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작당의 힘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입력일 2021-07-28 17:00 수정일 2021-07-28 17:00 발행일 2021-07-2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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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작당(作黨). 무리를 이룬다는 뜻이다.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로 잘 쓰인다. 워낙 끼리끼리 뭉쳐 민폐와 박탈을 불러오는 일이 잦은 한국사회의 단면이다. 다만 말뜻은 가치중립적이다. 굳이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갈수록 연(緣)이 약화되고 개인주의가 판친다는 점에서 되레 한뜻으로 뭉친다는 작당의 동기·유인은 바람직할 수도 있다. 가벼운 모임이든 큰뜻의 네트워크든 작당 자체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특히 고령화를 떠올리면 설명력은 더 높다. 베이비부머 등 거대인구의 은퇴적 단절현상이 심화되며 소외·고립·배제의 무연(無緣)호소가 사회문제로 부각되는 까닭이다.

퇴직(退職). 일에서 물러남을 뜻한다. 역시 슬프고 안타까운 의미 탓에 부정적이다. 무탈히 정해진 연령까지 일했기에 축하할 일이나 속내는 복잡하고 착잡하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던진 파장 탓이다. 돈과 직결돼 더 그렇다. 농경기반의 전통사회에선 없던 일이다. 일할 능력·의지가 중요했지 나이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지금은 일로부터의 연령도달형 은퇴가 상식인 시대다. 얼추 ±50세면 퇴장압박은 구체화된다. 화이트컬러에 최초직장이면 잘 버텨도 50세 중반이다. 반면 평균수명은 83세에 달한다. 길게는 30년을 뒷방퇴물·잉여신세로 살아야 할 판이다. 수명도 계속 는다.

돈이 넉넉하면 좀 낫다. 자본주의답게 귀신조차 부린다는 돈이니 못할 건 없다. 사람과의 관계조차 손쉽게 구매된다. 다만 근원대책은 아니다. 거래된 유연(有緣)은 효용이 끝나면 곧 휘발된다. ‘가족 vs. 타인’의 거리는 돈으로 좁혀지지 않는다. 애정·신뢰가 정한다. 아쉬운 건 은퇴생활자 중 태반은 돈조차 넉넉잖다는 점이다. 먹고살기조차 만만찮은 판에 무연화를 깰 작당여력은 사치에 가깝다. 눈앞의 의식주(醫食住) 앞에서 지불대상의 우선순위로는 밀릴 수밖에 없다. 무관계, 무연의 일상화다. 돈으로도 풀 수 없는 일로부터의 단절이라는 딜레마는 노후품질을 위협할 수밖에 없다.

해서 작당이 필요하다. 가성비 좋은 작당은 고립을 풀어줄 꽤 괜찮은 카드다. 관계구매를 위한 값비싼 방식은 곤란하다. 쉽게 말해 친구 사귀기인데, 단순한 추억공유형의 단발만남을 넘어 일상을 공유할 뭔가의 뚜렷한 목적·활동성을 세워 조직화하는 식이다. 경로당처럼 각개식의 소일형 타임킬링이 아닌 특정취지에 동의한 이들끼리 차별적인 모임을 만들면 의미·지속성은 한층 보강된다. 가령 맘 맞는 퇴직자 몇몇이 갹출해 오피스텔을 빌려 마치 직장인처럼 출퇴근하는 루틴을 만드는 게 그렇다. 그러다보면 일도, 돈도 생기는 일석이조의 시나리오가 실현될 수도 있다. 처음부터 거창할 이유는 없다. ‘이슈공유→외부활동→조직설립’처럼 물 흐르듯 내맡기면 충분하다.

이쯤에서 재미난 일본소설을 하나 보자. 2명의 정년퇴직자가 동네도서관에서 결성한, 이름하여 ‘극락컴퍼니’다. 일종의 직장놀이를 다룬 픽션이다. 둘은 퇴직생활의 답답함을 토로하며 의기투합했다. 회사로 정해놓은 다방에 출근하며, 나름대로 사칙을 정하고 사업분야·계획·전략까지 만든다. 야근까지 하며 설립과정에 휘몰리자 일을 함께 할 직원도 뽑는다. 전봇대에 모집공고를 내자 다방전화는 불이 난다. 면접당일은 후보자로 장사진이다. 회비를 내지만, 100명 넘는 퇴직자가 초기멤버로 채용된다. 이후는 상상영역이다. 중요한 건 그만큼 비슷한 생각을 하던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다. 1998년 출간됐는데, 아직도 회자될만큼 시대욕구를 꿰뚫었다는 평가다. 일부언론은 극락컴퍼니를 현실판 고령자 복지사업으로 최고라며, 그들의 작당가치에 주목하자고 했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