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밀로스의 대화, 설득의 두 가지 차원

정보철 이니야 대표 기자
입력일 2016-06-26 15:59 수정일 2016-06-26 16:01 발행일 2016-06-27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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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철 이니야 대표

설득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차원이 있다. 하나는 자발적 설득이다. 자발적 설득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울림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 법정스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사람들이 손쉽게 설득을 당한다. 기원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언행은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진정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유쾌한 설득이다.

반면 강압적 설득이 있다. 이 경우 주로 권력과 돈의 논리가 설득의 무기이다. 강압적 설득의 부정적 사례는 굴복이다. 굴복은 증오와 보복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거의 모든 사건들이 강압적 설득에서 비롯된 것이다. ‘회유와 협박’으로 회자되는 강압적 설득 역시 설득의 한 종류이다. 이것 역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인 것만은 사실이다.

허나 마지못해 인정하는 설득은 생명력이 짧다는 게 문제이다. 수천 년은커녕 단 1~2년도 못 버티고 무너지는 게 수두룩하다. 당연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울림도 제한돼 있다.

자발적과 강압적 사이에는 거센 강이 흐른다. 그것은 후유증을 낳는 강이다. 부정적인 후유증은 갈등을 낳고, 증오를 부채질한다.

사람들은 그런데 그 강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지 않는다. 아니 가늠할 역량도 없고, 가늠할 생각도 없다. 대신에 상대방을 욱박지르는 데 총력을 기울일 따름이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진정한 자신의 힘인 양 착각한다. 설득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 역사에 ‘밀로스의 대화’라는 이야기가 있다. ‘정의는 강대국의 정의일 뿐’이라는 명제를 제시한 대화로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온다. 밀로스는 에게해에 있는 섬이다. 아테네에 비해 군사적으로 취약했다. 아테네는 펠레폰네소스 전쟁 중 중립을 지키는 밀로스를 압박, 자신들의 편에 서기를 원했다.

아테네의 사절이 밀로스를 설득했다. “국가 간의 정의는 동등한 힘을 필요로 한다. 동등한 힘이 없는 곳에는 정의가 없다. 강대국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고 약소국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강대국의 싸움에 휩싸이기를 원치 않던 밀로스는 대답한다. “정의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강대국이란 없다. 정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아테네는 언젠가 이 지구상에 정의를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보복 받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밀로스는 끝까지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중립을 지키면서 우호적인 관계로 남기를 원했다. 아테네는 결국 설득을 포기하고, 밀로스를 침공, 굴복시켰다.

역사는 여기까지 기술돼 있다. 허나 역사는 이것으로 끝났을까? 그릴 리가 없다. 밀로스와 전쟁에서 아테네도 타격을 입은 것이 문제가 됐다. 밀로스 침공으로 군사력에 구멍이 뚫린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무너지고 말았다. 아테네는 밀로스를 굴복시켰지만, 이로 인해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굴복 당했다. 강압적 설득의 부정적인 대표적 사례이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 유쾌한 설득은 보이지 않고, 강압적 설득이 난무하는 현상을 보면서 밀로스의 대화를 떠올려봤다.

정보철 이니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