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죽음의 사회화가 필요하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입력일 2018-09-10 16:13 수정일 2018-09-10 16:13 발행일 2018-09-1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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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인생은 관계다. 삶이 홀로일 수 없듯 혼자 울며 났지만 함께 울며 떠나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만남과 인연의 반복이다. 대부분은 옷깃만 스치지만 일부는 가족과 친구로 만나고 헤어진다. 회자정리(會者定離)다. 생노병사의 앞뒤(生死)는 괜히 붙여진 게 아니다. 관계는 나와 남의 연결고리다. 인생은 나와 남이 만들어낸 관계의 이야기다. 같이, 함께다. 천상병이 함께한 아름다운 기억에 방점을 찍은 이유다(시 ‘귀천’). 결말은 슬프되 아름다웠노라 맺으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한국은 곧 다사사회에 진입한다. 아직은 출생이 사망보다 많지만 머잖았다. 충격적인 출산감소를 보면 금방이다. 잔치집보다 초상집을 챙기는 우리네 정서를 보건대 장례식 갈 일이 늘어날 듯하다. 대량집단 베이비부머의 고령추세도 염려된다. 와중에 가족은 변한다. 가족해체를 부추기는 불황압박이 전통가족관을 뒤집는다. 대가족보단 핵가족이 먼저다. 결과는 독거추세다. 자녀가 있어도 혼자 사는 게 당연시된다. 평생 홀로사는 생애미혼도 급증, 이들의 노년도 독거노인 예약이다. 관계희박·가족단절의 시대개막이다. 홀로 떠나는 외로운 죽음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금 일본에선 그 대응전략이 한창이다. 최근 시대화두로 떠오른 종활(終活)이라 불리는 죽음준비가 대표적이다. 특이한 건 자발적인 준비활동이란 점이다. 자녀가 부모사망에 대비해 상조에 드는 한국의 일반적인 세대부조 차원과 다르다. 본인장례를 비롯, 사후정리를 스스로 적극적이고 주도적이며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게 태반이다. 물론 아직 본격적이진 않다. 머리는 이해하되 몸은 늦다. 닥치면 준비할 것이란 분위기다. 어쨌든 죽음은 멀리하고픈 이슈 아닌가. 그렇다고 가족의지도 낮다. 가족이미지는 수정된다. 동거자녀가 아니면 가족이 아니란 의식이 커진다. 가족이미지는 별거자녀(55%)가 동거자녀(88%)보다 꽤 부정적이다(내각부·2007년). 예전통계라 지금은 더 심해졌을 터다. 와중에 3대 동거세대는 50%(1980년)에서 12%(2015년)로 떨어졌다.

우리는 어떨까. 일본보다 낫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당장은 나아도 불황과 맞물린 인구구조의 양적·질적변화는 함께 맞는 죽음에 부정적이다. 외부시선에 죽고사는 우리로선 고독사망의 정확한 통계가 없다는 게 오히려 다행(?)스럽다. 제대로 따지면 외로운 죽음은 상당수다. 그럼에도 현존하는 관련인식·제도는 죽음을 가족대응으로 전제한다. 나홀로 노후가 당연한데도 죽음은 가족체제로 결정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간병이슈와 직결되는 장기요양보험의 결정주체도 가족중심이다. 가족 없는 죽음은 사각지대에 방치된다.

죽음에 대한 대응은 ‘가족화→사회화’로 바뀌는 게 좋다. 개인적 죽음에 사회적 대응이 합쳐질 때 사회비용 감소는 물론 인권존엄은 강화된다. 일본도 생(生)을 뺀 노병사(老病死)의 가족위임에 의문을 표하며 자립준비를 거든다. 불안한 가족보다 시스템의 지자체가 나선다. 독거노인에 한해 지자체가 연명치료를 포함, 다양한 사전합의를 진행한다(요코스카시·2018년). 가족유무와 무관하게 누구든 안심하고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자는 구조다. 대만은 2012년부터 4대 도시에서 장례발생 때 유족비용을 없앴다. 가족·경제상황에 따른 차별없는 죽음대응이다. 가족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외롭지 않게 이승소풍을 마무리하는 게 필요하다. 바로 죽음의 사회화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