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현대판 보릿고개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입력일 2019-05-22 14:28 수정일 2019-05-22 14:29 발행일 2019-05-23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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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헬스 동호인들의 표정이 예전과 다르다. 운동 끝에 치맥을 하면서 이유를 알았다. 50대 철강 유통점 사장은 “이렇게 어려운 건 처음”이라고 했다. “IMF도 겪었고, 조기 퇴직당하면서도 잘 버텨왔는데, 올 2분기는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40대는 웃으며 말했지만 마음이 더 짠했다. “정신없이 바빠요. 문제는 일이 없어서, 일 찾아다니느라 바쁜 거예요.” 그는 딸아이의 학원비 때문에 고통을 받는 모양이다. 다니던 학원을 끊으라고 할 수도 없어 부인이 대형마트 시간제 캐셔로 일한다고 했다. 하나같이 불경기가 쓰나미처럼 왔다고 입을 모았다.

60대 중반을 넘긴 필자는 아무 말도 못했다. 벌어 놓은 것이 줄어드는 것도 고통이지만, 일손을 놓고 있다는 현실은 정말 기막힌 일이다. 주택을 담보로 생활비를 보충하는 40대의 토로는 씨감자를 먹어야 하는 생존의 몸부림이다. 어린 시절의 보릿고개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일단, 1만원씩 걷으시죠.” 지난달만 해도 3만~4만원 정도의 치맥 값은 누군가 선뜻 냈지만, 지금은 더치페이로 변했다.

새는 궁하면 아무거나 쪼아대고, 짐승이 궁하면 사람을 해친다. 사람이 궁하면 거짓을 말하고, 말이 궁하면 달아나는 법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아래로 내려앉으면 위태롭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공자님 말씀처럼 보통사람들의 삶은 현대판 보릿고개로 내려앉았다.

철강기업의 경영상황은 붉은 색깔 천지이다. 파란빛을 보이는 기업은 포스코와 특화된 몇몇 기업뿐이다. 중견 철강기업과 중소메이커, 그리고 군소 유통상들은 숨넘어갈 듯 심각하다.

철강 유통상들에게 여장부로 통하는 강관영업 분야의 워킹맘 이순명(가명)씨는 “묘책이 없는 시절”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내수가 불투명해서 수출에 주력하고 있다. 해외시장에서 강관과 철골(H빔 등)을 함께 수주하고 있다. 강관이 주종목이지만 철골도 한다. 그는 철골을 어렵게 수주했지만 국내 조달이 어려웠다고 한다. 국내에선 다양한 규격의 철골 생산이 불가능했던 탓이다. 어렵게 얻은 틈새 비즈니스의 결과물을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잘 팔리는 규격만 만드는 국내 철강메이커의 관습은 뻔뻔하게도 아무 표정이 없다.

우물 안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Go and see’의 태도가 요구된다. 직접 가서 봐야 실정을 알 수 있다. 철강 대기업도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야 한다. 순환은 작은 기업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기껏 수주했는데 중국만 도와주게 생겼다는 철강 유통 여장부의 한숨소리는 어미가 새끼에게 먹일 양식이 없어 토하는 애끊는 소리 같았다.

3만원 넘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 스마트폰 사용은 월 요금이 2만원을 넘지 않도록 조절하고, 가급적 공공도서관을 애용한다. 이 생활패턴은 어느 은퇴자의 결심이다. 불황기를 사는 지혜는 짠테크가 기본이다. 자본의 회전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보리가 다 자라기도 전에 베어서 굶주린 배를 채워야 했던 보릿고개는 전설로 남아야 한다. 우리 곁에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이제라도 서슴없이 혁신해야 산다. 정말 쓰나미가 덮치기 전에 변신해야 한다. 현대판 보릿고개의 놀이터는 절대 만들지 말아야 한다.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