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칼럼] 순실의 시대, 상실의 시대

이재경 건국대 교수/변호사 기자
입력일 2016-11-09 14:54 수정일 2016-11-09 14:56 발행일 2016-11-1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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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경 건국대 교수/변호사

요즘은 그 어떤 코미디도 그 어떤 예능 프로그램도 별로 재미가 없다. 이미 충분히 코믹하고 리얼한 사건이 이 땅에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더더욱 눈길을 끌지 못한다.

너무나도 흥미진진한 일이 ‘최순실 게이트’라는 이름으로 스펙타클하게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시나리오 작가도, 그 어떤 연출가도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그야말로 참담, 환멸 그 자체다. 문화예술계, 스포츠계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심정은 아마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작년쯤 정윤회 딸의 승마 특혜 시비, 올해 가을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소동이 불거져 나올 때만 해도 여느 정권에서 터져나올 법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JTBC 특종을 시발점으로 국민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는 역대 최악의 부패 스캔들이자 국격을 한없이 추락시키고 있다. 한반도의 시계바늘을 봉건시대의 시점으로 무참하게 후퇴시킨 치욕이다. 

아직도 밝혀야 할 진실은 저 건너편에서 웃고 있겠지만 문화계 황태자 차은택, 체육계 대통령 김종이라는 주연급 조연까지 당당하게 등장시켰던 흑역사가 드러나면서 대한민국의 문화산업이 앞으로 겪어야 할 잔혹사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현 정권을 찬란하게 수놓았던 문화융성, 문화창조벨트 뿐 아니라 평창올림픽을 포함한 각종 굵직한 사업들과 이벤트들은 이제 아예 접거나 그 지원 규모가 현저히 줄어들 위기에 처해있다. 

프라다를 신지 않더라도 악마의 손길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방으로 뻗치고 있었으니 이제 앞으로 그 누가 문화산업의 틀을 감히 재건해낼지 캄캄하기만 하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가 그렇게도 열망하고 헌법에서도 주창하는 문화국가의 꿈이 이렇게도 허무하게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아 두렵고 슬프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느껴야 하는 좌절과 슬픔을 그저 몇몇 악명높은 실세들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더 비겁하다. 하루키가 얘기했던 ‘상실의 시대’에 한없이 낙담만 하고 있을 것인가.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바로 눈앞의 이익에만 너무 급급했던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을 되돌아보자고 제안한다면 한가로운 사치에 불과할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누가 뭐래도 이러한 농단 사태는 시스템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투명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순실 같은 독버섯은 불투명성을 자양분으로 먹고 자란다. 문화산업 뿐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쳐 정책의 수립 및 운영이 투명한 시스템이 아니라 일부 비선 세력의 독단에 의존하는 관행이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아베 총리의 모든 점심, 저녁 일정을 총리 관저에 주재하는 기자들이 일일이 쫓아다니며 기록하기 때문에 감시할 수 있다는 일본의 관행이 답답하고 우습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놀랍고도 부럽다. 문화산업을 포함해 국정전반의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던 우리에게는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얘기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 모두 수긍하고 마음 속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시스템이 문화정책에 도입돼야 한다. 한 나라의 국격을 좌우하는 문화예술산업일수록 어느 한 방향에 치우치지 않도록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고 견제하는 과정이 더욱 절실하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도 결국 시스템 부재, 방향성과 공정성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던가. 어이상실, 어이순실의 시대를 지나 더 단단해질 우리 문화산업의 생태계를 꿈꿔본다.

이재경 건국대 교수/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