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서거] 김영삼 전 대통령, 민주화 헌신 VS 외환위기 초래

박선옥 기자
입력일 2015-11-22 16:22 수정일 2015-11-22 18:03 발행일 2015-11-23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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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김현철 씨를 위로하고 있다.(연합)

22일 서거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공과(功過)는 어떤 역대 대통령보다 뚜렷하게 갈린다.

평생을 민주화에 헌신한 김 전 대통령은 32년간의 군사정권을 끝내고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뒤 군부사조직인 하나회를 청산하고 금융·부동산실명제를 도입하는 등 과감한 개혁 정치를 펼치는 등의 성과를 냈다. 하지만 임기 후반 한보그룹 파산을 계기로 중견 재벌의 도산이 잇따랐지만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시장 개방 정책을 추진하다 외환위기를 초래했다. 아들 현철 씨의 비리 연루도 오점으로 지적된다.

◇문민정부 출범…개혁 드라이브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이어진 군부 정권에 마침표를 찍기까지 그는 평생을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바람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원한 동지이면서 라이벌인 관계를 형성했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선 결과는 총재 직무 강제 정지와 의원직 제명이었다.

1980년 사실상의 강제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에도 두 차례 장기간 연금되면서 시련을 겪었다. 1983년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최근에야 최장기 기록이 깨진 이 단식 기록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정치권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1990년 1월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을 합당하며 ‘승부사’ 기질을 보여줬다. 이후 1992년 대권까지 거머쥔 김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임을 내세워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군사조직인 하나회부터 숙청했다. 또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도 진행했다.

무엇보다 금융·부동산 양대 실명제를 이룩해 부패 차단과 과세 형평성을 확보했다. 대외적으로는 적극적 시장개방을 시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급격한 세계화로 외환위기 초래

샴페인을 터트렸던 OECD 가입은 불과 1년 만에 부도라는 부메랑으로 다가왔다. 야당에서 외화출자 및 개도국 지원 등 의무 사항이 많은 점을 들어 ‘시기상조’라는 지적을 했던 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을 계기로 경제개혁·개방 정책에 피치를 올렸지만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4월 삼미그룹, 7월 기아자동차가 쓰러졌다. 이 외에도 쌍방울, 해태, 고려증권, 한라그룹 등이 위기를 맞았다.

1997년 한 해에만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이 30조원을 넘었고, 해외 금융기관의 부채 상환 요구에 외환보유액이 바닥이 나자 김영삼 정부는 그 해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 선언을 가까스로 면했다.

이런 와중에 차남 현철 씨가 한보비리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현철 씨에 대한 첩보가 계속 보고됐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이를 가볍게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선옥 기자 pso9820@viva100.com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