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국가재정 좀먹는 유령 석유대리점

양진형 한국석유유통협회 상무
입력일 2016-03-02 14:54 수정일 2016-03-02 16:37 발행일 2016-03-02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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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형 한국석유유통협회 상무
양진형 한국석유유통협회 상무

국내 석유시장이 자유화된 지 20년이 되어간다. 정부의 규제와 보호 아래 있던 석유시장은 1997년을 기점으로 완전 자유화됐다. 주유소 거리제한 철폐와 석유수출입업 자유화 등 변화가 있었다. 그 결과 유가인하와 석유제품을 효자수출 품목으로 만드는 등 큰 공헌을 했지만 무분별한 규제완화로 석유유통 질서가 일부 흐트러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석유대리점업은 당초에는 저장시설과 수송장비를 갖추어야 하는 허가제였으나, 유가자유화로 이러한 시설에 대해 임대차 계약서만 있으면 되는 등록제로 바뀌었다. 이렇게 진입이 쉬어지면서 1999년 90개에 불과했던 대리점 수는 2000년 150개, 2015년 410개로 급증했다. 문제는 신규 진입한 대리점의 상당수가 유령 석유대리점이라는 것이다. 현재 대리점 등록 요건인 저장시설 700㎘와 수송장비 50㎘를 임차해 사용할 경우, 월 200만~300만원의 비용이 발생하지만 유령 석유대리점들은 임대차 계약서를 가짜로 만들어 대리점 등록을 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의 저장시설에 다수의 임차계약서가 작성돼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를 확인해 걸러낼 방법이 없다. 대리점 등록·변경에 관한 권한은 전국 광역지자체가 맡고 있는데 인력이 부족해 법적 구비 서류가 제대로 갖춰 있는지에만 초점을 둬 업무를 처리할 뿐, 계약서가 실제인지 현장실사를 나갈 엄두를 못 낸다. 이러다 보니 사무실은 물론, 직원도 없이 전화기 한 대로 영업을 하는 유령대리점들이 각종 불법·탈법을 일삼는다. 이른 바 자료상(가짜 세금계산서 발행) 역할을 하며 부가가치세를 탈루하거나, 주유소에 제품을 납품하기로 하고 대금을 먼저 받은 상태에서 실제 물건을 지급하지 않아 부당이득을 취하고, 무자료 기름 등을 일반 기름으로 속인 채 주유소에 공급해 세금을 가로채는 수법을 쓰기도 한다. 2012년 자원경제학회 연구용역에 따르면 이들로 인한 탈세 추정액은 연간 5400억 원에 달한다. 해마다 수천억 원에 이르는 국가 세수가 탈루되고, 석유유통 질서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저장시설을 단기로 임차해 탈세 후 종적을 감추거나 폐업 후 명의만 변경해 재 영업을 하는 등 치고 빠지는 식의 불법을 자행하지만 국세청 등 정부의 대처는 더디기만 하다. ‘열 명의 포졸이 작정한 도둑 하나 못 잡는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지난해 3월, 급기야 정부는 이러한 유령대리점의 적폐를 없애기 위해 대리점 등록요건 중 저장시설의 일부(50% 이상)를 자가 소유하는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이 법이 제대로 입법화되면, 불법탈법의 주범인 유령대리점들이 퇴출돼 국가 재정의 건전성과 석유시장의 유통질서 확립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 현재 낮잠을 자고 있다. 법안이 예고되자, 전국의 유령 대리점업자들이 지자체 담당공무원 및 국회 등에 기존 업자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규제강화’라며 반대 목소리를 조직적으로 내는 바람에 정부가 주춤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법은 규제 측면보다는 개정 의도에 부합하게 가짜·탈세석유 차단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대리점 등록 요건 강화는 국가 재정의 건전성 확보와 석유 유통질서 확립 차원에서 반드시 입법화돼야 한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이 ‘규제 완화’인 만큼, 가짜·탈세석유 차단으로 인한 공익적 이익을 부각하면서도 규제는 최소화 하는 ‘규제 최소화’ 방안을 제시하면 된다. 그 방안이 바로 신규 등록업자부터 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기존 대리점 등록업자까지 소급하게 되면, 이들까지 반발에 가세하여 법안의 입법화는 더욱 요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입법화를 주춤하는 사이, 사기·탈세·먹튀의 유령대리점들은 오늘도 버젓이 활개를 치며 국가재정과 석유 유통시장을 유린하고 있다. 

양진형 한국석유유통협회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