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이재경 건국대 교수/변호사
입력일 2021-08-12 14:06 수정일 2021-08-12 14:11 발행일 2021-08-1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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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젠더갈등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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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경 건국대 교수/변호사

올림픽 정신은 실종 상태였다. 대권후보들 사이의 정쟁은 도를 넘었다. 도쿄올림픽 여자양궁 국가대표 선수 안산의 ‘페미(페미니스트)’ 논란과 윤석열 대권 후보의 배우자 관련 ‘쥴리 벽화’ 사건은 우리나라 여성인권, 양성평등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35도를 넘나드는 폭염보다 더 뜨겁게 온 나라를 달구었던 논쟁에 ‘대한민국 페미니즘’은 도마 위에 올랐다. 심지어 BBC 등 외국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나라 망신살까지 뻗쳤다.

많은 이들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태생적으로 관종 답게 “이때다” 싶은 정치인들부터 연예인 등까지 안산, 줄리를 물고 늘어졌다. 안산 선수를 응원하거나 근거없는 줄리 소문을 일축하는 목소리가 대다수였지만 진영논리 또는 아집에 빠져 뜨거운 감자를 더 뜨겁게 만드는 경우도 적잖았다. 과거 페미 용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안산 선수에 대한 응원을 거부하는 목소리도 들렸고 줄리 벽화를 향한 선택적 성평등 문제가 제기됐다. 한 목소리로 응원해야 할 우리 국가대표 선수에게 퍼붓는 페미 비난은 과거 찾아볼 수 없었다. 급기야 안산 선수의 쇼트커트 스타일까지 비난하는 모습은 이땅 젠더갈등의 현실이다. 대권 후보 본인도 아닌 그 배우자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적나라하게 풍자하는 상황도 처음 겪는 일이다.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나 남혐사이트, 친 여권 또는 반 정권 성향의 각종 미디어가 난무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다.
언젠가부터 폐지론에 휩싸여 있는 여성가족부는 뒤늦게 “최근 스포츠, 정치 영역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성 혐오적 표현이나 인권 침해적 행위가 있어서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전형적인 뒷북행정, 상투적인 체면치레일 뿐이다. 젠더갈등은 몇몇 관계부처가 짊어질 성질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상식을 상실한 한국 정치에 가장 큰 책임을 돌려야 한다. 이 땅의 남녀들이 서로 사랑, 존중하지 못하도록 만든 장본인은 여야를 막론하고 3류급에도 못미치는 정치인들이다. 인권의 가치보다는 정치적 계산이 앞섰기 때문에 젠더갈등이 터져나왔다. 정치인들이 연루된 성폭력 사건들이 우수수 발생하면서 남녀 마저 갈라치기의 대상이 된 것이다. 
‘N번방’류 사건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젠더갈등, 여성 경시라는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쳐야 한다. 안산 선수에게 사과·보상하거나 쥴리 벽화를 흰색 페인트로 덧칠한다고 봉합될 문제가 아니다. 여성인권 운동이 더 이상 정치적 논리에 따라 선택적으로 흔들려서는 안된다. 인권 앞에서는 모두 같은 목소리로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벌하되 남성에 대한 역차별, 불만을 점차 줄여가면서 젠더갈등을 풀어나가야 한다.
여성인권, 젠더갈등 문제는 정책 및 사회적 영역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치게 정치나 정부권력에 의존해 접근해왔다. 이제 정치적, 사회적 셈법을 잠시 내려놓자. 차라리 문화적 감수성에 비중을 두고 젠더갈등을 풀어가면 어떨까? ‘82년생 김지영’처럼 여성인권을 다룬 소설, 영화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소 편향적이고 파급력도 미미했다. 남녀갈등 상황을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바라보는 문화예술작품들이 다양하게 나와서 더 풍부한 담론을 포용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예술을 통해 모두 공감하는 젠더갈등의 해결 방향을 찾아야 한다. 여성예술인의 음악축제, 미술제 등도 보다 활성화시켜 더 많이 더 깊이 교감하자. 2021년 여성인권은 결코 정쟁의 소재로 삼을 수 없다. 양성평등 역시 흥정 대상이 아니다.
이재경 건국대 교수/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