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칼럼] 뉴딜의 경제위기 극복은 신화다

권혁철 자유기업센터 소장
입력일 2020-06-01 10:25 수정일 2020-06-01 10:35 발행일 2020-06-01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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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철 자유기업센터 소장

경기가 크게 후퇴하고 불황의 조짐이 보이자 우리 사회에 뉴딜, 소위 ‘한국판 뉴딜’이 정치인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일례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비상경제회의에서 “정부가 나서서 5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해 국민에게 제공하겠다”면서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로서 이른바 한국판 뉴딜을 추진할 기획단을 신속히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지난 5월에도 ‘대규모 일자리 창출 사업을 전개하겠다’면서 ‘한국판 뉴딜’에 대해 재차 언급했다. 조만간 구체적인 프로젝트들이 발표되고, 실행에 옮겨질 기세다.

‘한국판’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는 하지만, 과거의 뉴딜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한국판 뉴딜 정책’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를 예상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1930년대 대공황의 치유책으로 도입되었던 뉴딜 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부분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즉 이와 관련해서 지난 수십 년간 학계에서 이뤄졌던 논의와 토론을 통해 분명해진 것은 뉴딜 정책이 대공황의 치유책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단기적인 경기후퇴를 장기간에 걸친 대공황으로까지 몰고 간 원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와 관련해서 정치인과 많은 국민들 사이에서 ‘경제 위기 극복의 처방약’으로 ‘뉴딜’이라는 단어가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구호(救護, relief), 대규모 공공사업과 일자리 만들기 등을 통해 연결되는 이른바 ‘뉴딜 연합’을 구성해서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튼튼하게 만들고자 하는 정치적 셈법도 당연히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실제로, 뉴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노조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 중산층 개입주의자(Liberals), 남부의 백인 농민, 그리고 흑인 등의 소수 인종을 묶어 ‘뉴딜 연합’을 구성하고 이를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만듦으로써 재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뉴딜 연합’은 1980년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크게 흔들릴 때까지 30년 이상 미국 민주당의 탄탄한 지지기반이 되었었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들도 - 특히 자칭 ‘진보’ 진영 - 권력과 예산으로 뒷받침되는 정책을 통해 사회, 경제적 약자들의 삶을 개선하고, 그들이 진보의 정치적 기반이 될 수 있도록 결속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뉴딜을 바라보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대공황 및 뉴딜과 관련해 잘못 알려진 ‘신화’들이 사람들에게 여전히 뉴딜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내용이라 하더라도 일단 한 번 방송되고 난 후에 그것을 바로잡아보려는 모든 시도가 별 효과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신화들은 사람들 사이에 자유 시장경제는 경제위기를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킨다는 환상과, 또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는 환상을 심는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두 가지 ‘신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신화는 ‘뉴딜 정책이 미국을 경제 위기에서 구했다’는 것이다. 이것처럼 명백한 거짓말도 없다. 1929년 발발한 대공황은 1940년대로 진입할 때까지,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시행된 지 몇 년이나 지났음에도 미국 경제는 여전히 휘청거렸고, 고실업도 여전했기 때문이다. 1930년 8.9%였던 실업률은 뉴딜정책이 시행된 1933년 24.9%로 정점을 찍고 조금씩 내려오기는 했지만, 1934년 21.7%, 1935년 20.1%, 1936년 17.0%로 여전히 아주 높았다. 1938년과 1939년에는 실업률이 19.0%와 17.2%로 다시 올라가는 일까지도 있었다. 미국의 높은 실업률은 1941년이 되어서야 10% 이하로 내려오게 된다.

뉴딜정책이 공황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은 대공황과 다른 불황의 경우를 비교하면 보다 확연해진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불황은 2년 이내에 끝이 났고, 길어도 5년 이내에는 모두 종식되었다. 일례를 들자면, 1921년 불황 당시 실업률은 11.7%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1년 후인 1922년에는 실업률이 6.7%로 낮아졌고, 그 이듬해인 1923년에는 2.3%까지 떨어졌다. 이렇게 순식간에 끝나버린 불황이지만, 여기에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은 없었다. 오히려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에 의지했었다. 반면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대공황은 장장 1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과연 뉴딜이 대공황을 끝낸 것이 맞는가?

시장경제에 맡겨서는 공황이 종식되지 않는다는 환상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전임 대통령인 후버와 관련된 신화에서 기인한다. 즉 후버는 자유시장 정책을 펴서 불황의 골을 깊게 한 반면에, 루즈벨트는 정부의 적극적 시장 개입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이 아닌 신화에 불과하다. 후버의 <회고록>은 1929년 주식시장이 대폭락하자 연방정부 안에 재무장관 멜론으로 대표되는 자연치유파(시장경제 메커니즘을 통해 부실이 청산되고 경제가 회복된다는 파)와 자신을 필두로 한 적극적 개입파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회고록>에는 적극적인 정부 개입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후버는 노동시장과 임금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 스무트-할리 관세법을 통과시켜 무역을 대규모로 축소시키고 세계적인 보복관세 전쟁을 일으켰으며, 대형 공공사업과 보조금 및 구제금융 등으로 대규모 재정적자를 만들어 낸 큰 정부 지향의 인물이었다. 그가 시행했던 정책들을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에 빗대 ‘작은 뉴딜 정책’ 혹은 ‘축소판 뉴딜 정책’이라 부르듯이, 후버는 자유시장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먼 사람이었다.

경기후퇴와 불황에 대한 처방을 공황을 12년 동안이나 지속시킨 뉴딜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불과 2년 만에 끝난 1920년대 초반의 불황에서 그 해법을 찾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처방전은 한마디로 ‘시장경제’이다.

권혁철 자유기업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