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제주 4·3이 낳은 '현대사의 괴물'

이해익 경영컨설턴트
입력일 2018-04-15 15:44 수정일 2018-04-15 15:45 발행일 2018-04-16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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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익 경영컨설턴트

4월은 잔인한 달. 이제는 습관적으로 T.S.엘리엇의 이 시를 이용하기는 싫다. 하지만 한반도의 역사를 보면 역시 4월은 잔인한 달이다.

1940~50년대 제주4·3, 1975년 인민혁명당과 민청학련사건의 대법원 판결일인 4월 8일,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전복,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한반도의 4월은 그지없이 잔인하고 또 따뜻하다.

그런데 4월은 잊혀가고 있거나 은폐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답답하고 아프다.

첫 번째, 4월 3일. 제주 4·3은 사태인지 항쟁인지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4·3이다. 바로 이게 문제다. 1947년 3월 1일, 행사장 기마경찰의 말이 뒷걸음질 치다 어린이가 죽었다. 이를 계기로 경찰의 발포사건이 터졌다.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7개월 동안 민간인 2만5000~3만명이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이 배경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 미군정의 난정(亂政)이 함께 했다. 미국 태평양 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은 한국에 미군을 진주시키며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임을 천명했다. 이를 배경으로 피 튀기는 역사의 양파껍질을 벗겨 가면 지성이 결핍된 무책임하고 광기어린 27세 애송이인 미군 제임스 하우스만(1918~1996) 대위가 등장한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의 아버지’라고 자칭하며 1946년 7월 한국 파견 때부터 1981년 노태우에게 둘이 함께 찍은 기념패를 받으며 퇴임하여 미국으로 귀국하기까지 장장 35년간 한국의 정치와 안보 그리고 외교에 이르기까지 무소불위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한 주한미군 고문관으로 온갖 영광을 누린 인물이다. 독일계 이민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과 고독을 벗으려고 16세에 형의 이름으로 속여 군에 입대했기 때문에 이렇다 할 교육을 받지 못한 꺽다리 촌뜨기였다.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나와 있지 않다. 그간 이승만 정권과 수십년 군인정권의 부끄러움을 만천하에 공개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비집고 튀어나오는 에피소드가 많다.

무초 주한 미국 대사가 재판도 없이 제주도에서 민간인 20여 명을 총살한 사실을 보고 받고 놀랐다. 그때 막강한 하우스만이 말했다. “이전에는 민간인 200명을 집단처형했는데 이제는 20명이다. 왜 난리냐?” 참으로 놀랄 말이다. 이승만은 서울 사수를 라디오로 외쳤다.

하지만 그는 국군지도부와 서울을 탈출해서 남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직후 하우스만은 한강교 폭파를 명령했다. 정일권, 백선엽, 박정희 등 일본군 출신들이 한국군의 지도부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우스만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갱이 박정희가 그의 동료들을 모두 고변한 후 박정희를 살려준 이도 하우스만이었다.

1987년 영국 테임즈TV와의 인터뷰에서는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 나쁜 ‘야비한 놈(brutal bastard)’이라고 말했다. 유태인 대신에 한국인을 멸시하는 ‘gook(오물이라고 변역되어야 하나)’이라고 불렀다. 이제 눈치 보지 않고 경제주권 외에 외교주권과 군사주권까지 누리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갈망한다.

이해익 경영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