정은 다수의 지지와 무관하다. 타인이 자신의 재산을 빼앗는 것이 불의이면 자신이 타인의 재산을 빼앗는 것도 불의이다. 타인이 자신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 불공정하면 자신이 타인의 기회를 빼앗는 것도 불공정하다. 정의는 그 자체로 정의로우며 공정은 그 자체로 공정한 것이다.부도덕한 행위가 합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회의 개인은 불행하며 부도덕하게 행동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낀다. 그렇더라도 개인의 도덕률이 건강한 사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법은 인간 행위의 지극히 일부만을 지배할 뿐이다. 그래서 이들 사회의 개인은 여전히 도덕률에 기초하여 행동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전통적인 유교적 도덕률과 개인주의적 도덕률이 갈등을 겪고 있으며 아직 개인의 생명과 신체, 재산을 존중하는 도덕률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중에 민주화의 진전으로 다수가 지지하면 어떠한 법도 제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나아가 우리 사회의 조급증은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라고 재촉한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서 도덕률은 점차 사라지고 도덕성을 상실한 법이 증가하고 있다.주변을 둘러보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개인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 같아 걱정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개인이 늘어나면 도덕이 무너지고 법의 도덕성이 사라지면 사회 질서가 무너진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개인이 아직 많다는 것이다. 이들이 우리 사회에 대해 절망하기 전에 도덕률이 바로 서고 법이 도덕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한다.정기화(전남대 교수, 경제학)

2019-09-23 08:00 정기화(전남대 교수, 경제학)

[시장경제칼럼] 낙수효과에 대한 오해

박종선 한국대학생포럼 회장대중들에게 낙수효과의 개념이 무엇인지 물으면 일반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째는 대기업을 국가가 지원할 때 다른 중소기업들에게도 그 혜택이 가는 것이고, 둘째는 대기업이 잘되면 그 이익이 중소기업에도 가는 것이다. 물론 명확한 의미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하지만 이 두 의미의 차이는 상당히 심각하여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그 이유는 지원하는가와 지원하지 않은가로 갈리기 때문이다. 낙수효과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것은 대기업 지원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대기업을 지원했을 때 그 혜택이 중소기업에는 거의 가지 않고 오로지 대기업만 대부분의 이익을 누린다는 것이며, 이를 근거로 정부가 대기업을 지원하는 것에 반대한다. 여기까지는 상당부분 동의할 수 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두고 어느 한쪽을 지원하려고 하는 것, 넓게는 특정 기업을 정부가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은 기업에 대한 차별이기 때문이다. 또 기업들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한 경쟁으로 이윤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지원하는 정책에 따른 이익을 더 얻고자 하므로 생산적인 활동이 저해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정부 지원 정책의 증대는 개인의 세금 부담을 증가시킬 것이고, 이는 강제성을 동반하기에 경제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옹호자들도 대기업을 차별하여 지원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이 부분은 낙수효과의 의미를 전자로 사용한 것이다.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더 나아가 대기업이 잘된다고해도 중소기업의 이익을 빼앗아간 결과이므로 나쁘며 따라서 대기업을 규제하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자의 의미로 낙수효과가 없다고 말하며 의미를 후자까지 확대하는 경우인데 이때 문제가 발생한다.기업이 돈을 많이 벌면 그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간다. 그리고 그 기업이 모든 생산을 자급자족하지 않는 이상 그 기업과 계약을 하고 있는 다른 협력업체들도 거래가 늘어나므로 이익을 본다. 즉 대기업이 많아질수록, 잘 되는 기업이 많아질수록 그 나라의 국민들은 풍요로워지며 다른 기업들도 혜택을 보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기업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모든 기업에 해당된다. 따라서 그 나라 국민들이 더욱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이 더욱 잘되어야 한다. 경제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생산은 점점 늘어나기에 플러스섬 게임이다.대기업이 돈을 많이 번다고 중소기업이 돈을 못 버는 것이 아니며 일반적으로는 대기업이 돈을 많이 벌면 그 협력업체들에게도 이익이 돌아간다. 실제로 대기업의 협력업체들은 일반적인 다른 중소기업들의 평균 영업이익률보다 높은 영업이익률을 보이고 있다. 대기업이 이익을 볼 때 마치 대기업을 재벌과 동일시하여 재벌들만 이익을 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기업의 주주들이 전부 재벌인 것은 아니다. 대기업의 노동자들도 대부분 재벌이 아니다. 따라서 대기업이 잘되면 재벌이 아닌 국민들도 혜택을 본다. 즉 후자의 의미로 낙수효과를 사용한다면 낙수효과는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특정 기업의 생산 활동이 위축됐을 때 그 기업의 주변 상권이 침체되는 현상을 우리는 자주 목격할 수 있다.전자의 의미로 낙수효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후자의 의미로서는 존재하기 때문에 대기업을 규제하여 성장을 억제하는 방법으로 중소기업을 잘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문제가 크다. 실제로 대기업을 규제한다고 하더라도 중소기업이 성장하지는 않는다. 이는 과거 노무현 정권 때 중소기업 적합 업종을 폐지했던 사례로도 알아볼 수 있다. 이를 폐지했던 이유는 중소기업 적합 업종 적용 이후 중소기업의 생산성이 오히려 낮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대기업을 규제하면,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경우 상당히 많은 규제를 받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려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른바 피터팬 증후군이다.박종선 한국대학생포럼 회장

2019-09-09 14:23 박종선 한국대학생포럼 회장

[시장경제칼럼] 학교 교육 회복을 위해 본질로 돌아가자

손경모(자유인문학회)한국의 학교 교육은 학교 밖 교육에 비해 경쟁력이 매우 낮다. 심지어 2000년대 초반부터는 누구나 돈만 내면 전 국민이 인터넷 강의를 통해 최고급 강의를 평등하게 수강해왔다. 횟수에 제한도 없다. 이런 기술적 혁신은 소위 ‘쪽집게 과외’로 통하는 학교 밖 교육비에 의한 성적 격차도 압도적으로 줄여왔다. 인터넷에만 접속하면 누가 그 분야 최고 강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지방에 살아서 배우지 못하는 경우도 없고, 돈이 부족해서 배울 수 없는 경우도 없다. 누구나가 정말 노력만 하면 배울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누구나 원하는 능력으로 인정받는 사회에 성큼 다가선 것이다. 그런 사회의 변화 앞에 “학교 교육의 역할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생겨났다. 고객인 학생들은 무엇이 더 효율적인지 금방 안다. 그래서 똑같은 교육 과정을 학교와 학원(인터넷 강의)에서 중복으로 배우지 않길 원했다.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학교에서는 숙제를 하거나 필요한 다른 것을 했다. 그러자 언제나 선이길 원하는 학교 교육은 궁색한 답변을 냈다. 인성, 도덕, 윤리 등의 알 수 없는 모호한 말들로 학교 교육의 가치를 주장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교육의 평가 척도인 시험 방법을 바꿔버리는 데 이르렀다. 이른바 ‘수시평가’이다.본래 승부란 한 순간에 결정되는 법이다. 이것은 어떤 다른 인간적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다. 사자는 사슴을 한 걸음 앞에서 놓쳐 굶게 되는 것이고, 사슴은 그 한 걸음을 더 내 달려 목숨을 건진다. 지켜보는 제3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불과 5cm에 불과한 거리이지만, 당사자인 사슴과 사자에게는 천당과 지옥만큼 먼 거리다. 정시에서 그 순간 한 두 문제의 차이도 실은 사슴과 사자의 5cm만큼의 차이가 있다. 단지 그 5cm라는 한 순간이 그 이전의 모든 역량을 증명한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 하나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시가 도입된 지금은,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 되고 말았다.이런 수시평가는 고객인 학생을 ‘비정’하게 만든다. 정시 제도는 한 가지 평가, 즉 “이 지식을 네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에 관해서 모두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방법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에는 다른 평가가 없다. 점수에는 시험을 치른 학생의 지식 수준이 모두 요약돼 있다. 그래서 학생들이 한 가지 시험 아래 동일한 경쟁을 한다. 하지만 수시는 모든 평가가 모든 사람에게 다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경쟁이 이뤄질 수 없다. 서울 과학고 학생의 영어 ‘말하기, 듣기, 쓰기’ 점수 100점과 삼천고 학생의 영어 ‘말하기, 듣기, 쓰기’ 점수 100점은 전혀 다른 점수다. 전국적인 경쟁이 아니라 교내 경쟁의 심화를 통해서 학생들은 친구들과 협력하는 방법이 아니라 좌절시키는 방법을 먼저 배우게 된다. 그 편이 더 즉각적인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특히 이 수시의 문제는 추후 대입 시, 대학이 원하는 학생을 뽑는 데 아무런 정보를 줄 수 없다는데 있다. 대학은 고급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그만한 준비가 된 학생을 입학시키길 원하는데, 수시 제도가 주는 정보로는 대학이 그 학생의 학업 수준을 제대로 평가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평가를 중복으로 보게 된다. 기존 정시 제도의 평가를 통과해야만 한다거나, 논술 시험을 봐야한다거나, 입학 사정관의 면접을 통과해야한다거나 하는 여러 변칙들이 생겨난다.다양한 변칙은 다양한 문제들을 양산한다. 대표적인 것이 공부하는 능력보다 입시 전략이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런 변칙적인 입시 전략은 순전히 공부만 한 학생들을 좌절시켰다. 정해진 의자는 100개인데, 이미 변칙으로 할당된 자리가 75개이니 공부만 하는 학생들은 전에 비해 4배 더 강해진 강도에서 공부를 해야만 한다. 물론 누군가에겐 기회가 됐다. 공부는 못하지만 그런 변칙을 구사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진 이들에게는 기회가 됐다. 이런 변칙은 제대로 먹히기만 한다면 실로 대단한 위력을 보인다. 대입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명문대에 진학하기도 하고, 전문대학원 입학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전문대학원에 입학하는 성과를 보인다. 물론 이런 성과는 정당하게 그 자리를 가져갔어야 할 다른 이들의 성과를 약탈한 결과다.이 같은 교육 제도가 누적된 결과, 현재의 교육 제도는 누구도 믿지 못하는 누더기가 되고 말았다. 대서특필된 것은 한 고위 공직자의 딸이 온갖 사기와 편법으로 누구나 선망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것이지만, 본질은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많은 학생들이 그보다는 덜하겠지만 그 같은 방법으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제도를 통과해 왔다.교육 제도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3불 정책을 폐기하고 다시 정시 위주의 입시제도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지금 벌어지는 코미디 같은 입시 꼼수도 없다. 당당하게 학교에 돈 내고 들어가 정원 외로 의자하나 더 놓으면 된다. 매년 장학금을 구하기 위해 모든 대학들이 뛰어다닐 필요도 없고,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도 용돈 받으면서 학교 다닐 수 있다. 매년 바뀌는 입시정책을 뚫으려 수천만 원씩 쓰지 않아도 되고, 고위 공직자도 그런 코미디 같은 일 때문에 전 국민의 비웃음을 사지 않아도 된다. 제도를 뚫을 방법이 없으면 자연히 다른 방법을 찾게 되기 마련이다.더 나아가서는 학교 교육은 학교 교육이 추구해야 할 가치만 추구하면 된다. 학교 밖 교육은 개개 능력의 최대치를 추구한다. 학교 교육은 사회 전체 최저치의 한계를 추구한다. 학교 교육은 사회 전반의 언어 통일과 사회 통합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학교 교육은 다른 학생들이 얼마나 잘하는지, 얼마나 뛰어난 업적을 이루는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런 것은 학교 밖 교육이 훨씬 더 잘한다. 학교 교육은 반대로 사회 평균에서 뒤떨어지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학교 교육의 목적은 모든 이들을 ‘동일한 교육’을 받게 하는데 있지 않고, 떨어지는 이들을 평균 가까이 이끄는 데 목적이 있다.손경모(자유인문학회)

2019-09-02 13:33 손경모(자유인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