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예능 보며 떠오른 '業의 품위'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입력일 2018-01-21 15:26 수정일 2018-01-21 15:29 발행일 2018-01-22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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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주말에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각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프로그램 내용이 거의 똑같은 것에 놀랐다. 종편과 케이블 TV 프로그램은 더했다. 품위를 잃은 유치한 말장난이 미주알고주알 방송을 통해 오가고 있었다. 모든 방송을 폄하하지는 않지만, 아연했다.

“오락은 꽃이며, 실무는 뿌리이므로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려면 우선 튼튼한 뿌리를 가져야 한다”고 했던 미국 사상가 랠프 월드 에머슨의 말에 공감한다. 지금과 같은 현상은 30여년 전 일본을 닮았다.

일본에서는 버블경제 이후 1차 산업과 2차 산업의 성장이 정지되고, 3차 산업이 성장하자 소프트웨어 또는 서비스산업의 등장이라고 극구 칭찬했었다. 한편에서는 선진국이 되고 있는 증거라고도 했었다.

3차 산업의 등장으로 겪었던 일들은 제조업에서 평생 일해 온 사람들에겐 헛것으로 보인다. 제조업 종사자들은 시대의 변화에도 꾸준히 일의 질을 높이기 위해 연구하고, 설비를 닦고 조이고, 전 세계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보다 좋은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 열정을 다한다. 이런 수고를 통해 사회에 공헌할 수 있음을 기뻐하고, 자기실현을 꾀하고 있다.

남이야 뭐라고 하던 자기 일에 긍지를 가지고 열정을 다하는 것이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 교수는 진지함을 요구한 바 있다. “기업이 노동자에게 바라는 것은 ‘그 정도면 됐다’는 안주의 자세가 아니라, 정성을 다 바친 노력으로 달성하는 최대의 공헌이다.” 이런 환경이 몸에 밴 제조업 종사자들에게 신변잡기 방송 프로그램은 그야말로 허업(虛業)으로 보일 뿐이다.

일과 노동의 본질은 타인을 위함과 동시에 자신의 만족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선배들이 제조 현장에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연유이다. 내가 평생을 몸담았던 국내 철강 산업 분야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한 것도 50여년의 지난한 세월을 극복하면서 힘겹게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지금도 철강생산 현장의 엔지니어들은 신생 공업국들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밤잠을 설친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이 화두로 떠오르자 철강 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든 전통적 낙후 산업으로 치부되고 있다. 머리 좋은 청년들은 플랫폼 산업에 몰려드는 반면, 철강 기업의 문은 노크하지 않은지 오래다. 세계 최고의 철강 기술경쟁력이 단절될까 걱정된다.

시대 분위기에 맞춰 젊은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둬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렇게 너도나도 남이 만든 제품을 팔기만 한다면 우리의 일자리와 먹거리는 무엇으로 충당할까. 제품을 만드는 행위는 정보의 단순 가공과는 차원이 다르다.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정보화 산업도 제품을 직접 만들지 않는 기반 위에서라면 사상누각일 것이다.

제조 산업과 타 산업의 융합은 미래가치를 만드는 일이지만 아예 제조를 하지 않으려는 문화는 문제다. 테슬라, 마이크로소프트, 마윈 등의 성공가도를 우리 젊은이들이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만, 모든 젊은이들이 자신의 몸에 맞는 일의 가치를 찾지 못하고 첨단산업에만 몰두해서는 안될 것이다.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