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은퇴 루틴' 준비됐나요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입력일 2021-04-19 14:29 수정일 2021-05-31 18:02 발행일 2021-04-2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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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안 늙을 줄 알았다. 늙어도 약해지진 않을 듯했다. 늘 건강하게 현역처럼 바쁘고 왕성히 움직일 줄 알았다. 미리 준비하면 일도 적으나마 있을 것 같았다. 좀 쉴 수는 있어도 보상차원일뿐 언제든 컴백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능력과 체력이 굳건한데 나이를 먹었다고 얌전히 물러서지 않겠다고 확신했다. 적어도 민폐끼치는 뒷방신세는 남의 일로 여겼다. 늙는다는 건 먼 훗날의 얘기일 뿐이다. 당장은 먹고살기 바빠 노후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덜 고민하지만, 언제든 시작하면 충분할 걸로 내다봤다.

은퇴자 대부분의 공감토로다. 50대 중후반이 돼도 이후의 평생현역을 의심하는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 탑골공원 소일신세도 본인에겐 예외사례다. 늙음은 관리되고 현역은 계속될 걸로 확신한다. 늙음반발은 당연하다. 의료기술 발달과 예방의학 확대로 물리적 노화도 늦춰지는 추세다. 과거기준으론 명백히 노인인데 4050세대처럼 보여지는 사례도 많다. 얼마든 노화에 맞서 현역연장을 실현할 것이란 자신감은 현실적이다. 왕년에 잘 나갔다면 더 그렇다. 뒷방운운에의 강력저항이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뭣이든 할 수 있다 자신하는 한국중년이 넘쳐나는 듯하다.

문제는 ‘그럼에도’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현실은 냉혹하다.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언제까지나 젊을 수 없듯 제아무리 버텨도 시간 앞에 장사는 없는 법이다. 깨닫고 수긍하면 이미 뒤늦은 때가 보통이다. 몸부림쳐본들 늙음을 이길 수는 없다. 자랑스럽던 숙련조차 구태의연한 꼰대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인생지사 숱한 착각과 오해는 늘 이렇듯 뒤늦게 알려지며 후회와 미련을 남긴다. 닥치면 늦다. 미리미리 준비하는 수뿐이다. 누구든 늙어지고 왕년은 멀어져간다.

평생현역일 수 없다. 바랄 수 있으나 이루기 힘들다. 당장의 몸과 맘이 건강하니 심심찮은 돈벌이도 가능하리라 기대하나 확률상으론 뒤집히고 넘어질 여지가 더 크다. 언제 닥칠지 모를 무차별적인 충격이란 게 늙음과 동반되는 생활변화란 점에서 차라리 상시적인 비상계획을 준비해두는 게 더 효과적이다. 이때 유효한 게 ‘어디서 무엇을’의 자문이다. 어차피 은퇴는 거스를 수 없다. 불가피한 늙음과 동반될 이슈다. 늙어 시공간의 실향민이 되지 않자면 대응전략이 절실하다. 지금 중년에게 이보다 더 중한 일은 없다. 퇴장신호 후 갈 곳과 할 일을 찾아봐야 만시지탄일 따름이다.

코로나19 사태는 루틴(Routine)의 소중함을 새삼 안겨준다. 하루하루 일상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에너지인지 깨닫는 기회다. 자가격리든 재택근무든 눈뜬 후 갈 곳이 없어진 허망·황망이란 꽤 큰 충격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번의 루틴파괴는 시한부다. 은퇴는 현역루틴과의 확실·영원한 결별을 뜻한다. 갈 곳도 할 일도 없는 ‘어느 아침’의 첫날은 기우일 수 없다. 새로운 은퇴일상을 디자인해둬야 할 이유다.

일본어에 ‘이바쇼(居場所)’란 단어가 있다. 정확한 의미전달은 아니나, 안심할 수 있는 곳 혹은 자기를 찾을 수 있는 곳 정도로 해석된다. 해서 이바쇼가 있냐없냐는 누구에게든 버팀목의 안전지대로 해석된다. 이바쇼의 확보는 노후생활의 품질과 직결된다. 일본노인은 은퇴준비 리스트에 이바쇼 만들기를 빠트리지 않는다. 그곳이 어디든 무료한 은퇴생활에 활기를 되찾아줄 루틴공간인 까닭이다. 은퇴가 먹먹할수록 이바쇼는 중요해진다. 나의 이바쇼는 어딜까. 걱정되면 당장 뛰쳐나가 찾아볼 일이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