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다시 쓰는 것의 가치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입력일 2018-09-20 15:16 수정일 2018-09-20 15:17 발행일 2018-09-2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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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여행의 참맛은 그 장소를 구석구석 한적하게 거닐어 보는 것이다. 그렇게 걷고 싶은 장소 중 한 곳은 파리 12지구의 ‘프롬나드 플랑테’ 산책로다. 5년 전, 세 번째 파리 여행에서 만난 이곳은 4~5㎞의 버려진 철로길 위에 만들어진 ‘공중 산책로’였다.

지상 10m 위에 있는 ‘프롬나드 플랑테’를 거닐다 보면 여유 만만한 휴식을 가졌다는 충만감에 흠뻑 젖는다. 그리고 우리 땅에도 이런 곳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갈망을 하게 된다. 유럽 각국들은 철로나 대형 공장, 발전소들을 예술 공간으로 변신시켜 다시 사용했다.

우리의 옛 산업시설들은 땅이 좁은 탓인지 대부분 아파트 단지로 전환됐다. 방직공장, 자전거공장, 자동차공장, 철강공장 등 국내 최초의 공장들은 기술의 발전 때문에 신규 설립된 생산시설에 밀려 오래된 건물 취급을 당하고 있다.

덩치가 경쟁력인 철강업계는 지속적인 증설을 해야 하므로 도심의 옛 공장을 버리고 바다와 인접한 황량한 곳에 신규 공장을 건설했다. 옛 공장을 닫으면 주변의 도시는 급격히 쇠락의 길을 밟게 된다.

“공장을 사무실로 빌려줍니다.”

독일 바이에른 지역의 휘르테 제철소에 붙은 광고문구다. 필자가 방문했던 이 공장 주변의 도시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인적이 드물었다. 이렇게 손 놓은 세월이 5년이나 된다고 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이 현상은 영등포 철공소 골목에서도 보인다.

영등포는 우리의 산업화 과정을 잘 설명해 주는 지역이다. 경성방직공장을 필두로 문래동(1944년)의 삼천리자전거(경성정공), 당산동(1954년)의 동국제강, 구로동의 하동환자동차(1955년)와 동일제강, 개봉동의 부산파이프, 기아자동차 등도 오래전에 공장을 건립하고 생산 활동을 활발히 했지만 지금은 모두 지방으로 이전했다.

초창기 산업시설의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건물을 개조해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곳도 있지만 산업역사의 소중한 근거들은 사라졌다. 각 공장에서 만들어낸 국내 최초라는 산업적 유물과 문화적 가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과거와의 단절이며 잘못된 매듭이다. 후대들에게 이런 공장에서 조국건설의 역사가 만들어졌다는 가르침도 형체가 없어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도시재생학자들은 “산업의 유산은 문화재의 개념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특정 지역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의미한다. 포스코가 포항의 정체성을 이해하게 하고, 현대제철이 당진의 아이콘이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 산책로처럼 영등포 문래동은 ‘철강재 판매 1번지’라는 이미지를 가져야 한다. 철공소 거리의 역사성을 보존하면서 철강장인들과 문화 예술인들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만드는 일은 가치 있는 변신이다. 런던의 동쪽 끝 ‘이스트 앤드’의 버려진 맥주 양조장에는 무려 1만여명의 예술가들이 몰려들어 영국 창조산업의 아지트로 재탄생했다고 한다. 런던의 낙후 지역이 예술가의 도시로 변신해 새로운 활력을 얻은 것이다.

저물어 가는 문래동의 철공소 골목을 재생시키려면 많은 예술가들이 몰려들어야 한다. 과거와 현재, 예술과 산업, 도시와 시민이 공존하는 공간, ‘문래동 철공소 거리’라는 이미지를 굳혀야 한다. 그래야 느긋하게 걸으면서 옛 철강장인의 모습을 되새겨 보고, 예술과 다양한 문화를 구경할 수 있는 명소가 될 것이다.

정부는 최근 수도권에 주거공간을 더 많이 만든다고 하는데 혹시라도 문래동 철공소 단지를 밀어내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까봐 두려워진다.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