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티브 시니어] 눈높이를 낮추는 지혜

손현석 명예기자
입력일 2022-03-31 14:45 수정일 2022-03-31 14:46 발행일 2022-04-01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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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석기자
손현석 명예기자

등산을 가면 꼭 정상을 밟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산 아래의 풍경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정상을 정복했다는 만족감이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상에서 잠시 머문 후에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곧바로 하산해야 한다.

사람의 인생은 등산과 같다. 젊을 때는 성공이라는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올라가지만, 막상 나이가 들면 자기가 차지하고 있던 좋은 자리를 놓아두고, 내려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번 내려오면 다시는 그와 같은 자리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젊은 시절 높은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고 해도 나이 들어서 똑같은 산에 올라가기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나이 들어 직장을 퇴직한 사람들이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이 들어 새 출발을 하려면 언제나 자기 눈높이부터 낮춰야 한다.

우리나라 3대 증권회사 중 하나인 모 증권회사에서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분이 있다. 이 분은 직장에 다니는 동안 회사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3년 주기로 교체되는 지점장을 9년이나 연속 맡아 본 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IMF 사태를 맞았을 때 회사마다 직원을 감소해야 했다. 그때 그는 자기가 가장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스스로 명예퇴직해서 회사를 나왔다. 회사를 떠나면서도 그는 자기 정도면 어느 회사라도 곧바로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를 기다리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그때 그는 미련하게 더 좋은 자리를 고집하지 않았다. 자기 눈높이를 크게 낮추고 이전보다 규모도 작고, 급여도 작은 회사를 선택해서 입사했다. 만일 그가 자기 눈높이를 낮추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면 그는 다시는 일할 곳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회사에서 정년을 채운 그는 퇴직 후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 눈높이를 낮춰 서울에 있는 한 빌딩 관리인으로 지원해서 또 취업하게 됐다. 그곳에서는 70세가 넘도록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나이 많은 그는 더는 일할 곳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건강해서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더 눈을 낮춰 이번에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지원했다.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경비원으로 지원한 그를 회사에서 좋게 보고 채용했다.

그는 70대 중반까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퇴직했다. 그의 가족들은 이제 일을 그만하고 쉬라고 하는 데도 그는 또 눈높이를 낮춰 이번에는 초등학교에서 모집하는 시간제 아동 돌보미로 취업을 해서 하루 중 반나절을 여전히 일하고 있다.

그가 일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남보다 특별히 돈 쓸 곳이 많아서도 아니다. 그가 일하는 것은 자신의 굳은 신념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있는데도 일을 안 하는 것은 삶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눈높이를 낮출 줄 몰랐다면 그의 신념은 그냥 신념으로만 끝났을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등산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자기가 오르지 못할 높은 산을 바라보지 말고 자기 눈높이를 낮춰 자기가 오를 수 있는 곳까지만 오르면 된다. 이것이 바로 나이 든 사람이 가져야 할 지혜다.

손현석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