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기업 패권의 조건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입력일 2017-12-20 15:07 수정일 2017-12-20 15:08 발행일 2017-12-2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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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동국제강 상무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20세기까지만 해도 중후장대 산업의 최강자는 유럽이었다. 

스웨덴 말뫼의 코쿰조선소는 세계 최대의 조선건조 능력을 자랑했다. 철강 산업을 뒤늦게 시작한 한국이 값싸고 질 좋은 철강재를 생산하면서부터 세계 조선건조 시장은 판도가 바뀌었다. 코쿰조선소는 상징과 같은 골리앗 크레인을 단돈 1달러에 한국에 팔아 버렸다. 일명 ‘말뫼의 눈물’이다.

독일 도르트문트에 소재한 티센크루프의 회르데 제철소도 유럽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철강공장이었지만 한국의 포스코가 세계시장에 등장하자 맥을 못 추고 일감이 떨어져 나갔다. 불사조라는 의미의 피닉스로 불렸던 회르데 공장은 나사못 하나에서부터 메인 설비를 몽땅 중국 사강으로 팔아야 했다.

사강은 4만 톤이나 되는 서류도 남김없이 가져갔다. 도르트문트를 먹여 살렸던 제철소가 매각되자 시민들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사강은 중국 제1의 민간철강기업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한 스마트공장을 만들고 있다.

이런 현상은 “잠자는 중국이 깨어나면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고 했었던 나폴레옹의 말이 유령처럼 나타난 섬뜩함이다. 따져보면 지난 2세기 동안 중국은 잠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가 오랜 세월 겪었던 쇠퇴와 나약함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이란 생각이 든다. 어느 면으로도 지금의 중국을 만만히 볼 부문은 거의 없다.

패권의 역사는 도전 정신에서 시작되지만 인접한 국가의 재빠른 성장은 잠자고 있던 이웃을 일깨우기도 한다. 새로운 시작은 ‘패스트 팔로우’ 정신으로 따라가면 된다. 프랑스와 독일이 영국보다 철강 산업이 80년 이상 뒤늦은 것을 알고 영국에 몰래 숨어 들어 철강기술을 배웠고, 한국의 민간 철강기업들도 일본 야하다 제철소에서 기술을 배우느라 눈물겨운 고생을 겪었다.

이공계 대학을 나온 엔지니어들이 공장 바닥을 쓸고 닦으면서 선진 기술을 하나씩 배웠던 일들이 오늘의 한국 철강 산업을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니게 한 원동력이다. 이젠 수성이 필요하다.

많은 정상권의 기업들은 자만하다 좌초했다. 한국의 철강 기업들이 1990년대 초반에 세계 철강시장에 당당히 등장했을 때 독일 티센크루프의 회르데 제철소 철강노동자들은 1주일에 35시간만 일하자고 파업을 일으켰다. 중심이 흔들린 회르데 제철소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락으로 떨어졌다. 재기를 위해 경쟁사와 합병, 가격인하, 경쟁력 강화 등을 논의 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경쟁력이 무너지면 종사자들의 숙련된 기술 따위는 기업사활에 도움이 안된다. 기업의 이름도, 공장 설비도 흔적 없이 사라진 휘르데의 몰락은 현실안주였다.

한국의 철강 기업들은 ‘퍼스트 무버’로 달리고 있다. 세계 최고의 칼라강판이라든지 초고강력 강판의 개발, 새로운 시장 개척 등에 기업력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철강 전방산업의 미래는 어둠의 그림자가 짙다. 자동차 산업은 걸핏하면 노동쟁의가 튀어 나오고, 조선 산업은 매출 목표를 대폭 축소하고 있다. 내년도 사업계획을 확정해야 하는 철강사 경영진들의 고뇌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애써 쌓아 올린 세계적인 경쟁력을 수성하기 위해 무엇이 할 것인지 기업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종사자들이 한발씩 물러서서 냉정한 시각으로 미래를 개척해야 할 것이다. 패권의 비밀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의식부터 추방하는 일이다.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