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티브 시니어] 왕의 자리 빼앗긴 조선 폭군… 왕릉 아닌 '묘'에 잠들었네

정운일 명예기자
입력일 2022-04-14 15:55 수정일 2022-04-14 15:57 발행일 2022-04-15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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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탐방> 연산군 묘정
연산군 청명 제향장면
서울 도봉구 방학동 연산군 묘정에서 제 516 주기 연산군 청명제향이 거행되었다.(사진제공=도봉구)

청명일인 지난 5일 서울 도봉구 방학동 연산군 묘정에서 문화재청이 주최하고, 연산숭모회가 주관한 제 516 주기 연산군 청명제향이 거행되었다.

이동진 구청장을 비롯, 문화원장, 연산숭모회장,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이사장, 연산 숭모회원, 구청 및 문화원 관계자, 주민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제관은 천담복을 입고 재실에서 묘정까지 축함을 모시고 입정행렬을 한 후 연산숭모회장 인사말에 이어 초헌관에 이동진 구청장, 아헌관에 신장재 거창신씨 참판공회장, 종헌관에 구봉회 능성구씨 능양위 종중 부회장, 대축에 이종국 본원 전례위원, 찬자는 이정구 연산주숭모회원이 맡아 진행하였다.

조선 역사상 가장 불행한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반정으로 쫓겨나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왕릉이 아닌 묘로 기록되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않고 국가사적 제362호 지정되었다.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성종의 첫째 아들이다. 성종 14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19세의 나이로 조선 10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506년(중종 1년) 9월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군 교동에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2개월 만에 병사하여 강화에 장사지냈다.

6년이 지난 후 폐비 신씨는 당시 교통이 불편하여 남편 묘소참배가 어려워 중종에게 “유골이라도 가까이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중종은 소원대로 들어주고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개장하라고 지시하여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왕자군의 예로 장례하여 곡장 표석 상석 장명등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제실 등을 갖추고 있고 분묘는 연산군과 부인 거창군신씨 쌍분으로 되어있다.

정운일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