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칼럼] 노선배의 가르침 ‘엇박자도 귀에 담아라’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입력일 2017-01-26 09:06 수정일 2017-01-26 15:58 발행일 2017-01-26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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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상무님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

설날을 앞두고 옛 직장 동료들과 모임을 가졌다. 50대부터 70대까지 여덟 명의 멤버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졌거나 각 분야에서 중량감 있게 일 해오다 은퇴했다. 고향도 다르고, 출신학교도 다르지만 석 달에 한번씩, 32년 동안 저녁 모임을 지속해 온 것은 직장이란 한 울타리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인연 때문이다.

만남의 연락은 쉰 살이 넘은 막내들 몫이다. 매 번 적극적으로 연락하지 않았다면 아마 칠순 선배는 남이 되었을 것이다. 만나면 즐거웠다. 가정사도 늘어놓고, 때로는 대선배에게 어기장도 부렸다. 다 받아주었다.

그러나 매년 1, 2월에는 백수가 하나씩 는다. 이제 현역 월급쟁이는 달랑 둘만 남았다. 60~70대의 선배들은 현역들에게 경제 환경을 묻느라 신입사원의 눈빛이었지만, 최근 일손을 놓은 그 옛날의 과장님들은 맥 빠진 얼굴이었다.

지난해만 해도 저녁 식사비용 일체를 서로 내겠다고 나섰는데 어쩐지 불안했다. 후배들은 혹시라도 마음이 상할까봐 말을 섞으면서도 조심하는 눈치였다. 이렇게 현역과 퇴역의 차이는 마음 씀씀이부터 달랐다.

소주 몇 순배가 돌아가자 일행은 과거 속으로 몰입됐다.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건 잊지 못할 사건의 공회전 때문이었다. 정말, 안타깝고, 황당한 일이었다.

1985년 2월 21일, ‘국제그룹 공중분해.’ 그것이 멤버들의 기억 속을 맴도는 것이다. 가슴에 응어리지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망각되지 않는 아픔. 전 국제그룹 임직원들은 그때 일을 상기하면 거품을 문다. 이구동성으로 “죽일 놈들”이란 말을 거칠게 내 뱉는다.

직장을 천직으로 알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했었다. 열사의 땅 사우디의 사막 한 복판에서, 아프리카의 정글과 오지에서, 백호주의가 만연한 호주의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현장에서, 가족과 떨어져 온 몸을 불사르며 청춘을 바쳤었다. 그런 직장이 권력에 의해 한 순간에 공중분해되다니. 정말이지 일방통행식의 기업 해체는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최근 ‘최순실게이트’에 연루된 대기업들이 정치권과 검찰, 그리고 여론의 뭇매를 맞는 것을 보노라면 혹시라도 ‘제2의 국제그룹’이 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 하기만 하다.

아무튼, 그때의 일은 세월의 흐름에 묻혀져 갔고, 각자도생으로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조금 잘 나가는 멤버들은 설날과 추석 명절 때면 멋쩍지만 조그마한 과일 상자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난, 아직도 여러분들과 같이 일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

“내 나이가 칠순 한복판인데 후배님들을 보면 미안해. 앞으론 자주 못 나올 것 같아….”

일명 ‘보스’라는 닉네임을 붙일 정도로 저돌적이고, 물불 안 가리며, 해외 곳곳을 헤집고 다녔던 노년의 대선배의 한 마디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이젠 나서서 말하기 보다는 주로 들어주고 마무리만 해주는 것이 우리 몫이야.”

“후배님들도 그렇게 살아야 해.” 노선배의 말이 상사와 부하직원들간의 바람직한 처세의 알림으로 다가왔다. 내게도 분명 내 생각을 너무 앞세우다 소통의 맥을 놓쳤던 일들이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땐 남의 말이 분명히 엇박자로 들렸으리라. 누군가에게는 엇박자가 더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했었을 것이다.

흉흉한 민심에 더욱 팍팍해진 ‘인생살이’지만 “선배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입니다. 새핸 더욱 힘내십시오”라는 덕담으로 설날 아침을 열고 싶다.

김종대 전 동국제강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