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공약의 이원화가 필요하다

박봉규 2022 세계가스총회 조직위원장
입력일 2022-02-14 15:01 수정일 2022-04-08 16:20 발행일 2022-02-1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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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규 2022 세계가스총회 조직위원장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지배층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동안 백성들 위에 군림하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양 큰소리쳤으나 외부의 적을 맞으면서 국가경영능력이 형편없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대할 면목도 없고 과거처럼 자신들을 존경하고 따르라 강요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그렇다고 지배 권력을 내놓고 뒤로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주자학의 교리로 백성들의 삶을 더 단단히 옭아매는 것이었다. 초기 유학의 순수성이 제거되고 교조화된 조선 성리학은 백성들의 생각을 통제해 시대가 요구하던 다양성과 창의성을 억압해 나갔다. 스스로 박제된 이념의 틀에 갇혀 중국과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사상은 사문난적으로, 신문물은 오랑캐들의 것으로 몰았다. 결국 자신들의 기득권은 유지했으나 나라는 멸망으로 이어졌다.

혼란의 시기나 과도기에는 이념이 득세하기 마련이다. 이념이란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외를 제거하고 단순화한 것이므로 이에 바탕을 둔 논리나 해법은 명쾌하고 듣는 사람 귀에 솔깃하다. 편협함으로 무장해 스스로 용감하다. 바깥 세상은 선각자인 내가 가르쳐야 할 대상이요, 바꿔야 할 상대가 된다. 이념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방향을 잃고 만다. 나가야 할 좌표가 명확하면 앞으로 내달릴 희망과 동력을 얻을 수 있다. 당장은 불가능해 보여도 결국 꿈꾸던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선거의 계절을 맞아 이념에 바탕을 둔 무책임한 공약이 다시금 극성을 부리고 있다. 미중 관계를 둘러싼 대외정책이나 세대간, 젠더간 갈라치기 공약이 예이다. 선거가 후보자의 이념과 정책을 국민들에게 호소해 선택받는 수단이요, 그것이 진영을 결집시키는 데는 좋은 수단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우리의 삶은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다.

공약 실천은 단순명쾌하게 처리하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지나치게 이념만을 앞세우다가는 프랑스혁명 후처럼 오히려 혼란을 초래하거나 나치즘과 공산주의처럼 국민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가까이는 최저임금 만원이나 비정규직 제로 공약처럼 자칫 공약에 발목이 잡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한편 이념과잉 공약의 반대편에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아예 팽개친 포퓰리즘 공약도 넘쳐난다. 도를 더해가는 복지공약이나 무분별한 지역공약이다. 표만 준다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단다. 실현가능성이나 예산제약은 무시된다. 당선이 중요하겠지만, 자신이 왜 정치를 하는지에 대한 목적의식을 방기하는 것이요, 실현되지 못할 공약을 통해 결국에는 정치에 대한 불신만 가중시킬 뿐이다.

지금이라도 공약을 이념에 바탕을 둔 장기정책방향과 현실을 감안한 단기 대책으로 이원화해 제시하면 어떨까. 미래를 위해 반드시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장기 비전으로 제시하되 이를 달성하는 수단은 임기 중 실천 가능한 단계적 접근법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장기비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밝히되 스스로의 공약에 발목이 잡히는 우를 피할 수 있고, 우선 추진할 일의 목록을 통해 국민들의 과도한 기대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적 변화가 없는 아쉬움은 있더라도 정확한 방향이 제시되고 작은 성과들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 듯 우리가 그리던 미래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박봉규 2022 세계가스총회 조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