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다시 돌아와서 좋니, 윤종신?

이재경 건국대 교수/변호사
입력일 2017-11-09 16:07 수정일 2017-11-09 18:33 발행일 2017-11-1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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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경 건국대 교수/변호사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혹은 ‘올드보이를 위한 자리는 없다’를 외치고 안티-에이징(Anti-aging)을 떠들고 있는 세상에 ‘구관이 명관’이라는 구 격언은 오히려 새롭다.

하지만 올드보이의 가치는 1951년 4월 19일, 6·25전쟁 당시 UN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대중문화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흘러간 줄로 알았던 가수들의 노래가 새롭게 들리고 노익장의 연기에 더 끌리며 각 예술분야의 베테랑들이 펼치는 문화 향연이 더욱 감동스럽다.

한 가지 작은 사건부터 보자. 90년대 가수이거나 경연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인 줄만 알았던 윤종신의 음원 차트 정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저 아이돌 음악, 댄스곡들만 있는 줄 알았던 대중음악계를 강타한 ‘좋니’ 1위 등극 사건은 성인 취향의 어덜트 컨템퍼러리 장르의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동시에 청소년부터 노년층까지 모든 층의 귀를 열게 하는 음악접착제의 등장인지도 모른다.

가사부터 선율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노래가 필요하다는 얘기는 한참 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배리 매닐로우, 셀린 디온 등 아직도 공연장 전 좌석을 매진시키는 가수는 그저 먼나라 얘기처럼 들리기만 했다.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나이 차이만큼이나 각자의 음악적 취향이 달랐다. 댄스 아니면 성인가요 또는 흘러간 발라드에 그들의 귀를 파묻을 뿐 고개를 옆으로 위로 아래로 돌리는 일이 없었다. 이는 음악 뿐 아니다. 드라마, 영화, 공연, 전시 등 분야마다 자신이 속한 연령집단을 넘어 다른 집단의 예술인들에게 환호와 신뢰를 보내는 일은 드물었다. 각 연령대마다 즐길 수 있는 음악, 드라마 등이 특정 장르에 국한되어 있다 보니 세대 단절, 소통 부재의 상황으로까지 자연스레 내달렸다.

사실 이는 음악적 취향의 문제나 좋아하는 배우, 즐기는 그림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화합의 끈이 끊기는 사태를 초래하며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연결됐다. 초고령사회가 가속화되면서 세대간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세대마다 요구하는 사항이 다르고 불만도 쌓여만 간다.

이에 윤종신을 비롯해 각 세대를 아우르며 감동을 줄 수 있는 뮤지션들, 갈수록 연기가 무르익어가는 배우들, 다양한 분야의 노련한 예술가들은 ‘소통’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에 답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어리고 경험이 일천한 엔터테이너들에게 시대적 과업을 기대할 수는 없다. 자신이 속한 세대에만 파묻히려고 한다면 그저 묻히고 만다. 요즘같은 정치·사회·문화적 격변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세대간 소통이다. 이제는 자신만의 열렬한 팬층을 넘어 젊은층, 나이 든 이들까지 겨냥하는 문화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세대간 통합이 시대적 사명으로 부각되는 것도 이때문이다. 갈등을 부추기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절실하다. 이는 각자 듣고 즐기던 음악, 영화, 그림 등에 공감하는 몸짓에서부터 시작되는 과업이다. 올드 보이의 귀환이 반가운 이유다. 노병은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들은 매일매일 젊어지고 있다. ‘통합’이라는 시대정신과 함께.

이재경 건국대 교수/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