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철강 1세대의 '창업정신' 배워라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입력일 2019-01-24 15:14 수정일 2019-01-24 19:02 발행일 2019-01-25 19면
인쇄아이콘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국제시장에 큰 불이 났다.” “어지간한 점포는 몽땅 불타 없어졌다.” 1953년 1월 발생한 화마는 시장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1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빈털터리가 된 30대의 청년은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곧 어린 자녀와 가족 모두가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다는 절박감은 청년을 다시 일으켰다.

6년 뒤, 청년은 조관기 한 대로 철강공장을 세웠다. 그리고 59년의 세월이 흘러 글로벌 철강종합메이커로 성장했다. 재계서열은 40위다. 세아그룹 창업자 고(故) 이종덕 회장의 창업스토리다. 매출 7조원이 넘는 기업성장사의 밑바닥에는 ‘정직과 겸허,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기업’이라는 창업정신이 깔려 있다.

1970년대 초반, 한국강업과 한국철강이 도산했다. 한국강업은 5t 큐폴라공장(소형 용광로 공법)에서 만들어 내는 철근제품으로 막대한 이익을 축적했다. 사주는 핵심 사업이 아닌 설탕 수입에 손을 댔다. 결국 한국강업은 빚더미에 깔려 파산했다. 사주는 미국행을 택했다.

마산의 한국철강도 막강한 시장점유율을 차지했다. 이 기업은 최신설비를 정부 투자금으로 대신하려던 ‘냉열싸움’에서 졌다. 얼마 안돼서 약 550만 달러(27억원)의 융자와 차관을 갚지 못하고 은행관리에 들어갔다.

몇 년 후, 한국철강의 전 사주 신씨의 집에 검찰이 들이닥쳤다. 벽속 비밀창고에서 달러와 보석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신씨에게 처음으로 국내재산도피방지법 위반이 적용됐다. 기업은 파산했어도 개인 자산은 몰래 빼돌렸던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철강업계에 쓰나미가 몰아쳤다. 11개 철강기업이 부도에 이르렀다. 급격하게 설비 확장을 했지만 철강 수요가 급감하자 심각한 실적 부진에 직면한 것이다. 

국내 철강산업의 성장 과정에는 두 가지 위기가 있었다. 초창기는 가파른 성장과 규모의 확장이었지만 내부 종사원들의 일체감이 없었고, 1980~1990년대에는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위기에 속수무책이었다. ‘성장의 역습’처럼 내부의 자만심이 적자와 도산을 발생시킨 것이다.

몇몇 기업은 달랐다. 창업자의 대담하고 야심찬 기업가 정신 아래 똘똘 뭉쳤다. ‘무차입경영’을 고집했다. 전략에 방해 되는 복잡성을 간추리고, ‘일을 줄이자’는 캠페인을 전 그룹사에 정착시켰다. 생사를 좌우했던 시기에 살아남은 세아그룹과 동국제강의 경영패턴이다. 이들 기업은 3~4세대 경영체제에 돌입했다. 100년 기업을 향하고 있다.

철강 불모지에서 맨 주먹으로 일어선 1세대들의 공통점은 끈질긴 ‘도전정신’이다. 무모할 정도의 성실성과 근면한 태도는 기본이다. 포스코 박태준 회장은 사즉생(死卽生)의 ‘우향우 정신’을 남겼다. 동국제강 장상태 회장은 ‘아내의 반지를 팔아서라도 첨단 설비를 놓겠다’고 전력투구했다. 세아 이종덕 회장은 ‘절망적 상황에서 맨손으로 철강회사를 세웠다’. 그 열정을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요즘 ‘기업가 정신’이 화두다. 저녁이 있는 삶을 택하는 여유도 중요하지만, “35시간만 일하자”고 했던 독일 철강기업들이 문을 닫은 이유를 음미해야 한다. 어금니 깨물고 덤볐던 야무진 정신부터 가져야 한다. 기업이 지속적 성과를 내는 근원은 내부 깊숙한 곳의 ‘창업정신’(Founder’s Mentality)에서 시작된다.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