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효도 달력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입력일 2018-10-24 15:30 수정일 2018-10-24 15:31 발행일 2018-10-25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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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오랜만에 시외버스를 타고 지방 나들이에 나섰다. 파주행 버스의 차창 밖 풍광은 완연한 가을이었다. 국도를 따라 마을 곳곳을 뱅뱅 돌아가는 여유도 느낄 수 있었다. 도로 가장자리에는 코스모스가 한창이었다. 버스가 정류장에서 손님을 내려 줄 때마다 까치발을 들고 서 있던 코스모스는 가는 목을 휘청거렸다. 마치 누군가를 수줍게 기다리는 시골소녀 같았다.

누가 길가에 꽃씨를 뿌렸을까. 저 코스모스는 해마다 필 것인데, 곧 겨울이 오고 시들 것을 생각하면 애처로웠다. 귀갓길에 우편함을 보니 내년도 달력이 배달됐다. 올해도 대다수 기업들은 달력을 만들었을 것이다. 여름에 부채를 주고, 겨울에는 달력을 전하는 ‘하선(夏扇) 동녘(冬曆)’의 미풍양속이지만, 받는 사람은 하찮아도 주는 사람은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이 달력이다. 내년도 달력을 보면서 3년 전의 일이 기억났다.

“효도 달력 아세요?” 2015년 연말, 동국제강 장세욱 부회장은 내게 탁상 다이어리 10부를 주었다. 소설책 크기의 작은 탁상 다이어리였다. 네모진 칸 안에는 공간의 여백이 없었다. 숫자만 큰 글씨로 쓰여 있었다. “노모의 눈이 어두워지셔서 글씨가 큰 달력을 만들었다”고 했다. 깜짝 놀랐다. 필자도 구순이 넘으신 노모가 계셨는데 이런 생각은 미처 못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벽에 걸린 달력을 가까이 보시면서도 “애비야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물으시던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2016년 ‘효도 달력’은 이제 쓸 수 없게 됐지만 그분의 깊은 효심을 배우려고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역법(曆法)은 달력(almanac)을 의미한다. 시간을 구분하고, 날짜의 순서를 매긴 것이다. 시간단위는 달(月)과 같은 천체의 주기적 현상을 기본으로 한다. 특히 음력의 표기는 업(業)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24절기를 따져 농사를 짓고, 사리와 조금의 물때를 확인하여 출어를 준비하는 것이다.

라틴어로 캘린더는 금전출납부를 의미한다. 로마에서 금전 대차를 매달 초하루에 청산하는 풍습 때문에 금전출납부가 달력이 됐다는 고사(古史)에서 유래한다.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달력 속에 인류 지식의 요약이 들어있다”고 했다. 그가 윌든 호숫가의 오두막집에서 홀로 지낸 2년의 삶을 스스로 기록한 책 ‘윌든’(Walden)에 담긴 말이다.

새 달력을 받으면 가장 먼저 가족의 생일을 기록하고 제사와 기념일, 그리고 만날 사람들을 기록한다. 이렇게 달력은 지난날의 추억과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 자명종 같은 것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 세대들은 휴대폰에 내장된 일정표를 활용하지만 아직도 6070세대를 넘은 어른들은 탁상 다이어리와 벽에 걸어두는 달력을 소중히 생각한다.

벽이나 침대 또는 식탁 위에 올려두고 “올해도 70여 일 밖에 안 남았네” 하며 겨울을 걱정하는 세대들에게 ‘효도 달력’은 정말 좋은 선물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종이 달력의 발간을 중지하는 기업도 있고, 달력의 글씨도 작아지는 추세이지만 달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세대의 기호를 한 번쯤은 눈여겨볼 일이다.

기업이미지는 생각지 못했던 것, 관심이 없었던 것, 사소한 것을 챙기는 일에서부터 차별화된다. 올해 못했다면 내년 코스모스가 필 무렵에는 ‘효도 달력’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