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그라운드] 20주년 ‘벽 속의 요정’ 김성녀 “관객의 힘으로 울고 웃는, 가시관이자 월계관 ”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4-10-14 22:11 수정일 2024-10-14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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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년을 맞은 ‘벽 속의 요정’을 혼자 이끌어 가는 배우 김성녀(왼쪽)와 손진책 연출(사진=허미선 기자)

“작품을 제일 재밌게 만드는 건 관객들이에요. 모노드라마가 이렇게 힘들고 외롭고 어렵구나, 온갖 생각을 하면서 첫 무대에 올랐는데 전 관객이 기립박수를 쳐주시고 함께 울고 웃고 해주셔서 감동받았습니다. 관객의 힘이 이렇게 몰려오는구나 싶었죠. 저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기도 했지만 체력을 갉아먹고 고통스러운 가시관이기도 했어요.”

김성녀는 20주년을 맞은 뮤지컬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10월 31~11월 10일 세종문화회관 S씨터어)을 “고통과 영광을 같이 주는, 저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밝혔다.

1인 32역, 5살 어린 아이부터 70살의 노부부까지 여러 인간 군상들로 변신하며 130여분을 오롯이 혼자 끌어가는 ‘벽 속의 요정’ 무대에 처음 올랐을 때 그의 나이 55세. 그의 남편인 손진책 연출과의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해이기도 했다.

20주년을 맞은 ‘벽 속의 요정’ 공연장면(사진제공=극단미추)

“세월이 흐르면서 진부한 건 아닐까, 이 작품의 메시지가 관객에게 잘 전달될까 늘 조바심을 치면서 20년을 해왔어요. 몇달 전에도 성남에서 이 공연을 했는데 관객들이 변함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내주셨어요. 살아 있음에 아름답다는 긍정의 신호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얘기구나 싶었죠.”

‘벽 속의 요정’은 일본작가 후쿠다 요시유키가 스페인 내전 당시 실화를 바탕으로 꾸린 작품으로 한국의 배삼식 작가가 한국화해 2005년 초연됐다. 

전쟁 중 벽속에 숨은 채 딸의 성장을 지켜봐야했던 아버지, 그의 부재 속 가정을 유지해온 딸과 어머니의 이야기다. 김성녀가 혼자 끌어가는 모노드라마로 12곡의 노래와 극 중 극 형태의 그림자인형극 ‘열두달 이야기’, 관객들과 어우러지는 계란팔이 등으로 또 다른 재미를 더한다.

“너무 고마운 사람들이 저의 대표작을 마련해줬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삼식 작가의 좋은 글이 있었고 저와 결혼 30주년을 맞은 손진책 연출이 배우가 돋보이는 연출을 해 선물한 작품이었죠. 마당놀이 배우로는 잘 알려졌지만 연극배우로서의 인지도는 부족했던 저에게 연극배우로서의 위상을 마련해준 작품이기도 하죠.”

1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오픈씨어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손진책 연출은 “당시 (원작자인) 후쿠다 요시유키씨는 본인 대본 그대로, 스페인을 배경으로 해주기를 바랐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비극은 한국에서 여전히 진행형이잖아요. 이걸 스페인 얘기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설득 끝에 배삼식 작가가 각색해서 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곤 “제가 연출한 작품들은 끊임없이 수정하고 보완하는데 이상하게 ‘벽 속의 요정’은 20년 전과 변화가 없다. 대본, 연출은 물론 의상, 세트, 조명 등 모든 게 이상하게도 그대로 가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20주년을 맞은 ‘벽 속의 요정’ 손진책 연출(사진=허미선 기자)

“공연은 장소와 시대에 따라 변하긴 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데올로기의 비극에서 시작하죠. 그럼에도 이 작품은 소극장이든 대극장이든 공간 크기와 관계없이 빨려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작품이에요. 한국은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비극이 현재진형형인 나라잖아요. 이데올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인간, 가족의 이야기고 딸과 어머니의 이야기예요. 생명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주제죠.‘

이어 “어떤 시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하게 생각하는 작품”이라며 “인간의 존엄성 문제가 절실한 이 시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김성녀는 “처음 이 공연을 할 때는 에너지를 정말 활화산처럼 쏟아냈다”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똑같은 ‘벽 속의 요정’을 한 기억이 없다. 매번 달랐고 매회 다른 장면에서 눈물이 나고 매번 새로운 작품을 대하듯 했다”고 밝혔다.

“지금은 제일 힘든 게 노래입니다. 12곡을 불러야 하는데 높은 음이 잘 안나와요. 에전에는 노래를 완벽하게 불렀다면 이제는 제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하게 됐죠. 이번에는 잘하려고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내 나이에 맞는 연기와 노래를 하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20주년을 맞은 ‘벽 속의 요정’을 혼자 이끌어 가는 배우 김성녀(사진=허미선 기자)

그리곤 “열린 마음으로 동참하면 재밌게 볼 수 있다”며 “우리 관객들은 너무 잘 놀아준다. 그 멋진 관객들이 공연을 더 재밌게 만든다”고 전했다.

초청으로만 300회 이상 무대에 오른 ‘벽 속의 요정’의 이번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김성녀가 “제 의지로 하는 첫 공연”이기도 하다. 김성녀는 “제 의지로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대표님을 찾아가서 ‘20주년을 맞아 이 공연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며 “이번 공연은 저에게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표현했다.

“이 열흘을 잘 해낼 수 있다면 30년까지 하는 거고 마음에 안 들면 이번 공연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노래하고 연기하는 2시간짜리 공연을 몇 살까지 할 수 있을지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완성도가 떨어지면 그건 배우로서는 무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번 공연이 (더 할지 마무리할지를) 결정할 기회인 것 같습니다.”

허미선 기자 hulr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