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칼럼] 소유와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로

김인영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
입력일 2020-07-27 10:37 수정일 2020-07-27 10:41 발행일 2020-07-27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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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영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

코로나19 사태 대응 과정에서 국가가 어디까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지는 중요한 이슈다. 세계는 코로나19 대응으로 인한 개인의 자유 침해와 관련하여 여전히 논쟁 중인데 우리 언론은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자유 침해를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모습이다. 왜 그럴까? 개인이 먼저 있고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인데, 최근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자유 ‘쯤’은 희생될 수 있다는 사고가 사회에 팽배해지고 있다.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우리의 문화에 그리고 역사 속에 개인의 자유와 자유주의에 대한 관심이 적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초기에 스웨덴 정부가 취한 시민의식에 기반을 둔 집단면역 달성이 관심을 받았다. 봉쇄조치를 최소화하며 ’보건과 자유’ 사이에서 ‘자유’에 방점을 둔 것이었다. 물론 보건과 경제 사이에서 경제를 중시했다는 시각도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언론은 뉴욕타임즈(NYT)를 인용하며 스웨덴이 생명과 경제 둘 다 살리지 못했다는 식의 방역 실패 논평만 보도했다. 대대적 봉쇄조치에 힘을 기울인 주변 덴마크나 노르웨이에 비해 사망자는 훨씬 많았음에도 경제적 피해는 비슷했다는 논지였다.

그러나 사실 뉴욕타임즈는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아 행복하고 만족해하는 스웨덴 사람들의 일상을 더 많이 보도했다. 또 뉴욕타임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느라 논지가 오락가락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봉쇄조치를 강화·확대하면 봉쇄로 인한 문제점을 지적했고, 경제활동 재개에 나서면 아직 통제가 필요함을 강조하는 식으로 왔다 갔다 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자유의 침해에 대한 우리의 언론과 방송의 보도는 한심스러운 지경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정치적 자유, 언론의 자유, 민주주의를 외친 것을 가보(家寶)처럼 자랑했던 자칭 진보적 언론들은 표변하여 정부의 지나친 개인정보 추적과 감염자를 죄인시하는 가둬두기(격리)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물론 수많은 기사의 어느 구석에 문제점을 지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책이 초래하는 개인의 자유 침해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심도 있게 다루지 않았다. 자칭 보수언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간간이 코로나19 대응 관련 정부의 지나친 개인정보 들추기, 권한 남용, ’마스크 쓰지 않을 자유’로 대립하는 미국 사회의 모습을 보도했다.

코로나19 대처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큰정부’의 등장, ’온정주의(Paternalism) 정부’의 정착, 그리고 자유의 제한이 상시화 되는 현실이다. 국가가 전면에 나서고 개인과 시장은 뒤로 밀리는 큰 흐름이 당연시 되는 사회로의 길의 모습이다. 하이에크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로의 길’, ’노예로의 길’이 스멀스멀 우리 사회의 주류 사고로 자리 잡고“ 있다. 근대 자유인에서 봉건 노예로의 길이 역사의 후진인 줄도 모르고 ‘(정부가) 너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슬로건에 국민은 환호하고 있다.

더 나아가 중국식으로 국가가 전염병 차단이라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삶을 무시한 지역 차단과 봉쇄가 당연시 되고 거기에 안주하는 상황이 될 것이 두렵다. 언론·방송이 거대국가의 귀환을 당연시하고 지식인들도 따라서 침묵하는 사회로 될 것은 더욱 두렵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넘어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 즉 전체주의 국가(totalitarian state)로의 길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결과는 히틀러의 나치 전체주의 독재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정책의 실패들은 정부 개입과 거대정부에 대한 이념적 아집이 만들어 낸 결과다. 1차 추경 11조7000억원, 2차 추경 12조2000억원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35.1조원이라는 역대 최대 ’초슈퍼 추경’이 통과되었어도 “추경이 경제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돈풀기’에 대한 근본 논쟁은 찾기 어렵다.

그저 ”정부가 잘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국민들, 추경에 자기 지역구 사업을 얹으려는 국회의원들, 돈을 풀어야 그나마 추락하는 경제를 지탱할 것이라 믿는 정부, 돈 쓰는데 재미가 붙은 정부 공무원들, 추경으로 ’돈풀기’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는 않고 입 닫은 ‘어공 바라기’ 지식인들의 합작품이다. 3차 추경의 주요 내용을 보면 ’돈쓰기’의 문제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고용안정 지원에 9조 1000억 원, 온누리상품권 1조 원 추가 발행 등 3조 2000억 원, 방역산업 육성 등 2조 4000억 원”이 거의 전부다. 추락하는 경제를 지탱하기 위한 땜질용 돈쓰기로 보인다. 미래 비전이 없는 임기응변식 예산 편성이기 때문이다.

1,2차 추경은 다 썼는지, 제대로 쓰였는지 검증도 없이, 역대 최대 추경 17조3천 억 원(2013년)의 두 배 규모를 쓰면서도 정치권은 무덤덤하고, 국민은 ‘헌 번 더 재난지원금’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마이너스 경제성장 막기용 지출이 ’국민이 원하는바’라면 그게 민주주의다. 여기에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주라’가 포함되면 그건 포퓰리즘이다. 그러나 대중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결합은 재정 파탄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의 재정파탄은 대중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결합으로 시작됐다.

다음 세대의 돈을 빼앗아 현 세대가 마구 쓰는 ’양아치 짓’에 대한 반성이나 의구심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일자리 추경’이 아니라 ’알바 추경’이라는 지적이 외면 받고, ‘기후 악당’이라는 비판을 넘어설 ’창의적 기후변화 대응’이 아니라 ‘무늬만 녹색’이라는 지적이 묻혔다.

’정부는 만능이 아니다’, ‘큰 정부는 큰 실패를 낳는다’라는 국가주의 신화(神話)에 대한 근본 논쟁이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돈 벌어 세금내고, 일자리 만드는 기업과 기업인이 이렇게 정권으로부터 수난을 당해도 아무 말도, 아무 일도 없고 자칭 선진국이 되는 풍토가 된 것이다. 노조(勞組)를 걱정하면 ’정의’롭고, 기업(企業)을 걱정하면 ‘토착왜구’ 취급받고, 경제관료가 기업 걱정을 하면 ’정경유착’ 의심받고, 정당이 기업을 걱정하면 후원금 받았느냐고 지탄받는 현실은 잘못 되도 크게 잘못 되었다.

진정으로 노동자의 일자리, 임금, 복지를 걱정한다면 기업이 장사 잘하고 ‘세금 팍팍’ 내는 경제가 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주장은 친기업 ’적폐(積弊)’로 찍히는 현실이다. ‘정부는 만능이 아니다’, ’정부보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에 대한 근본 성찰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받지 못하니 ’개인의 소유’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의 본질은 개인 재산권 침해를 통한 집값 잡기다. 문정부는 6·17 부동산 대책을 통해 강남구 청담, 삼성, 대치동과 송파구 잠실동 전역을 ‘토지거래 허가구역’으로 묶었다. 부동산 정책 실패라는 비난을 받게 된 정부가 국민의 재산권과 거주·이전의 자유라는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하는 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헌법 제14조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로 규정된 기본권마저 부정당하게 되어도 우리 사회는 아무 말이 없다. 이념적 아집과 과도한 정치화(over-politicization)가 만들어낸 정책 실패를 국민의 자유 침해로 대응해도 지식 사회는 침묵하고 있다.

아파트 1채만 허용하는 소유권 부정 현상이 고위공직자를 넘어 일반인에게까지 정착될까 두렵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이 발의한 “시장과 도지사가 정하는 아파트 전월세 인상액” 법안이 통과될까 공포스럽다. 그것은 공정사회도 아니고 국가주의 평균사회 또는 사회주의 평등사회로의 길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이 중국보다 나은 점은 적어도 중국공산당의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개인 재산을 지키며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인의 자유와 소유권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우리의 현실이 매우 우려된다.

김인영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