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칼럼] 경기 불황 극복, 실패한 역사 아닌 1920년 불황에서 배워야

조범수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부생
입력일 2020-09-28 15:16 수정일 2020-09-28 15:21 발행일 2020-09-28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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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수
조범수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부생

코로나19 확산의 충격으로 세계 경제가 침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주식 시장은 미국을 필두로 각국이 경기부양을 명목으로 급속한 통화 확장 정책을 펼치면서 반등하고 있지만, 실물 경제는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금융과 실물 경제 간의 괴리가 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확대하면서 2019년부터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경기불황론’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

경기 불황을 논할 때면 어김없이 미국의 대공황과 2008년 금융위기가 거론된다. 그래서인지 불황에 대한 대응책도 이들 사례를 본보기 삼아 시행하려고 한다. 당장 문재인 정부가 ‘한국판 뉴딜’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는 것도 결국 대공황 시기 루스벨트의 정책을 모방하겠다는 선언이다. 전례 없는 수준의 무책임한 통화 증발도 역시 2008년 경제위기의 대응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다.

하지만 대공황과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외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실패의 역사다. 후대 역사학자들에 의해 ‘뉴딜’이라 명명된 FDR의 경제정책은 경기 침체를 무려 15년여 동안 전례 없는 수준으로 지속시킨 총체적 실패였고, 2008년 이후 각국 정부에서 시행한 확장적 재정 및 통화 정책은 불가피한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며 경제적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불황의 역사에서 정부 대응의 본보기를 찾을 요량이라면 그보다는 1920년 불황에 주목해야 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시 경제로 복귀한 후 처음 몇 달은 기업들이 높은 수익을 내며 경제를 성장시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20년부터 급격히 경기가 얼어붙기 시작한다. 금융 전문가 제임스 그랜트에 따르면 1920년부터 1년 간 산업생산지수는 무려 31.6% 하락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2007년부터 2년 동안의 산업생산지수 낙폭이 16.9%에 그쳤던 것을 고려하면, 가히 ‘추락’ 수준이었다. 자동차 생산은 자그마치 60%가 감소했고 실업률은 15.3%에 달했다. 한편 1년여 동안 도매 물가는 36.8%, 소비자 물가는 10.8%, 농산물 가격은 무려 41.3% 급락했다. 하락의 속도를 기준으로 하면 대공황의 기록조차도 1920년 불황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윤이 급격히 감소하고 기업들이 우후죽순 도산하여 시민들이 거리에 내앉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이토록 위중했던 침체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18개월 동안 고꾸라지던 산업생산지수는 1922년 60% 증가했고, 1923년에는 실업률이 완전고용수준인 2.4%로 내려갔다. 미국의 산업생산지수가 2020년 재에도 2005년 수준에서 정체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에 1920-21년의 불황은 급격한 침체와 매우 왕성한 회복으로 특징지어지곤 한다.

어떠한 정책이 이러한 눈부신 반등을 가능케 했을까. 케인스가 말한 것처럼 지폐를 채워 넣은 빈 병을 폐광에 묻어서라도 재정지출을 늘린 것일까? 아니면 대대적인 양적완화라도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당시 워런 하딩 정부는 도리어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대폭 축소했다. 이렇다 할 경제안정화 정책도, 경기부양책도 실시하지 않았다. 하딩 행정부의 대응은 오늘날 주류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의 눈에 매우 비상식적일 것이다. 정부의 방임적 정책이 어떻게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선 경기변동이론(business cycle theory)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경기변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황기(bust)에 선행하는 호황기(boom)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알아야 한다. 경기변동 상의 호황기는 정부의 인위적인 신용 팽창이 기업가들의 과오투자를 양산하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과오투자는 경제의 실제 저축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따라서 호황기는 지속불가능하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불황이 온다. 이 불황기에 기업들의 낭비적인 투자 과제가 청산되고 이에 마찰적 실업이 발생하며, 신용이 축소되면서 전반적인 물가가 하락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왜곡된 생산구조를 경제 주체의 실제 소비-투자 비율에 따라 재정비하여 지속가능한 경제 발전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불황기에 이 같은 조정 과정을 방해하는 정부 개입은 경제 회복을 지연시킬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경기변동의 씨앗이 될 수밖에 없다. 청산 과정이 효과적으로 신속히 진행되기 위해서는, 각종 세금이나 규제와 같이 경제에 경직성을 유발하는 요소가 최소화되어야 한다.

위 이론에서 유추할 수 있듯 1920년의 불황 전에도 무분별한 신용 팽창이 있었다. 우선 1913년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 of 1913)으로 연방준비제도가 창설되면서 은행의 법정지급준비율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연준 이전의 국립은행들은 평균적으로 20%의 지급준비금을 보유해야 했는데, 연준이 이를 10%로 인하한 것이다. 여기에 미국이 1차대전 참전하게 되면서 의회는 막대한 전시재정을 편성했고 연준은 통화공급을 두 배가량 늘리면서 할인율 또한 낮게 유지시켰다. 이러한 인위적인 신용 창조는 경기변동에 불을 지폈고 결국 1919년부터 연준은 긴축 정책을 시행하게 되고, 버스트가 오면서 불황이 발행했다. 그런데 하딩 행정부는 1920년부터 22년까지 정부 예산을 절반으로 삭감했고 국가 부채를 1/3수준으로 줄였으며 모든 계층에 대해 감세를 실시했다. 그 결과 미국의 경제는 18개월 만에 다시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워런 하딩은 사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에 꼽힐 정도로 평판이 매우 안 좋다. 애초에 당내 알력으로 얼떨결에 대통령 후보에 오른 인물인 데다가, 친구에게 스스로 자신이 대통령직에 적합하지 않다고 털어놓기도 했고, 또 각종 부패 및 스캔들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불황기에 하딩 정부가 취했던 ‘방임적’ 태도를 많은 역사학자들의 눈을 통해 단지 무능과 태만의 결과처럼 치부하고 있다. 하지만 사료를 통해 하딩의 연설문을 살펴보면 그가 기술적이거나 이론적인 전문성은 아니어도 경제의 작동원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딩은 1921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떠한 법령도 냉혹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는 점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 경제라는 것은 굉장히 정교하고 모든 부분들이 상호의존적인데, 비정상적인 수요와 신용 팽창, 그리고 물가 폭등이 이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정상적인 균형을 되찾아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낭비벽에 대한 벌(penalties)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며 고르게 안배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

오늘날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1918년 전세계적으로 8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을 재조명한다. 하지만 스페인 독감 범유행에 뒤 이은 1920년의 경제 불황을 이야기하는 논자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이 사건이 ‘잊혀 진 불황(the forgotten depression)’으로 불리는 연유다. 하지만 상황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 중앙은행은 경기부양을 위해 저금리 정책으로 시중에 엄청난 양의 돈을 풀었다. 2010년부터 올해 8월까지 미국의 M2는 무려 약 120% 증가했고, 한국은 약 90% 증가했다. 여기에 최근 코로나19로 얼어붙은 경기를 부양시키기 위해 ‘전시 재정’ 수준으로 정부 지출을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직접적으로 전시 재정 편성을 각오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통화 팽창과 ‘전시 재정’, 그리고 팬데믹까지-1920-21년 불황 이전의 상황과 상당히 흡사하다.

1920년 ‘잊혀진 불황’의 사례는 코로나19 시대의 경제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한다. 먼저, 작금의 경제 둔화 현상은 코로나19로 ‘가시화’된 경기 침체의 전조 증상일 뿐이기 때문에, 역병 자체가 불황의 원인은 아니다. 스페인 독감을 1920년 불황의 본질적 원인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코로나19와 같은 실물 측면의 요인은 저축의 양을 감소시키거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악화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붐-버스트 사이클과는 무관하다. 그보다는 최근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이 전례 없는 규모로 확장적 통화정책을 실시해 자산 가격이 오르고 있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실물 경제가 뒷받침하지 않는 자산 가격의 거품이 꺼지면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년 가까이 시민들을 괴롭혔던 대공황의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1920-21년의 ‘잊혀 진 불황’에서 배워야 한다. 정부의 통화 정책으로 왜곡된 생산 구조를 과감히 청산하여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의 기틀을 다져야 하고, 신산한 조정 과정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경제 전반에 걸친 경직적 장치들을 제거해야 한다. 세금을 거둬 공공일자리를 만들고 신산업을 정부가 육성하고 각종 규제를 통해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키우겠다는, 소위 ‘한국판 뉴딜’은 시민들의 고통을 장기적으로 가중시킬 뿐이다.

조범수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부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