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프레젠테이션과 선구안

김시래 동국대 겸임교수, 한국광고총연합회 전문위원
입력일 2021-05-31 14:58 수정일 2021-05-31 15:00 발행일 2021-06-0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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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래 동국대 겸임교수, 한국광고총연합회 전문위원

야구에서 타자가 안타나 홈런을 날리려면 날카롭고 힘찬 스윙 말고도 필요한 게 있다.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을 고르는 선구안이다. 프레젠테이션도 마찬가지다. 의사결정권자의 취향이나 기호를 파악하는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판을 벌인 배경을 파악하는 일이다. 왜 이런 프레젠테이션이 열렸는지 상대의 의도를 짚어내야 한다. 프레젠테이션에 참여할지 포기할지에 대한 결정과 어떤 내용으로 구성할지, 누구를 집중적으로 설득할지도 여기에 달려 있다.

따져 보자. 훌륭한 아이디어가 필요해서 벌어진 진검승부라면 내용에 집중하면 된다. ‘잘해도 내 탓, 못해도 내 탓’이라 받아 든 성적표에 억울할 일이 없다. 그러나 비즈니스의 현장엔 표정을 알 수 없는 변칙적인 게이머들이 곳곳에 도사린다. 그런 자들이 번거로운 절차와 시간을 들여 판을 벌일 때는 필시 어떤 음험한 저의가 숨어 있다. 그 의도를 간과한다면 내용에 상관 없이 헛수고만 하게 되는 꼴이다.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는 말이 있다. 일이 떨어지면 일이 아니라 일을 맡긴 자의 속마음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이유도 모르고 탈락 통보를 받았다거나 내용에 앞서고도 승자가 되지 못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먼저 당선작을 뽑지 않을 작정인데도 판을 벌인 도둑놈 심보가 있다. 아이디어만 받고 슬슬 꼬리를 빼다 무효를 선언한다. 발표나 실행을 질질 끌다 갑작스런 사정이 생겨 프로젝트가 취소되었다며 다음 기회를 약속하기도 한다. 업계에 퍼진 전과기록을 살펴 개과천선의 가능성을 판단해야 한다.

다음으론 승자가 정해진 판에 들러리를 서는 경우다. 야합을 숨기려고 사기꾼들이 마련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엄격한 룰을 적용할 것이라며 공정함을 가장하지만 결정적인 자료들이 그들의 입맛에 맞는 모처로 이미 전달되었을 것이다. 참가자들의 면면을 따져보라. 결탁이 의심되면 거절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길게 보고 뛰어들 수도 있다. 다른 참가자도 포기할 것이기 때문에 차점자의 가능성이 생긴다. 어느 정도의 성의와 잠재력을 보여주면 먼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황당한 사연은 너무 잘해서 낭패를 보는 일이다. 미운 털이 박힌 프레젠터가 상대의 속도 모르고 좌중을 압도해버린 것이다. 골탕을 먹이려는 상사나 거래처의 기대를 꺾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착각하지 마라. 오너의 눈에 띄어 신분의 수직상승을 거두는 것은 드라마 속에나 나오는 동화일 뿐이다. 몇몇 청중의 박수가 끝나면 곧 화가 밀어닥칠 것이다.

차가 지나가기 위해선 자갈을 걸러내고 길을 다져야 한다. 그러니 먼저 사과의 뜻을 전해 상대의 섭섭함을 달래고 선입견을 지워서 내용에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 아니면 잘할수록 더 멀어질 것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인과(因果)로 이어져 있다. 미국에서 돌아온 추신수의 높은 출루율은 그의 선구안이 뒷받침했다. 뿌리부터 살펴보라.

김시래 동국대 겸임교수, 한국광고총연합회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