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중년을 위한 변명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입력일 2018-12-13 15:24 수정일 2018-12-13 15:25 발행일 2018-12-1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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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산다는 건 뭘까. 어떤 게 잘 사는 걸까. 아무리 고민해본들 1순위 모범답안이 잘 찾아지지 않는 시대다. 떡하니 입신양명의 부와 명예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기둥, 허리로 불리는 중년 정도면 그 정도 양심(?)과 현실감은 있다. 그저 주변에 흔함직한, 남들처럼 살고 싶을 뿐이다. 회사를 다니며, 친구도 만나고, 가족도 챙기는 그런 삶 말이다. 문제는 아무리 둘러봐도 이런 평범한 삶조차 드물다는 점이다. 한 움큼의 고민과 한 덩치의 무게가 평범한 일상을 힘겨운 현실로 치환시킨다. 중년 인생이 얼추 이렇다. 과연 이대로 괜찮을까.

사회초년생 넋두리라면 일리도, 이해도 된다. 다만 짧아도 40년 넘게 묵묵히 살아온 중년이라면 평가가 달라진다. 중년에게 방황은 허용되지 않는다. 어영부영할 짬도 틈도 없이 가족과 사회, 국가를 위해 내달리라 강요받는다.

산다는 게 뭔지 떠올려봤자 인정받기 힘들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다. 인생화두는 중년일 때 정점을 찍는다. 쥐기 힘든 평범한 삶의 갈구는 중년일수록 더 크고 깊다. 눈앞의 호구지책과 암울한 수수께끼의 동시 출현이다. 몸은 중년이라도 맘은 청년처럼 휘둘리고 번뇌한다.

일본의 한 주간지(SPA)가 35~49세 중년남성 300인을 대상으로 2016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70%가 ‘볼품 없는 인생’에 동의했다.

볼품 없다(つまらない)는 뜻은 하찮거나 시시하거나 재미없다는 말과 비슷하다. 비교잣대는 평범한 보통인생이다. 보통인생에조차 닿지 못하는 박탈감과 상실감의 공유다. 보통인생에서 ‘보통’은 예전에 설정된 개념이다. ‘졸업→취업→결혼→양육→정년’의 길이다. 성장시절 누구든 밟음직한 경로다. 선배들에겐 익숙한 보통인생이다. 이걸 중년초입의 마흔 인생이 되돌아보니 쉽지않아 졌음을 깨달은 것이다. 평범함조차 허용하지 않는 시대의 결과다.

지금 한국의 중년인구는 선배들의 보통인생을 부러워하는 최초 세대다. 내일이 오늘보다 불행할 수 있다는 실체적 위기와 함께 중년에 접어들었다. 중년이전엔 거센 수험경쟁에 좌절했고, 상당수의 사회 데뷔는 불합격 통지로 시작됐다. 희망출사표는 대출통지서로 대체되고, 승진인사는 퇴직명단으로 변질될까 두렵다. 최초의 입직관문이 비정규직이면 보통인생은 더 힘들다. 패러다임 변화로 ‘제조업→서비스업’의 시대조류 전면에 노출된 건 물론이다. 구체적인 실업공포다. 쓸 곳은 많은데 벌 곳은 줄어드니 악순환의 시작이다. 안 잘리려 애쓰지만, 빈곤파도는 건재하다.

옛 사람들은 용감히도 나이와 깨달음을 연결했다. 진실인지 모르겠으나 서른이면 뜻을 세우라 했다. 이립(而立·30세)이다. 지금 적용하면 대단한 일이다. 뜻은커녕 빛조차 없어서다. 또 중년 초입의 마흔이면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꿋꿋하라 했다. 불혹(不惑·40세)이다. 한술 더 떠 쉰엔 하늘이 정한 운명을 따르는 걸 당연시했다. 지천명(知天命·50세)이다.

지금 중년은 이런 말을 듣고 컸으나 정작 이루지 못한 본인신세가 더 웃플 수밖에 없다. 동의불가다. 환갑조차 도를 찾아 해매는 마당에 중년방황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다. 지금 중년에게 필요한 건 공감과 위로다. 그 정도면 꽤 잘 살아온 인생이라 웃어주는 사회가 절실하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