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욕망이 만든 형벌

정인호 GGL 리더십그룹 대표
입력일 2018-10-31 17:06 수정일 2018-10-31 17:06 발행일 2018-11-0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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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호 GGL 리더십그룹 대표

인간의 생활에서 노동을 제거하면 무엇이 남을까? 노동 없이 인간은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 노동은 인간의 세계, 생활 그리고 인간 자신의 바탕을 이룬다. 그러면서도 ‘네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는 밥을 먹을 수 없다’는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은 인간의 노동이 저주받은 것임을 지적한다. 이때의 노동은 고통을 의미하며 고통스러운 노력에 의해서만 자연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인간의 예속상태를 나타낸다. 그래서일까. 성경은 노동을 ‘신이 내린 형벌’로 묘사했다.

노동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성공스토리다. 노동은 우리에게 번영과 진보를 안겨주었고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은 노동을 통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마치 자발적으로 보이지 않는 수갑을 찬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주 52시간제가 도입됐지만 6시 칼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얼마나 될까? 늦은 밤 사무실이 몰려 있는 여의도, 테헤란로, 구로디지털단지의 건물들은 대낮처럼 환하다. 일찍 퇴근하더라도 커피숍에서, 도서관에서, 집에서 야근은 다반사다. 자의든 타의든 칼퇴근은 ‘승진 포기’라는 공공연한 비밀인 과로사회의 자화상이다.

국가간 경계가 사라지고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면서 노동의 세계는 훨씬 변덕스러워졌다. 더 이상 장기 전망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예측 가능하고 연속적인 미래 서사를 기획하기 어렵게 됐고 단기 설계를 통해 하루하루 임시변통할 수밖에 없다. 평생직장은 사라지고 비정규직 확대, 소득 수준의 저하, 주거난, 실업의 위기 같은 불안요소와 맞물리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려워졌다.

1970년 이후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성은 계속 높아졌다. 10년마다 경제위기를 겪었지만 국내총생산은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풍요의 기운이 넘쳐났다. 경제 체계가 지식 산업과 서비스 산업으로 빠르게 이행되면서 사람들은 고된 노동에서 해방돼 풍요와 여유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하지만 경제적 풍요는 물질적 보상을 조장했고 결국 사람들은 여유로운 시간을 선택하기보다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소비를 추구했다.

우리 사회가 소비사회로 진전되면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대립적인 생산관계에서 상호적인 소비관계로 이전됐다. 노동은 임금이고 임금은 곧 소비이며 소비는 곧 삶이라는 등식이 소비사회 노동자들에게 정착됐다. 임금의 수준이 높아지면 장시간 노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더 많은 노동을 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 것이다. 주택, 자동차, 교육, 의료 등 높은 수준의 소비는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게 되고, 대출과 신용카드를 앞세운 선소비를 충당하려고 개별 노동자는 더 오래 더 열심히 일에 헌신해야 한다. 매달 갚아야 하는 대출금과 카드 대금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한다.

결국 개별 노동자는 일과 소비라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탈출하기가 쉽지 않다. 더 큰 집, 더 큰 자동차를 마련하기 위해 대출받는다. 더 넓고 더 큰 자동차는 인간답게 사는 기준이 돼버렸다.

정인호 GGL 리더십그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