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인 기자

편집부 기자

kimyi@viva100.com

[김영인 칼럼] 정력제 말벌집

김영인 논설위원성묘 등을 갔다가 벌에 쏘이는 바람에 병원을 찾은 사람이 지난해 13만232명이나 되었다는 소식이다.  벌 중에서도 가장 껄끄러운 것은 말벌이다.  잘못 쏘이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 무서운 말벌을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말벌집'을 먹어치워 버리는 것이다.  집을 먹어치우면 말벌은 살 곳이 없어지게 된다.  게다가, 말벌집은 대단한 '정력제'로 알려지고 있다.    말벌집이 정력에 '짱'이라는 얘기는 '신라 법사방'에 나온다.  신라 때 어떤 법사가 만든 비방이다.  말벌집을 의미하는 '노봉방(露蜂房)'이라는 이 비방은 다음과 같다.  "음력 8월에 벌집을 따서 평평한 곳에 하룻밤 정도 묵힌다.  그리고 벌집을 비단주머니에 넣고 긴 막대기에 매달아 그늘에서 100일 정도 말린다.  그러면 '신묘한 영약'이 된다.  그런 다음에 벌집을 잘라서 끓이면 흰 재가 생긴다.  이 재를 술에 타서 마시거나, 침에 개어서 남성에 바른다."      이 영약을 바르면 '강여철주(强如鐵鑄), 장대삼촌(長大三寸)'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철주처럼 강해지고, 3촌이나 늘어난다는 소리다.  몸이 튼튼해지고, 기력이 7배나 강해진다고 했다.    "한 번만 바르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40일을 바르면 몸이 점점 튼튼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00일 동안 바르면 죽을 때까지 손상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해질 수 있다.… 원하는 것을 다 이루고 무병장수할 수 있다.… 한여름에는 찬 기운이 몸에서 솟아 더위를 쫓아준다.  한겨울에는 따뜻한 것이 치솟아 사기를 막아 재앙을 떨쳐준다.… 강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약을 술로 빚어서 늘 마시면 된다.  길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약을 바르고, 커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골고루 바르면 된다." 동의보감 등 의학서도 말벌집을 볶아서 가루 내어 먹거나, 술에 타서 마시면 정력에 좋다고 했다.   또 다른 비방도 있다.  깊은 산 속의 적송(赤松) 잎을 생즙으로 만들어 마신다.  또는 자루에 담아 옥계수, 즉 맑은 계곡 물로 우려낸 다음에 천일염으로 간을 맞춰서 먹는다.  그늘에 말렸다가 가루를 내서 꿀에 갠 다음에 송홧가루를 섞어 콩알만한 환으로 만들어 먹어도 된다.  그러면 남성에 좋다.  그래서 솔잎을 '나무에 매달린 산삼'이라고 했다.    하지만, 말벌집을 빼앗기 전에 한번쯤 생각해볼 게 있다.  개발이다, 뭐다 하면서 말벌의 영역을 오늘도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9-07 15:04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김영인 칼럼] ‘견공오륜(犬公五倫)’

김영인 논설위원‘견공오륜(犬公五倫)’이라는 말이 있다. ‘멍멍이’는 자기들 사회의 윤리를 꿰뚫고, 지킬 것은 지킨다는 얘기다. 인간은 ‘삼강오륜’을 종종 무시하지만 견공은 ‘견공오륜’을 어기지 않는다. 그래서 견공은 ‘불특정다수의 인간’보다 나을 수도 있다. ① 지주불폐(知主不吠)하니, 군신유의(君臣有義).견공은 주인을 받든다. 주인을 향해서는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사람은 걸핏하면 윗사람에게 대들고 악담을 한다. 정치판에서 특히 그렇다.② 모색상사(毛色相似)하니, 부자유친(父子有親).견공은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닮는다. 인간은 때때로 부모를 닮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은 물론이고 몸매까지 뜯어고친다. 머리털 색깔을 부모와 다르게 바꾸기도 한다. 견공은 성형수술도, 염색도 하지 않는다. 일편단심 ‘모색상사’다.③ 일폐중폐(一吠衆吠)하니, 붕우유신(朋友有信).견공은 동료가 짖으면 일제히 따라서 짖어준다. ‘견공 사회’의 의리다. 견공은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밟고 올라가지 않는다. 항상 도와주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다르다. 상대방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를 ‘기회’로 삼는다. 뒤통수를 후려친다.물론, 인간도 와르르 행동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누가 나랏돈을 펑펑 쓰니까, 누구도 신나게 쓰고 있다. 내가 희망퇴직을 하니까, 너도 따라서 하고 있다.④ 잉후원부(孕後遠夫)하니, 부부유별(夫婦有別).견공은 새끼를 가지면 ‘성생활’을 기피한다. 수컷의 접근을 거부한다. 철저하게 ‘부부유별’이다.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아버지가 딸을 건드리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하고 있다.⑤ 소부적대(小不敵大)하니, 장유유서(長幼有序).‘견공 사회’에는 돌이킬 수 없는 위계질서가 있다. 작은 견공은 큰 견공 앞에서 꼬리를 내린다. 먹이를 먹을 때도 순서가 있다. 인간은 늙은이가 지하철을 서서 타고 다니는 일이 다반사다.이렇게 윤리를 알기 때문인지, ‘특별대우’를 받는 견공도 생기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청사 방호견’이다. 시민들이 ‘바친’ 세금으로 관리하는 견공이다.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9-04 08:38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김영인 칼럼] 피카소를 살린 담배

김영인 논설위원‘담배=약’이었다. ‘성호사설’은 △가래가 목에 걸렸을 때 △비위가 거슬려 침이 흐를 때 △소화가 되지 않아 눕기 불편할 때 △먹은 것이 가슴에 걸려 신물을 토할 때 등에 좋다고 했다.서양사람 하멜은 ‘하멜 표류기’에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피우고 심지어는 4∼5살 먹은 아이들도 피운다. 피우지 않는 사람을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라며 우리 담배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착각이었다. 아이들에게 담배를 먹인 것은, 회충을 없애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담배=회충약’이기도 했다. 서양에서도 ‘담배=약’이었다. 장 니코라는 사람이 1599년 담배를 본국인 프랑스로 보냈더니, 두통약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교황에게는 ‘천식 특효약’으로 진상되기도 했다. 파블로 피카소는 태어났을 때 웬일인지 숨을 쉬지 않았다. 죽어서 태어난 것이다. 모두들 ‘사산’으로 여겼다. 마침 피카소의 삼촌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삼촌은 담배연기가 가득한 입김을 피카소의 폐 속으로 불어넣었다. 그러자 피카소가 울음을 터뜨렸다. ‘소생’한 것이다. 담배가 없었더라면 위대한 미술가는 세상 구경도 못해본 채 버려질 뻔했다. 그랬으니, 담배는 더욱 ‘약’이 아닐 수 없었다.담배는 ‘호구지책(糊口之策)’에도 필수적이었다. 옛날 종로거리에는 가게가 즐비했다. 가게 주변에는 흥정을 붙여주고 판매액의 일부를 뜯어서 먹고사는 ‘연립꾼’이 있었다. 그들은 물건을 살 만한 손님이 나타나면 소매부터 잡아끌어 가게 안에 준비해 놓았던 ‘기사미’부터 내밀었다. 기사미는 잘게 썬 고급 담배다. 불을 붙여주면서 흥정을 시작했다. 담배가 없었다면,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힘들었다.독일 작곡가 브람스가 ‘아줌마 부대’에게 포위당했다. 짓궂은 질문이 쏟아졌다. 브람스는 엉겁결에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연기가 구름처럼 퍼졌다. 아줌마 부대가 따졌다. “여자 앞에서 실례가 아닌가요?” 브람스가 재빨리 변명했다. “글쎄요, 나는 천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구름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졸지에 천사가 된 아줌마 부대는 더 이상 브람스를 공격할 수 없었다. 담배에는 이런 희한한 효능도 있었다.그런데, 대한민국 정부는 이 좋은 담뱃값을 올리려 하고 있다. 그것도 ‘왕창’이다.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9-03 09:01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김영인 칼럼] 메뚜기와 '관음토'

김영인 논설위원펄 벅(1892∼1973)의 명작 '대지'에 메뚜기떼가 농작물을 덮치는 장면이 나온다.    "…남쪽 하늘에 검은 구름처럼 지평선 위에 걸려 있더니 이윽고 부채꼴로 퍼지면서 하늘을 뒤덮었다.  세상이 온통 밤처럼 캄캄해지고 메뚜기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들이 내려앉은 곳은 잎사귀 하나 볼 수 없고, 모두 황무지로 돌변했다.  아낙네들은 향을 사다가 지신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렸고, 남정네들은 밭에 불을 지르고 고랑을 파며 장대를 휘두르며 메뚜기 떼와 싸웠다."  메뚜기는 이렇게 인간의 식량을 바닥내고 있었다.  메뚜기와 싸우던 인간은 굶주림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배고픔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처음뿐이었다.  그 때가 지난 지 이미 오래다.  이제 뱃속에서는 그렇게 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먹을 수밖에 없었다.  땔감으로 모아뒀던 옥수수 대까지 먹고 있었다.  "…옥수수 대를 갉아먹은 적이 있었다.  다른 풀을 먹는 것보다는 나았다."  마지막으로 먹는 것은 '흙'이었다.   "…밭의 흙을 파다가 아이들에게 먹였다.  이 흙을 물어 풀어서 며칠 간의 요기를 했다.  '관음보살님'의 흙이란 이름을 가진 그 흙에는 약간의 영양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 흙으로 언제까지나 생명을 이어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얼마동안은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다.  헛배부른 배를 메울 수가 있었다." 관음보살의 흙, '관음토(觀音土)'는 배고픔을 견딜 수 있는 '자비로운 흙'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오장육부가 비상하다고 해도 흙을 소화시킬 재간은 있을 수 없다.  많이 먹으면 몸이 부어오르다가 결국은 죽게 된다고 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흙에서 심한 비린내가 났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 무서운 메뚜기떼가 전남 해남 지역에 나타나고 있었다.  몇 십억 마리나 되는 메뚜기가 농작물을 냠냠하고 있었다.  추석 민심까지 함께 해치우고 있었다.  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8-31 10:32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김영인 칼럼] '가유삼성 마을'

김영인 논설위원‘가유삼성(家有三聲)’이라고 했다. ‘3가지 소리가 들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 3가지 소리는 아이의 울음소리인 ‘해성(孩聲)’과 베 짜는 소리 ‘기성(機聲)’, 그리고 책 읽는 소리 ‘독성(讀聲)’이다. ‘가유삼성’이 울리는 집은 좋은 집이다. 아이가 울어대니, ‘저출산’과는 거리가 먼 집이다. 일하는 소리가 들리니, 요즘 같은 불황에도 일자리 걱정이 없는 집이다. 책 일는 소리가 들리니, 계속 노력하고 발전할 수 있는 집이다.따라서 가족이 화목하지 않을 수 없는 집이다. 가정의 불화나 갈등 따위는 있을 재간이 없는 집이다. 한마디로 ‘부러운 집’이다. 그런데, 마을 전체가 ‘가유삼성’인 곳이 있었다. 말하자면, ‘가유삼성 마을’이다. 또는 ‘이유삼성(里有三聲)’이다. 본지가 취재한 충북 영동 백화산 중턱에 있는 ‘백화마을’이 그런 곳이었다. 본지 보도에 따르면, 이 마을은 불과 4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미니 마을’이다. 그렇지만 ‘작지만 시끄러운 마을’이다.생후 18개월부터 89세의 노인이 함께 살고 있는 ‘100세 마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창 일할 나이인 30∼40대 가장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아기 울음소리, 일하는 소리, 책 읽는 소리가 하루 종일 아름다운 화음을 이룰 수 있을 만했다. 지금과 같은 인구 감소 추세가 이어질 경우, 2750년이 되면 대한민국 인구가 ‘소멸’될 것이라는 끔찍한 전망이 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정치를 하고,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 마을을 좀 주목했으면 어떨까. 나라 전체에서 3가지 소리가 들리는 ‘국유삼성(國有三聲)’의 해법이 혹시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다. 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8-25 16:20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김영인 칼럼] ‘성추행 군대’

김영인 논설위원고려 때 ‘양반군대’라는 게 있었다. 충주까지 밀려온 몽골의 군사를 맞아, 부사 우종주(于宗柱)가 ‘양반별초(兩班別抄)’를 거느리고 지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싸움이 되지 못했다. 겁을 잔뜩 먹고 벌벌 떨다가 모조리 달아나고 말았다. 부사도 양반별초와 함께 도망치고 있었다. 끝끝내 버티며 몽골 군사를 격퇴한 것은 ‘노예군대’였다.  당나라 때에도 비슷하게 희한한 군대가 있었다. 황소(黃巢)의 반란군이 낙양을 위협하자, 조정에서 ‘신책군(神策軍)’을 부랴부랴 파견했다. 하지만 신책군은 부대의 명칭처럼 귀신같은 계책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부잣집 아들’로 구성된 군대였다. 무기도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의 오합지졸이었다. 그나마 군대에 끌려가기 싫다고 울며 떼를 쓰는가 하면, 환자수용소인 병방(病坊)에서 앓고 있는 사람을 돈 주고 사서 대리로 출정시키기도 했다. 신책군처럼, ‘신성한 군대’는 또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편성한 ‘신성대(神聖隊)’다. 신성대는 ‘동성연애자’ 300명을 선발해서 만든 특수부대였다. 이들은 당나라의 신책군과 달리 막강했다. 패배를 모르는 군대였다고 했다. ‘사랑하는 애인’을 위해서 악착같이 싸웠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병사들은 여성과 동침할 경우 육체를 낳는데 그치지만, 남성끼리 동침을 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정말로 희한한 군대가 등장하고 있다. ‘폭력군대’를 넘어서 ‘성추행군대’가 생긴 것이다. 어떤 부대에서는 선임 일병 등 3명이 후임 일병 7명의 볼에 키스를 하고, 귀를 깨물고, 목덜미를 핥고 있었다. 그랬으니 ‘집단’ 성추행군대였다. 30여 차례나 추행을 했다는 보도다. 그렇다면, ‘집단, 상습’ 성추행이었다. 아이들 군대 보내기 무섭다는 얘기가 또 나오고 있었다.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8-21 10:03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김영인 칼럼] “검둥이는 거짓말쟁이”

김영인 논설위원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 죽은 고양이로 사마귀를 제거하는 방법을 놓고 말다툼을 벌이고 있다. 사마귀를 뗄 수 있다, 없다는 입씨름이다. “그러면, 네가 사마귀를 뗀 적 있어?”“나는 없지만 밥이 해봤대.”“밥이 해봤다고 누가 그랬는데?”“밥이 제프에게 얘기하고, 제프가 자니에게, 자니는 짐에게, 짐은 벤에게 얘기했어. 그리고 벤이 어떤 검둥이에게 얘기한 것을 그 검둥이가 나에게 들려준 거야. 그러니까 틀림없는 사실이야.”“아니야. 거짓말이야. 거짓말하지 않는 검둥이는 없어!”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얘기다.톰과 허클베리의 친구들에게는 모두 이름이 있다. 밥, 제프, 자니, 짐, 벤 등이다. 그렇지만 검둥이는 이름조차 없다. 단지 ‘어떤 검둥이’일 뿐이다. 게다가 검둥이는 죄다 거짓말쟁이다. 마크 트웨인은 이런 식으로 작품 곳곳에 흑인을 비하하는 듯한 표현을 담고 있다.‘톰 소여의 모험’은 독자층이 대체로 아이들이다. ‘백인’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흑인을 내려다보는 우월감을 느끼며 자랐을 것이다.하기는, 흑인은 제대로 된 인간에 들지 못했다. 미국이 헌법을 만들 당시, ‘자유신분 흑인’에게는 투표권을 주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어림도 없었다. 흑인에게 투표권 따위를 줄 까닭이 없었다.그러면서도 인구를 계산할 때는 흑인을 포함시키고 있었다. ‘표’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백인과 똑같이 대해줄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흑인을 ‘그 밖의 모든 인간’으로 분류, 백인은 1명을 1명으로, 흑인은 1명을 0.6명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그랬으니 흑인은 애당초 ‘60%만 인간’이었다. ‘불완전한 인간’이었다.미국의 흑인 소요가 간단치 않다는 소식이다. 미주리주의 작은 도시 퍼거슨에서는 비상사태까지 선포되고 있다. ‘백인’으로 알려진 경찰관이 10대 흑인 소년을 사살한 게 발단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 경찰관도 어렸을 때 ‘톰 소요의 모험’을 열심히 읽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8-18 07:50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김영인 칼럼] 이순신이 잡은 ‘청어’

김영인 논설위원임진왜란 때 일이다. 난을 피해 평양으로 옮긴 선조 임금이 ‘평양 사수’를 선언했다. 백성은 그 말을 믿고 평양으로 몰려들었다. 여러 고을에서 양곡도 운반해 챙겨놓았다. 모두 10만 섬이나 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왜병이 대동강 건너편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의주로 도망치고 말았다. 분노한 백성은 궁녀와 대신의 길을 막고, 몽둥이질까지 했다. 선조는 그 와중에도 궁녀를 빠뜨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경황이 없어서 양곡까지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평양에 쌓아두었던 양곡은 고스란히 왜병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빼앗긴 10만 섬은 5만 병력이 넉 달을 먹을 수 있는 양곡이었다.7년이나 계속된 왜란 동안 군사들은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백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굶어죽는 백성이 간단치 않았다.이순신 장군의 수군이라고 나을 것은 없었다.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장군이 아닌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군사들을 먹일 방법을 찾고 있었다.농사를 지어서 군사들을 먹이는 ‘둔전(屯田)’이었다. 군사들이 농사를 하니까, 배고픈 백성도 모였다. 함께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솥을 걸고 소금도 구웠다.더 있었다. ‘청어’였다. 전투가 없는 날은 군사들을 동원해 바다로 나가서 청어를 잡았던 것이다. 잡은 청어를 부식으로 먹이고, 남는 것은 가공해서 내다 팔아 모자라는 양곡과 군수물품을 조달할 수 있었다. 백성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전쟁에 지친 백성은 이순신이 공급해주는 청어로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었다.이순신은 이를 ‘난중일기’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물론 농사도, 청어도, 제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1개월 식량밖에 없으면 ‘한달 군대’, 하루 식량밖에 없으면 ‘하루 군대’가 된다고 했다. 배가 고프지 않게 된 군사들은 사기가 높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충무공의 리더십’이었다.정치하는 사람들이 영화 ‘명량’을 관람하면서 좀 느꼈으면 싶은 리더십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국민을 잘먹고 잘살게 해줘야 리더십이고 정치다. 그래서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이라고 했다.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8-10 15:51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김영인 칼럼] 야릇한 목욕 사건

김영인 논설위원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은 고려 사람들이 목욕을 자주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썼다.  고려 사람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반드시 목욕하고 출타한 뒤, 돌아와서 또 목욕을 한다고 했다.    서긍은 남녀가 어울려서 ‘혼욕’을 하는 것도 목격했다.  “여름날 냇물에서 남녀가 벌거벗고 목욕하는데,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지만 서긍은 착각하고 있었다.  당시의 목욕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서 부정을 멀리하기 위한 ‘재계(齋戒)’였다.  우리는 음력 6월 15일인 유두일(流頭日)이 되면 남녀는 물론이고 노소까지 ‘동쪽으로 흐르는 물(東流水)’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이런 목욕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야릇한 목욕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 초, 문종 임금 때였다.    이효경(李孝敬)이라는 사람의 아내 설(薛)씨는 대단한 ‘얼짱’이면서도 음란했다.  남편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지 불로(佛老)라는 젊은 하인과 ‘상시로’ 못된 짓을 벌였다.  그러다가 임신을 하자 남편의 아이라고 우겼다.    설씨는 ‘남편의 동서’인 이군생(李群生)과도 바람을 피웠다.  이군생이 어느 날 집으로 찾아오더니, 몸이 좋지 않다며 슬그머니 자리에 누워버렸다.  설씨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설씨가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설씨는 이웃집 김한(金澣)과도 눈이 맞았다.  김한은 ‘용모가 단정했으나 음탕하고 방종하여 그침이 없는 사람’이었다.  추문은 곧 온 동네로 퍼졌다.    설씨는 냇가에서 ‘S 라인(?)’을 드러내고 목욕을 하면서 지나가는 사내들의 눈길을 노골적으로 빨아들이기도 했다.  당시 ‘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혹은 날이 저물 때를 이용하여 계집종 하나를 거느리고서 미복을 하고 가로(街路)에서 놀기도 하고, 혹은 여름철을 만나면 앞 냇물에서 목욕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몸을 더럽히기를 구하기도 했는데…”    어쨌거나, 우리는 이렇게 목욕을 즐겼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복날에는 목욕을 피했다.  “복날에 시내 또는 강에서 목욕을 하면 살이 여윈다”는 민간 신앙 때문이다.  그래서 삼복에는 아무리 무더워도 목욕을 참았다.  만약 깜빡하고 초복에 목욕을 했다면, 중복과 말복에도 거르지 않았다.  그래야 살이 빠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옛날에는 살이 빠지는 것을 걱정했지만 오늘날은 돈 써가며 살을 덜어내는 세상이다.  이 속신(俗信)을 거꾸로 적용해서 복날 시내가 흐르는 곳에서 목욕을 하면 어떨까.  그러면 아주 쉽게 ‘다이어트 효과’를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7일은 말복이다.  올해로서는 복날 살 좀 뺄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계곡이나 강을 찾아서 정말로 살이 빠지는지 실험해 보는 것이다. 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8-05 14:57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김영인 칼럼] 이순신의 바다 공부

김영인 논설위원이순신 장군이 전라 좌수사라는 중책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다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래야 바다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닷가의 ‘지역 주민’이었다.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바닷가 백성들을 좌수영으로 초청,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관복을 벗은 채 백성과 함께 날마다 술타령을 하며 대화를 나눴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높으신 ‘나으리’인 이순신을 어려워했다.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숙해질 수 있었다.  웃고 농담까지 주고받게 되었다.  바닷가에서 사는 사람들인 만큼, 그들과의 대화는 고기 잡고 조개 캐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어느 곳에 가면 물이 소용돌이쳐서 배가 뒤집힌다, 어느 여울에는 암초가 있어서 그쪽으로 가면 배가 부서진다는 등의 얘기도 나왔다.  이순신은 그런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직접 가서 확인하거나 거리가 너무 먼 곳은 부하들을 시켜서 살펴보도록 했다.  이순신은 그렇게 물길을 익혔다.  백성과의 ‘소통’을 통해서 단기간 사이에 바다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왜적을 물리칠 작전을 완벽하게 구상할 수 있었다.  이순신의 ‘불패 신화’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소통과 물길 공부가 없었다면 불패 신화도 없었을 것이다.      명량대첩을 다룬 영화 ‘명량’이 연일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관객 수가 벌써 ‘수백만’이고, 전국 극장의 60%가 명량을 상영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정치를 하고,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빠지지 않고 관람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보면서 자기 업무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좀 느꼈으면 싶은 것이다. 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8-04 15:53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기자수첩] 노인은 ‘올드슈머’인가?

과거 김대중 정부가 ‘주5일 근무제’를 밀어붙이면서 강조한 말은 내수시장 살리기였다. 일주일에 5일만 일하고 나머지 2일은 소비를 해야 내수시장이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경기도 회복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돈 없는 국민은 오히려 ‘방콕’이었다. 그래서였는지, 가장 먼저 앓는 소리를 쏟아낸 것은 ‘빈 택시’였다. 노무현 정부는 ‘가진 자’에게 소비를 하라고 했다. 골프장 수백 개를 만들면 외국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해외로 골프 관광을 가는 내국인도 유인할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이 국내에서 소비를 하면 내수시장 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분양되지 않아 남아도는 공단에는 위락시설을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도 냈다. 그래도 내수시장은 여전히 울상이었다.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민이 국내 여행을 하루씩만 더 가면, 수요가 2조5000억 원 늘어나고 일자리도 5만 개나 창출된다며 휴가를 권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민들은 휴가보다 ‘일자리’가 급했다.이렇게 소비에 쫓긴 탓인지, 몇 해 전에는 다소 이해하기 까다로운 자료를 내놓기도 했다. 늘어난 여성 취업자가 새로운 소비계층으로 떠올랐다는 자료였다. 그 새로운 여성 소비계층에게 ‘블루슈머’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 있었다.그렇지만, 당시에는 나이가 비교적 많은 여성의 취업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남편이 직장에서 밀려나고, 아이들은 ‘청년실업’에 시달리는 바람에 허드렛일이라도 찾아 나선 여성이 적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 여성 취업자에게도 소비를 기대하며 ‘블루슈머’ 운운하고 있었다.닮은꼴인 ‘소비 타령’이 박근혜 정부에서 또 나오고 있다. 이번에는 ‘노인’이 그 대상이다. 노인들이 받은 기초연금을 ‘소비’하는 데 쓸 것이라는 기대다. 몇 푼 되지도 않는 기초연금까지 소비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초연금을 타는 노인은 이제부터 ‘올드슈머’다. 해답 찾기 껄끄러운 대한민국의 ‘소비 대책’이 아닐 수 없다./이정선 기자 jslee@viva100.com

2014-08-04 11:35 이정선 기자

[김영인 칼럼] 금가루 도둑

김영인 논설위원미국 사람들이 황금에 눈이 멀어 포장마차를 타고 서부로 몰려가던 시절, 캘리포니아에는 도처에 술집이었다. 금 좀 캔 사람들은 저마다 술집에서 한 잔씩 하며 흥청거렸다. 물론, 걸핏하면 총질도 벌어졌다.술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니까 바텐더도 그만큼 필요했다. 바텐더 모집 광고가 곳곳에 나붙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바텐더로 취직했다. 일자리가 저절로 창출되고 있었다. 바텐더의 수입 또한 짭짤했다. 손님이 술값을 계산할 때 제법 괜찮은 ‘부수입’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 방법이 기발했다. 당시 손님들은 자기가 캔 사금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 바텐더는 손님의 그 주머니에 손을 넣어 금가루를 한줌 꺼냈다. 그 금가루를 술집 주인의 금가루 상자에 넣었다. 그런 식으로 술값을 계산했다. 이 과정에서 부수입이 발생했다. 바텐더가 금가루를 상자에 넣고 나서 슬그머니 자기 턱수염을 쓰다듬는 것이다. 그러면 손에 붙어 있던 금가루 약간이 턱수염에 고스란히 달라붙었다. 여러 손님의 술값을 계산하다보면 바텐더의 턱수염에 달라붙는 금가루도 점점 많아졌다. 바텐더는 퇴근 후 집에 돌아가서 조심스럽게 턱수염부터 씻었다. 아무도 볼 수 없도록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숨어서’ 씻었다. 그렇게 턱수염에 붙어 있던 금가루를 모아서 부수입으로 챙길 수 있었다. 따라서 ‘팁’을 따로 받을 필요도 없었다. ‘티끌’이 모여서 월급보다 많아지기도 했다. 턱수염으로 캔 ‘노다지’가 아닐 수 없었다. 이 ‘금가루 모으기’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금을 세공할 때 생기는 ‘극소량의 금가루와 부속물’을 모아 ‘골드바’로 만들어 판 금제품 공방 종업원이 며칠 전 구속되었다는 보도다. 그렇게 4년 4개월 동안 챙긴 돈이 2억4500만 원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월급보다도 많았던 듯싶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도 있었다. 이른바 ‘서부개척시대’ 때 바텐더가 빼돌렸던 금가루는 죄가 되지 않았다. 죄를 묻지 않고 눈감아줬었다. 이를테면, ‘낙수효과’라는 게 있었다. 반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는 ‘범죄’가 되고 있었다. 세상이 각박해졌기 때문일 것이었다.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7-30 14:00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김영인 칼럼] 돈 없는 휴가 세번째 이야기

김영인 논설위원우리나라의 부채는 옛날부터 유명했다. 품질이 최고였고, 종류도 많았다. 승두선, 어두선, 사두선, 합죽선, 반죽선, 외각선, 내각선, 삼대선, 이대선, 죽절선, 단목선, 채각선, 소각선, 광변선, 협변선, 유환선, 무환선…. 색깔도 청색, 황색, 적색, 백색, 흑색, 자색, 녹색 등 갖가지였다. 크기도 다양했다. 가장 큰 부채의 경우, 대나무로 만든 화살 크기의 부챗살이 40∼50개나 되었다. 이를 백첩(白貼)이라고 했다. 부채에는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등 운치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려 넣었다. 그 중에서도 접는 부채는 우리나라가 ‘원조’였다. 우리가 접는 부채를 개발, 중국에 보냈더니 당시 명나라 임금 영락제가 감탄하고 말았다. 영락제는 “이 부채와 똑같은 것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벤치마킹’이었다. 이때부터 접는 부채가 ‘천하’에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접는 부채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발명품’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우리 부채를 ‘벤치마킹’하면서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우리 부채를 ‘고려선(高麗扇)’이라며 매우 귀하게 여겼다. 중국 사신들이 오면 우리 부채를 저마다 선물로 가져가려고 하기도 했다. 우리는 ‘부채 선진국’이었다. 그런데, ‘부채 선(扇)’은 집(戶 ? 호)과 깃털(羽 ? 우)을 합친 글자다. 따라서 부채라는 물건은 애당초 집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쓰는 것이었다. 부채질을 해서 더위를 식히고, 바람을 일으켜 공기를 순환시키는 용도였다. 그랬으니, 휴가비가 껄끄러운 서민은 ‘집에서 쓰는 물건’인 부채로 휴가를 대신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부채는 바람을 일으켜 먼지 같은 오물을 멀리 날려버리고 ‘여름철의 불청객’인 파리, 모기 등 곤충도 쫓거나 혹은 후려쳐서 잡을 수도 있다. 공기를 맑게 해서 병이나 재앙을 몰고 오는 잡귀와 사(邪)를 제거하는 부수적인 효과다. 그래서 부채에는 ‘8가지 덕(八德)’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부채로 휴가를 대신하는 과정에서 골치가 아파질 가능성도 있다. 부채와 발음이 똑같은 ‘부채(負債)’ 탓이다. 부채질을 하다가 ‘가계 부채’가 갑자기 생각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부채질이 시원하기는커녕, 되레 답답하게 느껴질지 모를 일이다.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7-30 13:59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김영인 칼럼] 돈 없는 휴가 두번째 이야기

김영인 논설위원봉이 김선달이 어느 날 길 떠날 준비를 하는데, 아내가 바가지를 퍼부었다. “어디 가? 서울 가? 돈도 없이? 누구를 골탕 먹이려고?” 김선달은 한마디로 바가지를 막았다. “돈 필요 없어!” 그러면서 소와 말의 여물을 썰 때 쓰는 작두의 고두쇠를 챙겼다. 고두쇠는 작두 머리에 가로로 끼우는 꼬부라진 쇠꼬챙이다. 옛날에는 여행하는 사람이 맹수의 이빨이나 발톱 등을 지니고 다니면 안전하다고 해서, 쇠꼬챙이를 이빨 모양으로 만들어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김선달은 돈도 없이 고두쇠 하나만 달랑 허리춤에 차고 집을 나선 것이다. 날이 저물 무렵, 김선달은 어떤 주막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마당에 놓여 있는 작두의 고두쇠부터 슬쩍 빼서 감추고 시치미를 뗐다. 저녁을 먹고 어슬렁거리며 마구간 쪽으로 갔더니, 주막 주인이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물을 썰어서 말죽을 쒀야 하는데 고두쇠가 없어졌다며 찾고 있었다. 김선달이 말을 건넸다. “마침 내가 부적으로 차고 다니는 게 하나 있는데, 급하면 이것이라도 쓰시오.” 이튿날 아침, 김선달은 밥 한 상을 느긋하게 비운 뒤 짚신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리고 밥값이 얼마냐고 물었다. 빌려줬던 고두쇠도 돌려달라고 했다. 주막 주인은 난처했다. 여물을 썰지 못하면 장사를 하지 못할 판이었다. 그렇지만 고두쇠를 구하려면 하루나 이틀거리까지 멀리 가야 했다. “숙박비를 받지 않을 테니, 고두쇠를 주고 가시오. 가다가 다시 구하면 되지 않겠소.” 김선달은 “그렇다면 별 수 없군” 하면서 못 이기는 척 떠났다. 다음 주막에서도 또 고두쇠를 슬쩍했다. 그런 식으로 서울까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공짜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는 얘기다. 김선달처럼 돈 없이 휴가를 갈 수는 있다. 그러나 주막에 들기 전에, 작두를 여벌로 준비하고 있는 곳인지 미리 확인해두는 게 좋다. 김선달만큼 간을 어지간하게 키워둘 필요도 있다. 자칫, 망신살이 뻗칠 것도 각오해야 한다.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7-30 13:59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김영인 칼럼] 돈 없는 휴가 첫번째 이야기

김영인 논설위원서민들은 ‘휴가 노이로제’다. 정부가 휴가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까지 나서고 있다. 확대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국민이 휴가를 하루 더 가면 (관광비용) 지출액이 1조4000억 원 늘어난다”며 “정부부처부터 직원 하계휴가를 적극 권장하고, 장관들도 솔선수범해 달라”고 했다는 소식이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돈이 없다. 휴가를 가고 싶어도 ‘방콕’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돈이 있어도 대출금 이자부터 갚아야 할 판이다. 가계부채가 ‘1000조’다. 정부는 그런 서민에게 휴가를 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도 휴가갈 수 있는 방법을 뒤져봤다. ‘역옹패설’을 쓴 고려 때 선비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운금루기(雲錦樓記)’라는 글이다.  경성 남쪽에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다. 연못을 빙 둘러서 여염집이 ‘고기비늘’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 연못 근처에 누각이 하나 있었다. 이제현이 그 누각에서 한가하게 바라봤다. “달리는 사람, 쉬는 사람, 돌아보는 사람, 부르는 사람, 친구를 만나 서서 말하는 사람, 어른을 만나 절하는 사람.…”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법 구경거리가 될 만했다. 연못 속에 비치는 붉은 꽃향기와 푸른 잎 그림자도 빠질 수 없었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도 좋았다.그래서 이제현은 말했다.“산천을 찾아 구경할 만한 명승지가 궁벽하고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임금이 도읍한 곳으로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도 진실로 구경할 만한 산천은 있다.… 한 발자국만 나서면 굽어볼 수 있는 거리 안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휴가의 ‘휴(休)’는 ‘사람 인(人)’에 ‘나무 목(木)’을 합친 글자다. 농사가 산업의 전부였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다가 쉬고 싶으면 근처의 나무그늘을 찾았다. 그게 휴식이었다. 휴식의 ‘식(息)’은 글자 그대로 스스로(自)의 마음(心)을 다스리고 가다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있다. 주머니 사장 때문에 휴가를 멀리 떠날 수 없는 사람은 가까운 ‘동네 공원’이라도 찾아서 쉴 일이다. 그것도 휴가일 수 있다.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

2014-07-28 15:19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