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티브 시니어] 어머니는 '행복의 에너지'

임병량 명예기자
입력일 2024-01-04 14:11 수정일 2024-01-04 14:11 발행일 2024-01-05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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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칼럼>
임병량 명예기자
임병량 명예기자

일본 여행 중 저녁 늦은 시간 노천탕에서 바라본 보름달은 유난히 밝았다. 고개를 우측으로 쳐다보면서 별들의 속삭임에 끼어들었다.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마당에 누워 별을 세다가 잠들어 버렸던 그 별들이다. 우리 곁을 떠난 지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그립다.

장례식장에서 “자네 부모님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야, 심덕(心德)이 좋아 자식들이 잘된 거야”라면서 내 손을 꼭 잡아준 고향 할머니가 생각난다. 내년이면 백세인데도 말에 힘이 있고 건강해 보였다. 모처럼 어머니 이야기꽃에 몰입하여 흩어졌던 기억을 정리했다.

‘당신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오 남매를 잘 키웠다’는 칭송이 귓전에 맴돈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잡았던 손을 풀어줬다. 짧은 시간의 소통이었지만, 어머니의 사랑이 마음을 채웠다.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준 할머니가 마지막이란 불길한 생각이 들어 셀카에 담았다. 그분은 나의 재산보증인 일호다. 금융기관에 입사하면 재산보증인이 필수다. 지금은 보험회사에서 처리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일정한 재산소유자만이 보증인이 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내게 재산을 맡긴 거와 다름없는 법률행위다. 가까운 일가친척도 두꺼운 방어벽으로 경계하는 제도다. 그분의 배려가 없었다면 회사도 포기해야 할 운명이었지만, 흔쾌히 승낙해 준 점은 부모님과 형님들의 신뢰 때문이었으리라.

어머니는 차멀미가 무척 심했다. 그래서 차타는 일은 포기하고 살았다. 여행 가는 일은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하셨을 것이다. 어쩌다 차를 타면 심한 고통으로 며칠간 앓아누워야 회복될 수 있었다. 길을 가다가 버스나 트럭이 지나가기만 해도 멀미를 할 정도다. 찻길을 건너야 전답이 있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휴일이 되면 가끔 찾아뵙지만, 세월이 갈수록 횟수가 줄어들었다. 가끔 치아 이야기를 하셨지만, 바쁜 일정 속에 지나쳐 버렸다. 내가 아파보니 알겠더라. 웬만해서 아프다고 말씀할 분이 아니었다. 치아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어도 외면했으니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왜 그때 치아를 못 해 드렸을까?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부끄럽고 후회스럽기 그지없다.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눈물샘이 먼저 신호를 보낸다. 어머니는 나의 첫 출발점이자 둥지였다. 나이가 들었어도 어머니는 항상 그립다.

새벽에 일어나 부뚜막에 정화수를 떠 놓고 간절함을 담아 기도하는 마음 그때는 몰랐다. 항상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고 건강과 평안을 위한 소원이었으리라. 그 기도에 힘 받아 형제들은 모두 자수성가했다. 막냇손자가 이번에 서울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온 가족이 기뻐했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왔지만, 당신의 정성과 기도는 활짝 핀 꽃송이가 되었다. 그 꽃의 향기가 후손과 이웃까지 전해지고 있다.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이란 걸 새기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병량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