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일본노인이 법정에 가는 이유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입력일 2019-11-27 15:07 수정일 2019-11-27 15:08 발행일 2019-11-2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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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도서관과 공원, 그리고 법정의 공통점은 뭘까. 정답은 고령인구다. 은퇴자가 즐겨 찾는 3대 공간이다. 일본에선 꽤 알려진 사회현상이다. 우리로선 낯설지만, 일본노인 중 상당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한국에 적용하면 공원 정도만 동의된다. 탑골공원처럼 수많은 공원의 단골고객은 고령자다. 어린이에서 고령자로 주인이 변했다. 미끄럼틀보다 운동기구가 더 많다. 고령사회답다. 공원의 고령화는 자연스럽다.

도서관과 법정도 마찬가지다. 뜯어보면 이유는 흘러넘친다.

도서관은 그나마 이해된다. 시간을 보내기에 최적이다. 지적만족도 챙겨진다. 일부지만 한국에서도 도서관에 출퇴근하는 고령자가 생겨난다. 절대빈곤의 은퇴생활이 많았던 선배세대보다 적으나마 여유롭고 고학력인 베이비부머의 대량은퇴와 맥이 닿는다. 일찌감치 늙어간 스웨덴·일본 등 해외에선 고령인구 특화도서관도 있다. 수요가 상당해서다. 그들이 선호하는 도서서비스를 확충하는 움직임은 본격적이다. 24시간 도서관도 있는 판에 고령도서관이 없을 이유는 없다. 앞으로의 도서관은 갈수록 고령독자의 눈높이와 매칭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법정은 갸우뚱이다. 왜 일본의 은퇴인구는 법정과 친해지고 있을까. 당연히 죄를 지어서는 아니다. 목적은 재판 방청이다. 취미를 넓혀 일상이 된 경우도 많다. 유명 연예인이 본인의 취미인 재판 방청을 추천할 정도다. 최근엔 방청 경력 36년차가 쓴 ‘재판중독(裁判中毒)’이란 책도 나왔다. 재판 방청을 소개·안내해주는 사이트도 있다. 재미난 재판을 고르는 방법을 취미수준을 넘어선 선배 방청자가 알려준다. 여러 개 재판이 펼쳐지니 골라잡는 선택지도 넓다. 주목사건은 추첨제지만 대부분 허들이 낮다.

도서관과 공원, 법정은 은퇴생활의 최적지다. 고령인구의 수요·갈증을 풀어줄 욕구충족의 공간으로 제격이다. 무엇보다 원가가 없다. 시간은 많고 의미가 있는데다 돈마저 불필요하니 다목적 카드다. 개별적으론 건강(공원)과 지식(도서관)은 물론 사회이슈(법정)까지 챙겨진다. 어차피 반겨줄 곳이 마뜩찮은 은퇴생활자에겐 꽤 괜찮은 소일거리다.

세 곳 말고도 대안은 많다. 학회에 참가하는 단골노인도 적잖다. 크고 긴 행사면 간식거리와 기념품까지 이득이다. 은퇴인구를 위한 새로운 공간창출보다 낫다. 방해가 안 되면 서로 손해볼 건 없다. 생돈과 반발까지 부르며 새롭게 노인공간을 만들기보단 사회 곳곳에 포진한 기존공간의 진입장벽부터 낮추는 게 좋다.

늙음은 어둡다. 부정적이고 폐쇄적이다. 그래서 저항하고 거부한다. 뾰족한 수는 없다. 반기는 곳은커녕 갈 곳조차 변변찮다. 때문에 대개는 집안에 방치·함몰된다. 당연히 고립은 질병을 낳는다. 개별비용을 넘어 사회비용으로 전가된다. 이래선 곤란하다.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와 동떨어지는 현실은 바람직하지 않다. 결별보단 연결이다. 편리하고 친근하게 다가설 공간카드가 절실하다. 꼭 창조적일 성과를 고집할 일은 없다. 그들이 집밖을 나선다는 것만으로 사회는 건강해진다. 노인을 위한 나라까진 몰라도 노인이 찾는 공간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늙는다. 곧 다가올 나의 이슈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