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중에 인품이 참으로 훌륭한 분이 있다. 온화하고 합리적이고 마음이 따뜻한 분이다. 물론 불필요한 말이나 괜한 자기 자랑도 없을뿐더러, 재미 삼아 남의 얘기를 하거나 옮기지도 않는다. 말수가 적고 우스갯소리 같은 농담도 잘 안 한다. 그러나 고민도 잘 들어주고 함께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늘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새삼 나 자신의 됨됨이와 행동을 돌아보며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겠다는 반성과 더불어 나름의 긴장감도 든다.
말수가 적은 그분이 평소 남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그 하나는 ‘고맙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애썼다’는 말이다. 자판기 커피 한 잔을 사도 고맙다고 하고, 좀 나누고 싶은 게 있어 여쭤보면 물어봐 줘 고맙다고 한다. 일이 바빠 연락이 뜸했다고 오랜만에 연락하게 되면 열심히 사느라 애쓴다고, 건강 잘 챙기라고 한다.
‘고맙다’, ‘애썼다’ 외에도 가끔 양념처럼 쓰는 말이 있다. 바로 ‘형편대로’라는 말이다. 형편(形便)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이 되어 가는 상태나 경로 또는 결과’, 그리고 ‘살림살이의 형세’라는 뜻이 나온다.
첫 번째 뜻으로 보면,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이 어떤지 궁금하다” 등과 같이 일이 되어 가는 상태 등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고, 두 번째 뜻은 살림살이의 형세, 즉 “형편이 안 좋다”든가 “형편이 어렵다”처럼 사용을 할 수가 있다. 지인이 자주 쓰는 ‘형편대로’는 두 번째 의미로 보인다. 내 살림살이 형편대로 하자는 말일 게다. 분수에 맞지 않게 남의 눈을 의식하고 따라 하다 보면 그야말로 형편에 맞지 않는 일들을 할 수도 있으니 무리하지 말고 그저 내 형편에 맞추어 예의를 지키며 살자는 의미이겠다.
형편대로 산다면 매사에 별 무리가 없다. 어찌 보면 ‘애쓴다’라는 말과는 다소 상반된 의미일 수도 있겠다. ‘애쓴다’라는 말은 마음과 힘을 다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힘쓴다는 의미이니, 노력과 수고로움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에 다 맞는 것은 아니겠으나 애를 써서 될 일이 있고, 그저 형편에 맞추는 것이 오히려 나은 일이 있으니, 어찌 보면 상황마다의 판단은 본인의 몫일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내 형편을 잘 파악해야 하겠고, 상황마다 적절한 판단이 가능해야 하니, 통합적 사고가 필요해 보인다.
아무튼 이 ‘형편대로’라는 말은 어느 상황에서도 쓸 수 있는 만능언어이다. 물가도 많이 오른데다가 월급은 늘 그 수준이다 보니 살림살이 역시 늘 고만고만하다. 코로나로 미뤄진 경조사 소식이 몰리는 달이면, 뻔한 살림에 일일이 다 챙기고 인사하며 살기가 녹녹지 않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개인적으로 아주 가깝진 않아도 모르는 척하기 애매한 지인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주 가까운 지인이 병을 얻었다. 안타까운 마음은 크지만,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니 속상하다. 형편껏 되는대로 도움을 드리기로 했다. 매사 이렇게 형편대로 살면 힘든 시기도 그럭저럭 지혜롭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본인의 형편을 알고, 나아가 상대의 형편을 헤아리려 노력하다 보면, 그다지 이해 못 할 일도 많지 않고, 섭섭할 일도 적어진다. 고맙다, 애썼다는 말과 함께 늘 형편대로 살자는 지인께 감사하다. 스승은 늘 내 주변에 있다.
오세준 평택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