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여행의 품위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입력일 2018-12-23 15:08 수정일 2018-12-23 15:09 발행일 2018-12-24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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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여행은 유쾌해서 좋다. 상념을 버리고, 자유를 느껴서 행복하다. 지난 11월 초등학교 동창 9명과 함께 다녀온 베트남 다낭 여행은 유쾌함과 자유보다는 여행의 품위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다낭은 휴양지였다. 도로 양 옆에 길게 늘어선 야자수 나무와 거친 파도를 몰고 오는 해변은 가슴을 후련하게 했다. 불교 성지들은 산 속에 있었고, 그곳의 작은 토굴 벽면에 숭숭 뚫린 총구멍은 베트남의 눈물 자욱 같았다. 정교한 조각으로 빚어진 불상, 화려한 색채의 불전, 그리고 스님들의 우렁찬 독경 소리는 자정(自淨)의 마음을 갖게 했다.

다낭 도심의 야경은 자본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고층 건물은 베트남의 역동성을 피부로 느끼게 했고, ‘패스트 팔로어’였던 한국의 80년대를 보는 듯 했다. 이런 새로움과 경이로움은 박항서 감독의 인기 덕택에 배가 됐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음식점이나 상점 뿐만 아니라, 마주치는 다낭 시민들로부터 호의를 받은 것이다. 또 현지 한국인 가이드의 품격 있는 안내는 한국 여행업계가 한층 업그레이드 됐음을 알게 했다.

호사다마일까. 여행 2일째 되는 날 밤, 예기치 않은 사고가 일어났다. 일행 중 한 명이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늑골을 다친 것이다. 그녀는 손자가 셋이나 되는 65세의 돌싱 할머니다. 현지 의료 수준이 낮아 한국의 가까운 의사에게 전화로 자문을 얻었다. 지시대로 휴대했던 비상약을 복용시키고 하루 정도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문제는 여행을 계속할 것인지 여부였다. 심난한 공기를 간파한 환자는 농담을 섞어 고민을 해결해줬다. “서방 복 없는 여자가 여행 복도 없다”면서 “나 때문에 여행을 망칠 수 없으니 걱정 말고 남은 여행 즐기라”고 했다. 그녀는 여러 사람을 위한 명예로운 가치(dignity)를 선택한 것이다.

다음 날, 그녀는 온종일 호텔방에서 혼자 지내다가 문자를 보내왔다. 호텔방에 누워 있으려니 기가 막혀 눈물이 났는데, 보호하던 호텔 여직원도 눈물을 글썽이더란다. 직원은 점심도 가져다주고, 커피도 타 주었단다. 손으로 하트를 보였더니 수줍게 웃더란다. 그 표정은 다낭의 호감도를 높여주고도 남았다고 했다. 그러나 호텔리어의 친절에 대한 감사한 여운은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호텔방에서 점심식사 중일 때 들어온 청소부는 막무가내로 옆 침대의 시트를 털었고, 베개 시트는 교체도 하지 않았으며, 발을 씻은 타올로 커피 잔을 닦아 세팅했고, 청소를 끝낸 방바닥과 욕실은 물기로 흥건했단다. 베트남의 4성급 호텔 서비스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너무 큰 격차를 보였던 것이다.

과거 우리의 민낯도 극소수였지만 천박했다. 호텔 뷔페에서 런닝셔츠 차림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뷔페 음식을 몰래 비닐봉지에 담고, 실내화를 호텔 밖까지 신고 다니고, 호텔 로비 소파에 벌러덩 눕곤 했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다낭 여행자의 90%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세계는/나의 학교/여행이라는 과정에서/나는 수 없는 신기한 일을 배우는/유쾌한 소학생이다”고 했던 김기림 시인의 글(태양의 풍속)처럼, 신기하고 유쾌한 여행을 하려면 품위부터 가져야 할 것이다.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