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칼럼] 사회주의 국가론: 온정주의 vs. 어버이주의

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입력일 2020-06-29 14:56 수정일 2020-06-29 14:59 발행일 2020-06-29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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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의 핵심가운데 하나는 “나의 삶 책임지는 국가”다. 나의 삶에 필요한 소득, 일자리, 건강, 노후, 자녀교육 등을 책임지는 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런 국정 어젠다를 지지하는 세력이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국정철학의 바탕에 깔려있는 문제, 즉 ‘왜 개인의 삶을 국가가 책임져야하는가’의 문제, 간단히 말해서,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문제다. 이는 국가철학의 핵심 문제 가운데 하나다.

흔히 국가론을 인간의 이기심에서 도출하는 게 일반적이다. 자본주의는 이기적이기 때문에 효율적인 질서가 형성될 수 없다는 이른바 ’홉스의 문제’(Hobbsian Problem)가 야기된다는 것이다.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체제를 계획경제로 교체해야 한다는 게 토마스 홉스 전통의 국가주의다.

주목할 것은 ‘온정주의’(paternalism)와 ’어버이주의’(parentalism)를 근거로 하여 국가의 존재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두 가지는 성격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구분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전자만을 고려하여 국가주의를 설명했다. 칸트, 미제스, 하이에크 등 자유주의자들은 복지국가를 비판할 때 주로 온정주의를 비판했다. 국가개입의 존재 이유로서 그들은 어버이주의를 간과했던 것이다.

◇온정주의는 하향식 국가론

온정주의 국가론은 개인은 국가의 도움이 없으면 합리적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국가의 존재 근거를 설명한다. 먹방(먹는 방송)규제, 비만세(肥滿稅)처럼 스스로 건강도 돌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과 민초를 대신해서 국가가 강제로 그들의 건강을 돌봐야 한다는 온정주의태도가 국가개입을 정당화한다.

어버이주의는 시민들이 자신을 대신해 필요한 것을 정부가 해주기를 바라는, 국가에 의존하고 싶어 하는 태도다. 시민들은 자신을 대신해서 국가가 선택하고 책임져주기 바란다. 온정주의는 민초나 백성은 삶에 대한 확실한 가치관 또는 선호를 가질 수 없거나 설사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불합리하기 때문에 국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통치자가 자신의 가치관이나 선호를 강제로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정주의는 이 같이 엘리트적 태도다. 국가의 지지 태도에서 온정주의는 하향식인 반면 어버이주의는 상향식이다.

◇어버이주의는 상향식 국가론

이 맥락에서 오이겐 뵘-바베르크(E. B?hm-Bawerk)가 발견한 ‘미래선호를 경시하는 인간의 성향’은 흥미롭다. 이자가 왜 생겨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적용되는 그의 ’미래선호 경시법칙’은 실업.연금· 건강과 관련된 국가의 강제보험과 같은 복지국가의 존재이유를 설명한다. 실업.연금· 건강문제와 같이 미래에 생겨날 문제를 경시하는 성향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자발적인 보험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 의한 강제보험은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국가의 노예가 되기 싫은 시민을 노예로 만드는 게 온정주의인 반면에 어버이주의는 국가의 노예가 되고 싶어서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는 태도다. 이는 사회주의 지지태도가 상향식이다.

어버이주의는 부모와 어린 자녀 간의 관계와 동일하다. 어린아이는 어버이 품에 안겨서 보호받을 때 아늑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면 붙들어주고 상처가 나면 치료해주고 행동이 지나쳐도 책임을 묻지 않고 흔쾌히 용서한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그렇게 해줄 걸 알기 때문에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확실하다고 해도 두려움 없이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어린아이가 성장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환경에 직면하면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일자리나 소득, 건강이나 노후도 불안해져서다. 자녀를 보육하고 교육시켜야 하는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책임·독립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다. 인류는 그런 개념 없이 5만 세대 동안이나 살았다. 그래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유와 독립을 싫어한다.

◇신은 죽었다. 국가가 대안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의지할 것을 찾는다. 한동안 성황당, 신령님, 종교 등 신(神)에 의지했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 니체의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망망대해에 버려진 것이다. 시장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보기 때문에 시장사회에 의지할 수도 없다. 시민종교로서의 자유주의는 한국 사회에 자리 잡지 못했다. 자생적 질서도 낯설다. 자유, 독립도 어쩐지 생소하고 두렵다.

한국인이 의지할 유일한 곳은 국가뿐이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가 인기 있는 구호인 이유다. 신의 죽음과 국가의 탄생은 동전의 양면이다. 시민의 애환을 어루만져주는 정부가 좋다. 어린아이를 키워주고, 학교에 보내주고,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소득을 늘려주고, 병을 치료해주고, 늙으면 보살펴주는 등,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기만 하면 자유는 희생돼도 좋다. 시민들이 국가로부터 안정감을 얻는 대가로 자유와 자립을 포기하고 싶은 동기에서 사회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독립보다 예속이 더 좋다는 뜻이다. 그런 포기과정을 설명한 게 에리히 프롬(E. Fromm)의 《자유로부터 도피》가 아니던가!

◇자유주의의 과제

자유주의가 온정주의와 어버이주의를 극복하여 시민들을 자유의 길로 안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유주의에게 온정주의에 대한 비판의 대상은 국가다. 시민들은 스스로 삶을 이어갈 능력이 있거나 스스로 학습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국가가 간섭하지 말라고, 또는 국가가 나서는 건 지적 자만이요 위선이라고 비판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버이주의에 대한 비판과 설득은 온정주의와 비교할 때 비교적 어렵다. 흔히 ’대깨 x들’(대갈통이 깨져도 xxx를 좋아하는 사람)들 또는 ‘x빠들’(x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노예가 되고 싶은 시민들을 교육시켜 자유주의로 전향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좌익 정부의 기만과 위선을 보여줄 수 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결과는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이라는 걸 그리고 국가의 노예가 되면 필요한 때는 국가로부터 등을 돌려 자유를 찾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동시에 자유주의에서는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누구나 홀로설 수 있는 기회가 충분이 마련되어 있다는 걸 보여 줄 수 있다.

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