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소녀상에 갇히길 거부할 권리

안미경 예담심리상담센터 대표
입력일 2020-06-10 14:19 수정일 2020-06-10 23:27 발행일 2020-06-1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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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경 예담심리상담센터 대표·교육학 박사

누군가가 자신의 신체를 흘낏거리거나 면밀히 살펴보는 성적인 응시는 성적인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다른 사람에 의해 관찰되거나 이용당하는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페트릭슨과 로저츠(Fredrickson과 Rogerts)(1997)는 이를 ‘성적 대상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성적 대상화로 인해 사람은 신체의 일부나 성적인 기능이 인격으로부터 분리돼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축소된다. 다른 사람의 용도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성적 대상화를 경험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심리적인 신체적 수치심과 사회적 불안, 고립감을 떠안거나 극복하려 애쓰며 외롭게 살아와야 했다. 어떤 목적의 대상이나 수단으로 취급되는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대상화는 인간을 약탈되거나 예찬되기도 하는 사물로 취급한다. 이런 행위는 사람의 자율성이나 주체성을 부정하며 사람을 대체가능한 존재, 침해해도 되는 대상으로 취급하며 수동성을 양산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보이지 않는 큰 고통의 이유다.

젊은 시절 일제에 의해 성적으로 대상화됐던 위안부 피해자들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나라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대상화되고 있다.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의 강압적 성적 대상화를 고발하는 운동과 조직의 도구로 여겨져 왔다. 한 개인으로서 자기 삶의 목적을 가지거나 정의연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행보를 선택하는, 즉 또 다른 대상화가 되길 거부하는 경우 더 이상 위안부 피해자로서의 보호나 배려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남산 ‘기억의 터’에 이름 없는 피해자 할머니들처럼 기록에서조차 배제되기도 한다.

왜 남산 ‘기림비’에 오르지 못한 이름이 있어야 하고 소녀상은 다른 누군가의 모방을 금할 수 있는 누군가의 소유여야 할까. 위안부 할머니는 어쩌다 소녀상이라는 단일한 이미지에 갇히게 됐을까. 매주 수요집회에 나와 반일운동을 벌이며 남은 생을 보내온 분들임에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단칸방에서 경제적 궁핍을 면치 못했다. 반면 윤미향은 딸의 유학과 자신의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싫다 좋다 자기의견을 낼 수 없고 잘했다 잘못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면 피해자들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안락한 생활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을 노욕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구순 나이의 노인이 하는 말은 온전한 정신의 자기 목소리라고 여길 수 없는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자신과 함께 해온 30년 의리를 저버리는 배신행위에 불과한가.

30년 동거동락이라는 인간적 의리를 내세우기 전에 차가운 방에 온수매트 한장을 깔아드리는 게 먼저다. 피해자 운동의 산증인으로 추대하다가 사람보다 운동이 앞서는 데 대한 분노와 서러움을 쏟아내자 기억력·판단력 부실로 폄훼한다.

더불어 배은망덕한 자로 매도하며 여태 먹여살린 자 노릇을 하는 것이 과연 인간적 의리일까. 이용수 할머니의 발언에 가장 먼저 가져야 할 태도는 진심어린 경청이다. 그리고 미국 경찰들이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흑인청년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발발한 反인종차별운동에 ‘무릎꿇기’로 보여주는 미안함과 책임의 자세다.

안미경 예담심리상담센터 대표·교육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