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20년 만의 재회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입력일 2018-11-22 15:38 수정일 2018-11-22 15:40 발행일 2018-11-2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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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96세의 노모는 뜨개질을 하고 계셨다. 해는 서쪽 산마루에 기울어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때 현관문 벨이 울렸다. 경기도 파주의 전원주택에 누군가 찾아온 것이다. 노모는 현관에 들어서는 방문객을 얼른 알아채지 못했다. 방문객은 외국인 남편과 한국 여인이었다. 여인은 세월의 나이테가 한 꺼풀 스쳐간 50대였다. 정숙한 차림의 여인은 거실로 들어서며 곧바로 노모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서야 노모도 여인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여인을 가슴으로 꼭 끌어안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치 이산가족 상봉 같았다. 지켜보던 남편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는 익숙한 한국말로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 살아계셨군요. 살아 계신 줄 알았다면 벌써 찾아뵈었을 텐데,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그때까지도 여인은 노모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숙연한 장면이 지속되자 지켜보던 이들도 눈물을 흘렸다. 거실 안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사연은 눈물겨웠다. 20년 전, 영숙(가명·58)씨는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 외로운 독일 유학시절에 오스트리아 남자와 사랑을 했고, 결혼까지 했다. 남편은 지멘스사(社)의 엔지니어였다. 독일에서의 결혼생활은 사랑이 넘쳤다. 첫 딸에 이어 둘째 딸도 낳았다.

아이가 둘이 되자 학업과 육아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자 한인교회에서 노모를 만난 영숙씨는 육아를 부탁을 했다. 노모는 고국의 손주들 생각에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수 년 동안 영숙씨의 아이들을 정성으로 돌봤다. 큰 아이는 어느새 십대 소녀가 되어 스위스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숙씨 가정에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했다. 큰 딸아이가 스위스에서 남자 친구와 기차 길을 건너다가 기적 소리를 못 듣고 두 명 모두 교통사고로 절명한 것이다.

이후로 영숙씨는 혼절을 거듭했고, 정신 줄을 놓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런 시간이 5년이나 계속되자 남편은 한국행을 결정했다. “어떤 조건도 필요 없다. 아내의 조국 한국에서 근무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회사 측은 아내 사랑이 지극한 그에게 한국 근무를 허락했다. 노모와 영숙씨는 그렇게 독일에서 이별했던 셈이다. 영숙씨는 한국에 돌아와 가족과 친지들의 보살핌 덕분에 건강을 되찾았다. 음악가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지금은 매우 건강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

서산에서 ‘7080음악실’을 운영하고 있는 영숙씨는 가끔 자신이 운영하는 곳 스테이지에 스스로 올라가 발라드 노래를 즐겨 부른다고 한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잘 부른다는 영숙씨의 지나간 20년 인생 스토리가 노모에게 전해지면서 파주의 저녁은 재회의 기쁨으로 넘쳤다.

“아직도 그 어린 ‘사라’(가명)의 얼굴이 떠올라. 참 예쁘고 귀여운 아이였는데.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찢어지는 마음을 누가 알겠어.”

노모는 영숙씨가 돌아간 이후에도 한참동안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셨다.

“베풀어야 해. 나이 들수록 베푸는 걸 아끼지 말아야 해.”, “내 마음이 이렇게 흐뭇할 수가 없어. 그때 그 아이들과 영숙이를 돌봐주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행복한 얼굴을 볼 수 없었겠지.”

‘베풀어진 것은 언제나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중세 라틴의 격언이 가슴을 파고드는 하루였다.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