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은퇴남편과 '부원병'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입력일 2020-06-18 13:43 수정일 2020-06-18 13:44 발행일 2020-06-1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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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노년은 걱정스럽다. 개중 큰 근심거리는 고립, 고독이 아닐까 싶다. ‘혼자’의 공포다. 갈 곳과 만날 이가 많은 현역과 달리 은퇴 이후엔 ‘함께’의 기회 자체가 준다. 은퇴 후 여유로운 집 밖 만남은 고작해야 몇 달이다. 길거리 방황의 끝은 자발적 고립으로 귀결된다. 외로움은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잦고 강력하다. 왕년에 잘나갔어도 간판이 떨어지고 명함이 사라지면 고립적인 무위(無爲)노년일 뿐이다. 

이때 최후의 안전판은 가족이다. 독립한 자녀보단 배우자가 제격이다. 현실은 다르다. 언제든 함께해줄 걸로 해로를 약속했건만, 상황은 만만찮다. 은퇴 이후 부부간의 관계악화는 생각보다 잦고 심하다. 원인이야 많겠으나, 아쉽게도 대부분은 남편문제로 집중된다. 당사자인 남편이 정작 ‘은퇴’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대응을 하지 못해서다. 은퇴했는데도 인식과 행동의 변화 없이 예전처럼 생활하는 남편을 그대로 받아줄 아내는 없다.

부딪히면 폭발한다. 은퇴 이후 부부 사이의 상황 악화는 시점 문제일 뿐 언젠간 틀어진다. 원인 제공은 남편이 하고, 방아쇠는 아내가 당긴다. 돈을 벌 때는 그래도 참지만, 은퇴 이후까지 남편의 ‘꼰대질’을 받아줄 아내는 없다. 상황 급변에도 불구, 남편의 불변은 아내로선 불편을 넘어 반발을 낳는다. 요컨대 ‘부원병(夫源病·후겐뵤)’의 본격 발발이다. 남편이 원인인 병이라는 신조어인데, 초고령사회 일본에선 심심찮게 들린다. 은퇴남편의 존재 자체마저 싫다는 투다.

부원병은 느닷없지 않다. 예전부터 남편을 향한 불만과 원망이 쌓인 경우가 많다. 억눌렀던 증상은 은퇴부터 표면화한다. 품어줄 인내가 바닥을 치는 까닭이다. 만성질환이 은퇴를 만나 상태를 급격히 악화시키는 구조다. 왕왕 관계악화를 넘어 단절·결별적인 복수까지 펼쳐진다. 끝은 황혼이혼이다. 은퇴 이후 뉴노멀과 생활·인식의 변화를 거부한 남편에겐 값비싼 영수증이 청구된다.

부원병은 실존한다. 의학계에선 스트레스성 신경질환으로 규정된다. 남편 탓에 발생하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웃어넘길 일이 아닌 셈이다. 갈라설 게 아니면 원인제공자인 은퇴남편의 변신이 필수다. 바람직한 건 만성질환으로 시작될 때 일찌감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부원병은 끊임없이 증상이 발현된다. 대화 요청, 변화 유도 등 남편을 향해 계속해 SOS를 보낸다. 마지노선은 은퇴 이후 잠시다. 이때조차 부원병을 못 알아채면 아내의 남편 폐기는 기정사실이다.

부원병의 예고나 경고를 무시해선 곤란하다. 처음엔 단순한 ‘은퇴남편재택증후군’의 가벼운 징후지만 곧 정식질병으로 전이된다. 대화조차 사라지면 사실상의 위험신호로 그땐 늦은 경우가 많다. 당연히 필요에 따른 거래관계적인 대화는 대화가 아니다. 이혼카드를 받아본들 손해는 남편에게 집중된다. 아내의 부재는 노후품질을 최악으로 내몬다. 재산·소득을 나눠봐야 독립생활조차 어렵다. 결국 현역 때부터의 일상대응이 중요하다. 일본에서 나온 해결책은 의미심장하다. 아내를 직장상사처럼 여기라는 메시지다. 예스맨까진 아니라도 눈치보고 배려하며 모시라는 의미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