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백세시대 '추억놀음'을 경계하라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입력일 2017-03-23 15:04 수정일 2017-03-23 15:05 발행일 2017-03-24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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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사람은 기억을 먹고 산다. 살아온 날이 길어진 고령사회에선 그래서 기억을 반추할 여지가 잦고 많다. ‘어디 만만찮은 삶이 없을까’만은 기억은 날선 아픔보다 뿌연 행복으로 채색되기 마련이다. 괴로웠을지언정 훌훌 털어낼 수 있는 까닭이다. 기억은 현실이 힘들 때 자주 소환된다. 아련함 속에 그리워진다. 퇴행반응이라 폄하할 일은 아니다. 현실의 만만찮은 파고에 허우적댈수록 왕년의 좋았던 날들(?)이 조건반사처럼 무심하게 떠오르는 건 자연스럽다. 이런 기억은 현실을 버텨내는 또 다른 에너지다. 단 조심할 게 있으니, 결코 그 때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기억은 무섭다. 뇌리에 한번 정착된 기억은 두고두고 사람을 옭맨다. 때론 현실과 접목돼 기억 속의 생존원리를 그대로 채택한다. 시대가 변했는데 여전히 과거의 논리로 눈앞의 삶을 살아가려는 경우다. 안 된다. 패러다임은 변했다. 압축성장의 경제논리와 생존전략은 결코 재현되기 힘든 기억일 따름이다. 바꿔야 살아남는다. 나이가 들어 몸은 줄어들었는데 현역시절 옷을 껴입어 본들 맞지 않는다.

하물며 자녀세대에게 자기 기억 속의 인생경로를 강권해도 곤란하다. 저성장의 상황논리는 후속세대에게 다른 형태의 행복모델이 옳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주지하듯 우리는 불행시대에 산다. 한숨과 짜증이 반복된다. 일부 금수저를 제외하면 예외는 없다. 오늘은 버텨내도 내일은 어찌 될지 모른다. 괴롭고 힘들며 아프다. 절망을 끊고 희망을 찾자고 외치지만 답 없는 메아리일 따름이다. 원인이 뭘까. 잔가지는 많지만 뿌리는 하나다. 고단한 호구지책 탓이다. 고용불안, 요컨대 일이 문제다. 삶은 밥, 생존은 소득인데 일이 흔들리니 모두가 절망한다. 결국 ‘절망을 희망’으로 치환하려면 답은 간단하다. 안정적인 밥벌이의 확보다. 탄탄한 일자리가 희망의 불씨다.

불행은 점증된다. 뒤집으면 예전엔 불행이 덜했다. 하루하루 고된 건 맞지만 지금처럼 집단절망에 빠지진 않았다. 열심히 일하면 나아질 것이란 희망과 경험이 살아갈 맛을 줬다. 배고팠지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믿고 땀방울을 흘렸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이다. 그때가 지금보다 행복했다고 느끼는 것은 ‘고용안정’ 덕이다. 임금은 낮아도 매년 늘어났고, 웬만하면 정년까지 한곳에서 일했다. 고용안정은 경제성장 덕이다. 성장환경에 맞춰진 고용모델은 톱니바퀴처럼 정합성을 지닌 임금모델과 가족모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주거비, 교육비, 의료비, 노후비 등은 고용안정으로 해결됐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고용불안은 대한민국의 만성질환이다. ‘정규직→비정규직’의 하향평준화로 양질의 고용이 줄었다. 청년들은 사회에 진입하면서부터 일회성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일자리 부족은 ‘고용불안→결혼포기→출산감소→인구감소→시장축소→매출감소→실업증대→재정악화’의 악순환을 만들어 낸다. 해결책은 없을까. 결국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기업인데 살아남아야 할 기업으로선 필요하지 않은 인력을 더 뽑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방안은 하나뿐이다. 절약전략, 핍박전략이다. 줄어든 몸에 맞춰 옷도 줄이는 게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다. 아련한 추억 대신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일 때 백세시대 생존가능성은 높아지는 법이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