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정치인과 리플리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
입력일 2021-09-12 15:22 수정일 2021-09-12 15:25 발행일 2021-09-13 19면
인쇄아이콘
20210809010002062_1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

정치인이 성공가도를 달릴 때 그들은 말이 별로 없다. 그런데 국민권익위원회가 국회의원 부동산 전수조사의 결과가 발표된 지금은 꽤 자주 기자회견을 갖는다. 상황이 잘 풀릴 때에는 ‘과장’을 할 필요가 없다. 과장이 필요한 경우는 대부분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다.

범죄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 인질의 의식을 흐리게 해 비밀을 캐내려고 악당이 약물을 주사한다. 그런데 대개 이 악당은 약물을 주사하기 전 약물의 효능에 대해 인질에게 구구절절 설명해준다. 이 비현실적인 설명 장면은 웬만한 관객에게는 불필요한 대목이다. 설명 없이 인질에게 주사를 놓아도 전체 문맥상 관객들은 무슨 상황인지 알아챌 수 있다. 설명 장면을 충분히 넣으면 이해는 쉽지만 영화가 느슨하고 사실감도 떨어져 결국 팬들의 외면받는다.

넥스트(NeXT) 컴퓨터만큼 과장된 포장을 한 기업은 없었다. 스티브 잡스는 텔레비전 뉴스는 물론 주요 출판물의 표지를 장악했다. 캐논과 IBM, 미국의 사업가이자 1992년과 1996년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로스 페로는 1억3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기자회견 참석을 원하는 언론사는 넘쳐났고 스티브 잡스는 행사장 규모가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었음에도 입장권을 미리 찍어야 했다. 좌석은 남는 자리 하나 없이 꽉 들어찼다. 그렇게 넥스트는 언론에서 승자가 됐지만 경영에서는 승자가 될 수 없었다.

캐나다 9개주에 200개가 넘는 프랜차이즈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대형 할인 슈퍼마켓 노프릴스(No Frills)는 신문의 1면을 심심찮게 장식한다. 신문은 식료품 분야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것이라고 보도한다. 하지만 동네 슈퍼마켓과 큰 차이는 없다.

부정에 연루된 정치인, 구구절절 설명하는 영화, 넥스트와 노프릴스의 행동 배경에는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이 있다. ‘리플리’는 미국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55년에 쓴 소설 ‘태양은 가득히’에 등장하는 주인공 ‘리플리’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오늘날 SNS에 과장된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리플리다. 일상적이지 않은 비싼 물건, 멋진 장소들을 거짓으로 올려 실제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세한다. 허상 속 자신의 이야기 집필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스토리는 점점 정교해진다. 거짓을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꾸미고 스스로도 그 거짓말을 완전한 진실로 믿어버린다. 거짓말은 다른 사람들을 속여 자신이 얻게 되는 이득을 목적으로 반복적으로 행하는 심리적 불안감을 야기하는 반면 리플리 증후군은 자신의 불합리한 상황을 부정하고 자신이 만든 허구를 진실인 것처럼 믿게 되는 정신적 증상이다. 리플리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들은 과도한 성취감, 열등감, 지나친 자아 존중감이 내면에 항상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만의 허구 세계를 창조해 그 환상 속에서 본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해온 신분, 계급, 능력을 만들어 내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누가 뭐래도 과장은 과장일 뿐이다. 진정성 있는 사람이나 기업은 시끌벅적한 고적대를 동원해가며 혹은 8시 저녁뉴스의 첫 머리기사로 찾아오지 않는다.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 우리 곁에 고즈넉하게 다가올 뿐이다.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