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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 칼럼] 이익집단은 번영의 적이다

이유미 컨슈머워치 사무국장7월 말 폭염 속에 약사들이 거리로 나섰다. 8월 초 보건복지부의 ‘안전상비의약품 지정심의’를 앞두고, 편의점 약 판매를 막기 위해서였다. 보건복지부는 2017년 3월부터 편의점 판매 약 품목을 늘리기 위해 대한약사회 등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강봉윤 대한약사회 정책위원장이 자해 소동을 벌이는 등, 약사들은 강한 반대 입장을 고수해 왔다. 약사들은 ‘국민건강수호’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복약 지도가 없는 편의점 약 판매를 금지하고 세금으로 ‘공공심야약국’을 운영하자고 주장하고 있다.택시기사들도 ‘카풀 금지법’이 9월 안에 통과되지 않으면 대규모 집회를 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풀러스, 럭시 등 출퇴근 시간에 카풀 차량을 연결해주는 앱들이 활성화되자 택시기사들이 이를 막기 위해 나선 것이다. 현행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에 따르면 출퇴근 시간에 유상으로 차량을 제공하는 것은 합법이다. 택시기사들의 반발로 2014년 우버가 금지됐고, 2016년 심야시간에 같은 방향의 승객들을 모아 전세버스를 운영하는 ‘콜버스’도 흐지부지 됐다. 택시기사들은 서울시와 함께 콜버스의 운행시간, 지역, 비용까지 일일이 간섭했고 결국 콜버스는 서울시가 운영하는 공공사업이 되어버렸다.미국에서는 처방전이 필요 없는 약 3만여 개가 일반 슈퍼마켓에서 판매되고 있다. 처방전이 있는 약도 월마트와 타겟 등, 대형마트가 운영하는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다. 더욱이 정부가 제공하는 메디케어보다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약이 저렴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지난 7월 예일 대학의 조셉 로스 박사는 고혈압과 콜레스테롤 등, 심장과 관련된 약 중 월마트에서 판매하는 약값과 65세 이상에게 적용되는 정부 건강보험인 메디케어 프로그램을 비교한 결과, 월마트에서 약을 구입할 경우 더욱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대형 유통업체인 아마존과 월마트는 제약회사를 인수하는 등, 의약품 시장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법인 약국은 불법이다. 2000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내렸지만 국회가 법 개정에 나서지 않아 방치되고 있다.2008년 우버가 시작한 승차 공유는 전 세계에서 활성화되고 있다. 중국의 디디추싱은 대리 운전 호출, 렌터카 호출, 기업용 차량 공유, 미니버스 호출, 자전거 공유 등 우버를 압도하는 서비스로 결국 우버차이나를 인수하고 중국혁신 기업으로 올라섰다. 말레이시아에서 시작한 승차공유 회사이 그랩도 2013년~2015년 사이,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으로 진출해, ‘가난한 동남아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경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국내 원격 진료는 의사들의 거부로 2000년 첫 시범 사업 후 19년째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안경과 렌즈의 인터넷 판매도 대한안경사협회가 막고 있다. 에어비앤비도 기존 민박업자들의 반대로 일년에 120일만 운영할 수 있다. 쿠팡의 로켓배송도 불법이라며 한국통합물류협회에서 소송을 걸었다(2017년 1심에서 쿠팡 승소판결). 최근 다이소는 자발적으로 문구류 낱개판매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한국문구공업협동조합 등 문구단체에서 다이소 때문에 매출이 감소했다며 다이소 규제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이익집단들의 반대로 혁신이 거부되고, 그 불편과 비용은 고스란히 소비자들이 치르고 있다.집단행동 연구 분야를 개척한 경제학자 맨슈어 올슨은 ‘이익집단은 번영의 적’이라고 했다. 맨슈어 올슨에 대해 설명한 민경국 교수에 따르면 “이익집단은 로비를 통해 정부를 압박하고 각종 특권을 얻어낸다. 이들이 얻어낸 특권은 소비자, 납세자 등 규모가 커서 뭉치기 어려운 집단을 착취해서 얻는 것이다. 이익집단은 구성원들을 경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기 목적이기에 그들의 혁신능력과 생산성 하락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이익집단이 득세하는 경제는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할 능력이 둔화되고 그 결과는 경제의 활력을 잃게 된다.”현재 대한민국처럼, 맨슈어 올슨 이론의 실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나라가 있을까 싶다. 전 세계가 공유경제를 필두로 신산업이 일어나고 새로운 삶의 형태가 등장하고 있는 시점에 한국만 제자리다. 이익집단들 설득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이들이 혁신 경제에 흡수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게 정치의 역할이지만, 오히려 이익집단의 포로가 되어 혁신을 가로막는 법만 양산하고 있다. 이익집단의 포로가 된 정치집단이 법을 만드는,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그 정치인을 뽑는 국민 개개인의 각성 말고는 답이 없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최근 카풀 이용자들이 택시단체에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이다.이유미 컨슈머워치 사무국장

2018-09-10 08:00 이유미 컨슈머워치 사무국장

[시장경제 칼럼] 복지국가의 귀결

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현 정권은 참으로 많은 복지 프로그램을 쏟아내고 있다. 겉으로는 성장 우선인 것처럼 소득주도 성장이나 포용적 성장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특정 계층이나 집단을 위한 복지 정책이다. 기초 연금 조기 인상, 노인 일자리 확대 지원, 사회 초년생 구직 활동 지원, 국민기초생활보장 확대, 아동양육비 지원 대상 확대 및 지원액 인상, 근로장려금 지급 대상 확대, 최저임금 인상 및 재정 보전, 영세자영업자 지원 방안 모색 등이 그런 것들이다. 복지는 기본적으로 온정주의(paternalism)에 바탕을 두고 있다. pater는 아버지를 이르는 말인 바, 온정주의는 가부장인 아버지가 자식을 돌보고 간섭하듯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고 간섭하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자식을 양육하지만 paternalism에는 아버지가 강조되어 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며 가지는 명령권은 자식이 자신의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전인 미성년 기간에 한하며, 자식이 성년이 된 이후에는 부모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다. 부모가 성년이 된 자식을 돌본다면, 그것은 자애와 사랑에 의한 것일 뿐, 자식을 부모의 의지에 종속시킬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과 양육에 대한 보답으로 평생 부모를 공경하고 부양할 의무를 진다. 이와 같은 부모와 자식 간의 자애, 사랑, 공경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법적 구속에 의한 것이 아니다.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는 스스로의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온정적 복지정책은, 부모가 미성년의 자식을 돌보듯, 스스로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국한되어야 한다. 그가 어떤 계층이나 집단에 속하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런 복지 지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그러나 복지가 많은 개인들의 삶을 책임지는 수준으로까지 확대되면 어떻게 될까?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표방하는 복지국가의 병폐에 대한 경제학적 설명은 잘 알려져 있다. 복지 지출이 늘어나면 사람들이 일하려는 유인이 약해져 생산이 줄어들고, 생산이 줄어들면 소득이 줄어들고, 소득이 줄어들면 조세 수입이 줄어든다. 복지 지출은 늘고 조세 수입은 줄어드니 정부 재정은 파탄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이 정부 의존적이 되어 독립심을 잃고 정신 건강도 나빠진다는 것 등이다.확대된 복지가 가져오는 더욱 더 심각한 문제는 도덕과 법의 타락에 있다. 도덕 규칙은 평화로운 사회 질서의 유지를 위해 사람들이 지켜야 할 비공식적 제약으로서,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될 행위를 규율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덕 규칙은, 이를 지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유쾌한 감정을 부여하고, 위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불쾌의 감정을 부여하는 정의감에 의해 지탱된다. 따라서 정의의 확립은 개인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타인이 침해하거나 약탈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그런데 도덕에 뿌리를 둔 법이 정의의 범위를 넘어 대폭 확대된 복지정책으로 구체화되는 온정까지 규정하면 남의 재산을 약탈하는 행위를 합법화함은 물론, 이에 저항하는 행위를 범죄시하고 처벌함으로써 국가 사회는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민주정(民主政) 하에서 복지국가를 향한 열망이 고조되면 수많은 이해 집단이 법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추세가 보편화된다. 다수가 소수를 착취하는 구조도 고착된다. 특히 시장경제가 개인 간, 계층 간 부(富)의 불평등 원인이라는 오인(誤認) 아래 이런 움직임이 거세진다. 실정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약탈당한 집단도 이를 다시 합법적으로 복구하려는 과정에서 갈등과 분쟁이 증폭되고 국가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법을 통한 합법적 약탈이 일상화되어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다.이제 복지가 온정을 넘어 수혜자들의 권리로 둔갑하면, 정의감은 실종되고 도덕과 법이 빠르게 타락한다. 법적 자선(慈善)은 공공의 번영보다 사람들의 도덕성을 해치는 치명적 결과를 낳고, 그것이 가난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회적 재앙을 낳는다. 복지 수혜자들의 권리라는 것도 그들의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황폐화시킨다.그래서 국가 사회의 몰락은 사회 전체적인 정의감의 상실과 도덕 규칙의 훼손, 그리고 법질서의 문란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이 그렇지 아니한가?김영용(전남대 명예교수, 경제학)

2018-09-03 08:04 김영용(전남대 명예교수, 경제학)

[유영만의 교육시선(視線)] 놀지 못하는 교육, 날지 못하는 교육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교수직장인에게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 화두라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스라밸(Study and Life Balance)이 관심사다. 말 그대로 워라밸은 일과 삶의 조화지만, 스라밸은 공부와 삶의 조화다. 워라밸이 워크(work) 시간이 지나치게 많아서 삶의 균형이 깨진다고 생각한다면 스라밸은 스터디(study) 시간이 너무 많아서 놀 시간이 없어지고 있는 아이들의 삶을 대변하는 개념이다. 워라밸이든 스라밸이든 일과 공부는 놀이와 분리되어 있다. 일하는 시간은 하기 싫은 노동이고, 공부하는 시간 역시 하고 싶어서 하는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할 수 밖에 없어서 하는 노동이다. 워라밸과 스라밸의 공통점은 각자가 하고 있는 일과 공부는 놀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노동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공부를 벗어나 빨리 놀이시간을 더 늘려야 삶과 공부의 균형이 잡힌다는 가정을 갖고 있다. 왜 일과 공부는 따로 하는 독립적인 활동으로 나뉘게 되었을까? 일과 공부와 놀이는 하나로 통합되지 못할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놀이가 실종된 일과 교육은 의미는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재미는 없다. 재미없는 의미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이고, 의미 없는 재미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재미있게 놀지 못하면 의미 있게 날지 못한다.‘논어’에 보면 공부를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하나는 자기는 좋아하지 않는데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의 공부다. 위인지학의 공부는 노동이다. 또 다른 공부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공부다. 이 공부는 놀이로서의 공부다. 자신이 하면 재미있는 분야를 찾아서 즐겁고 신나게 공부한다. 위인지학으로 공부하는 아이에게 스라밸은 무너지지 말아야 할 금지노선이다. 왜냐하면 노동으로서의 스터디 시간을 최소화 시켜야 라이프에서의 놀이나 휴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위기지학으로 공부하는 아이에게 스라밸은 필요할 때 지킬 수도 있는 마지노선이다. 공부 그 자체가 놀이이자 휴식이기 때문에 굳이 공부와 놀이 간에 균형을 맞추거나 양자를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 심리학자 칼 융도 “창조성은 지성에서 나오지 않고 놀이 충동에서 나온다”고 했다. 공부가 책상에 앉아서 하는 노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공부는 즐겁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삶을 바꾸는 혁명적인 변화 수단이 되지 못한다. 반대로 공부를 하나의 놀이로 생각하며 즐겁고 재미있게 하는 위기지학의 의미라면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더 놀아야 하는 창조성의 원천이 된다.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힘겹지만 자기를 발견하는 노동과 배우는 학습, 그리고 놀이가 통합될 때 이루어진다. ‘논어’ 옹야편(雍也篇)에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知之者 不如好之者 好知者 不如樂之者)라는 구절이 있다.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지자(知者)는 위인지학 입장에서 노동으로 공부하는 사람이고, 호자(好者)는 좋아하는 분야를 잡아서 공부하지만 아직 자기 것으로 내면화시키지 못한 사람이다. 낙자(樂者)야말로 위기지학 입장에서 즐겁고 재미있게 공부해서 공부와 일과 삶이 하나로 맞물려 돌아가는 사람이다. 놀이로서의 공부는 생활 속의 이슈와 부단히 연결시켜 고민해보게 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부단히 성찰하게 만든다. 이 모든 과정이 재미있으면 공부의 결과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조용한 침묵이 흐르는 교실보다 왁자지껄 떠들 수 있는 교실에서 창의성은 살아 숨 쉰다. 장난도 작란(作亂)에서 나왔다. 난동(亂)을 일으키는(作) 공부야말로 창조의 텃밭을 일구는 놀이다.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교수

2018-08-31 08:00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교수

[시장경제 칼럼] 매장 내 일회용컵 규제, 성공할 수 있을까?

곽은경 자유기업원 기업문화실장환경부가 8월 2일부터 커피전문점과 패스트푸드점 내부에서 일회용컵 사용을 금지했다. 이를 위반하는 사업주에게 최대 2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이는 2030년까지 플라스틱 폐기물을 50% 감축하겠다는 정부의 ‘재활용 폐기물 관리 종합대책’의 일환이다.바뀐 제도로 인해 소비자와 사업주, 커피 전문점 직원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다. 소비자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머그잔에 커피를 마셔야 하는가 하면, 중간에 매장을 나갈 경우 테이크아웃 잔으로 바꿔야하는 불편함을 겪게 됐다. 위생문제로 다른 사람들이 사용한 컵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소비자들은 매번 개인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만 한다.커피전문점 점주, 직원 입장에서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머그잔을 보관하고, 이를 세척해서 다시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것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게 된 것이다.이 제도의 목적은 플라스틱의 사용을 줄여 환경을 보호하는데 있다. 그러나 일회용컵 대신 다회용컵을 사용하는 것이 더 환경친화적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다회용컵을 세척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과 세제는 자원을 낭비시키고, 강과 바다를 오염시킨다. 또 컵을 세척하고 소독하기 위해 사용하는 식기세척기에는 전기 에너지가 사용된다.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도 환경오염과 무관하지 않다.형평성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일부 소비자, 업체에만 환경보호를 강요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아이스커피 컵, 대형마트에서 판매되는 생수병에도 플라스틱은 사용된다. 커피 전문점 소비자만 환경보호의 의무를 강요받는 것은 환경을 보호한다는 정책의 목적과 맞지 않다.플라스틱컵 사용제한 규제는 갖가지 편법도 초래한다. 플라스틱컵을 규제하자 커피 전문점에서는 방수가 되는 종이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매장 구석에서 일회용컵을 따로 판매하는 업체도 생겨났다. 물론 플라스틱 재질로 된 컵 뚜껑, 빨대는 규제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 사용되고 있다. 소비자, 공급자가 지불하는 비용, 불편을 고려한다면 일회용품 사용 금지 정책이 효율적이지도, 친환경적이지도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환경보호를 위한 정책은 늘 의도만으로 높은 평가받는다. ‘환경’이라는 단어는 신성불가침 영역과 같이 취급되며, 환경보호를 위한 규제법안들은 큰 반대 없이 만들어진다. 모두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이 법안들이 환경을 보호하는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대표적인 예가 2002년 도입되었던 컵보증금 제도이다. 일회용품 사용을 줄인다는 목적이 무색하게 컵 회수율이 매우 낮았다. 소비자들에게 컵보증금 부담만 지우는 결과를 초래했고 결국 2008년에 폐지되었다. 환경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제도였으나 실제 환경은 보호하지 못한 것이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결과까지 당연히 좋을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부가 재활용 촉진을 위해 이미 실패한 컵보증금 제도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 실패를 답습하지 않게 제도도입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어떤 방식으로든 커피를 소비하는 행위에는 환경을 오염시키는 요인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를 강제로 막아 불편함을 강요하는 것은 부작용만 낳을 뿐 환경을 보호하기 어렵다. 바다에 밀려드는 플라스틱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주로 소비하는 선진국이 아니라 중국, 인도 등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이 낮고 경제발전이 더딘 국가들이 배출하고 있다. 즉 사용 자체를 금지할 것이 아니라 사용 후 어떻게 잘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을 찾는 것이 환경보호를 위한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우리가 흔히 ’공유지의 비극’이라고 표현하듯, 공동의 재산은 남획되고 오염되기 쉽다. 그러나 내 앞마당, 내 소유의 산림은 늘 깨끗하고 쾌적하다. 좋은 의도를 가진 정책이 실제 환경을 보호하는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소비자도 공급자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환경보호를 실천할 수 있는 유인이 충분해야 한다. 환경정책도 시장경제원리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곽은경 자유기업원 기업문화실장

2018-08-27 08:00 곽은경 자유기업원 기업문화실장

[시장경제 칼럼] 대학입시에서도 ‘국가주의’를 폐기해야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교수교육부가 먼 길을 돌아 현재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치를 ‘2022학년도 대학입시 개편안’을 발표했다. 교육부는 수능 위주 전형과 내신 위주 전형 비율이 모두 30%에 미치지 못하는 대학을 재정 지원과 연계해, 60여개 대학에 총 500억 원 이상 지원하는 ‘고교교육 정상화 기여 대학’ 선정에 응모할 수 없도록 했다. 대학입시를 대학 재정 지원과 연결시킨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학은 전국 4년제 197개 대학 가운데 35곳이며, 서울대ㆍ연세대ㆍ고려대ㆍ성균관대 등 대부분의 서울 소재 대학이 해당된다.국가교육회의 대입제도개편공론화위원회가 2022학년도 대입제도개편안을 결정하지 못해, 8월 7일 국가교육회의는 교육부에 2022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정시모집의 수능위주 선발비율을 현행보다 확대할 것 등 몇 가지를 권고했다. 그동안 교육부는 시민의 의견을 존중한다면서 자신이 해야 할 결정을 위원회에 넘겼지만, 위원회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8월 17일에 2022학년도 대입 개편안을 발표하였다. “결정해주면 그대로 따르겠다.”던 교육부가 스스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그동안 교육부의 대학 입시 개편 과정에 대해 이런 저런 비판이 쏟아졌다. 대입 개편처럼 복잡한 교육 정책의 결정을 일반시민들로 구성된 공론화위원회가 결정하도록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입시 문제를 ‘인기투표’ 방식으로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교육부의 ‘결정 장애’가 아니라 현 정부가 교육 ‘국가주의’에 빠졌다는 것이다.정치학에서 국가주의(statism)는 국가가 경제 또는 사회 정책 가운데 하나 또는 모두를 어느 정도 통제해야 한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국가주의는 최소국가주의에서부터 전체주의까지를 포괄한다. 국가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을 국가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야당 정치권에서는 국가주의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여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데 사용하였다. 이 글에서는 정부가 개입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 개입하는 것을 ‘국가주의’로 명명함으로써 ‘국가주의’를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부의 행위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국가 권력과 개인의 자율이 항상 대립할 수밖에 없다고 보면 아나키스트가 된다. 그러나 개인의 자율은 개인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확보될 수 없는 현실을 고려하면 개인의 자율을 보호해줄 다른 장치가 필요하다. 우리는 개인의 자율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제한적인 정부 또는 최소한의 정부를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국가주의’의 개념을 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주의’를 중립적으로 사용하여 필요한 부분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모두 국가주의에 포함시킨다면 국가주의 논쟁은 무의미하다.따라서 국가가 ‘개입해야 할 부분’과 ‘개입하지 말아야 할 부분’을 구분하고 ‘개입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 개입하는 것’을 ‘국가주의’라 부른다면 ‘국가주의’는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개입해야 할 부분’과 ‘개입하지 말아야 할 부분’의 경계에 대한 판단이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떤 정부의 정책이나 행위를 두고 ‘국가주의’로 볼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국가주의’를 사용하는 개개인의 경우를 보고, 그가 국가의 영역과 자율의 영역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를 추론할 수 있다. 곧 그의 이념적 지향성을 추측할 수 있다.그런데 국가주의의 시원은 어디일까? 왜 정치인들은 국가가 ‘개입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영역까지 개입하려는 ‘국가주의’에 빠지는 것일까? 정치인들이 ‘국가주의’에 빠지는 원인은 존재하는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의욕 때문이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 살면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을 바로잡으려는 의욕이 ‘국가주의’의 근원이다. 세상은 공정해야 하는데 공정하지 못하고, 정의로워야 하는데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 이를 바로잡아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는 의욕이 바로 ‘국가주의’의 출발점이다.현 정부의 교육정책, 대학입학 정책이 이렇게 혼란에 빠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각 대학에는 대학들이 역사와 전통 속에서 설정한 목적이 있고, 학생들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대학을 선택한다. 그런데 정부가 자신들이 설정한 정의와 공정과 같은 기준에 따라 대학입시 전형방법을 설정하고, 그것을 국가권력을 사용하여 강제로 실행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국가주의’가 대학을 억누르게 된다. 특히 ‘공정’을 실현하려는 의욕이 넘치는 현 정부는 대학입시에서도 공정을 실현해야 한다고 믿는다.대학입시가 ‘금수저’에게 유리하고 ‘흙수저’에게 불리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사교육이 아니라 공교육, 자사고ㆍ특목고가 아니라 일반고가 특권층이 아니라 서민층을 위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금수저들을 위한 자사고ㆍ특목고를 없애고, 공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입시가 금수저들에게 유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이런 문제의식에서 대학입시를 검토하고 서민층에게 유리한 입시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제도가 서민층에게 유리한지가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정시와 수시 가운데 어느 것이 서민층에게 유리한지가 분명하지 않다. ‘정시는 사교육과 금수저에게 유리하고 수시는 공교육 정상화로 가는 길’이면 수시를 확대하고 정시를 없애거나 축소해야 한다.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수시가 금수저에게 유리하고 흙수저에게 불리해보이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어느 제도가 금수저에게 불리하고 흙수저에게 유리한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 정부의 대학 입시 정책이 혼란에 빠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흙수저에게 유리한 대학입시가 공정하고, 금수저에게 유리한 대학입시가 불공정한 것은 아니다. 흙수저나 금수저 모두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은 입시제도가 공정한 입시제도다.문제는 정시가 옳은가 수시가 옳은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입시제도는 누구에게 유리한가로 정할 문제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입시제도를 정부가 택하든, 그것을 정해 모든 대학에 강제하면 정부는 ‘국가주의’로 빠진다. 4가지 대안 가운데 공론화위원회가 만장일치로 하나를 결정하고 그것을 교육부가 대학에 강제하면 그것도 ‘국가주의’다. 현 정부의 문제는 대학입시를 대학에게 강제하려는데 있는 것이지, 특정 정책을 강제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이번 혼란을 계기로 우리는 대학 교육을 근본에서부터 반성해 보아야 한다. 대학 교육의 목적은 학생의 창의력을 키우는 것, 지성적 능력을 키우는 것,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 덕스러운 인간을 양성하는 것 등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목적은 국가주도의 교육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모든 대학의 교육 목표가 동일해야 할 이유도 없다.교육부는 “융합적 사고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와 ‘창의융합형 인재상’을 추구하는 ‘2015년 교육과정’에 부합하기 위해 대학 입학 제도를 바꾸었다고 하지만, 고등학교나 대학교의 교육목표를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정할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교육부가 어떤 입시제도가 이러한 교육목표를 실현하는 데 적합한가를 결정할 주체가 되어서도 안 된다. 대학입시와 대학교육에 국가가 개입하면 강제성과 획일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아직까지 존속하고 있는 대학 입학에서의 3불 정책은 전형적인 ‘국가주의’ 교육정책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강하게 개입하고 있는 대학 공납금 정책도 ‘국가주의’의 일환이다. 교육에서 어디까지를 ‘국가주의’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대학교육에서는 국가가 물러나야 한다.현재와 같이 정부가 대학입학 정책을 결정하고 대학에 강제하는 것은 명백한 국가주의다. 이제 대학 교육에서 국가주의를 폐기해야 한다. 현 정부는 대학에서의 국가주의를 적폐청산의 목록에 올려야 한다.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교수

2018-08-20 08:00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교수

[시장경제 칼럼] 보수이념의 실종과 복원

장대홍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작금의 정치상황은 민중혁명의 진행과정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현 정권은 집권초기부터 촛불혁명 정권임을 호언해온 데 이어, 자신들의 이념적 틀에 맞춘 국가건설 청사진을 걸고 무리하게 정적들의 구금, 전 정권의 흔적 지우기, 친북한 정책의 추진과 각종 사회주의식 개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의 열정은, 비록 민주주의 외피를 벗지 않았고, 단두대를 등장시키지도 않았지만, 그 무모함, 과격성과 잔인성에서 프랑스 혁명기의 개혁 전문가들과 다름없어 보이기도 한다.또한 그들에게 적극 동조하는 노조, 언론, 사법부, 국회와 일부 지식인들, 그리고, 이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대중의 행태를 보면, 우리 사회가 베네수엘라, 베트남, 우크라이나의 전철을 밟을 거라는 걱정을 금할 수 없다.더욱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여기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이다. 자칭 정통 보수정당이라는 거대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아직도 당권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집권세력에 맞서 투쟁할 능력도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그들은 지난 2년간 아스팔트를 메우며, 줄기차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수호를 외쳐온 수많은 애국시민들의 불신을 받고, 그들을 대변하지 못하는 집단임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들은 지난 4개월 간, 두 차례나, 전형적인 좌파 정치꾼을 위원장으로 영입해서 당혁신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드는 이상한 모습을 연출했다. 그들이 진정한 보수이념을 가지고 있지 않는 기회주의적 정치꾼들이거나 사이비 보수라는 증거다.소위 보수정치권이, 안보 이슈를 제외하면, 이념적으로 좌파 정치권과 동조하는 현상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스스로 중도 실용주의를 내세워 동반성장 정책, 골목 상권보호와 같은 친서민 정책을 추진했고,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은 일부 규제 개혁에도 불구하고 기업규제 강화, 복지지출의 급증으로 나타났으며, 보수여당인 새누리당은 노골적으로 좌 클릭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케이토 연구소가 발표하는 전 세계적 자유지수는 개인자유의 감소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들 두 보수 정권기에서 인간자유지수의 순위는 159개국 중 24위에서 지속적으로 하락해서 35위로 내려갔다. 지수 값은 10만점 중 7.98로 여전히 상위 수준이고, 세부지수인 안보와 안전, 언론과 표현의 자유 항목은 세계 최상위 수준을 유지하였지만, 경제적 자유지수의 하락이 두드려졌고, 특히 정부규모의 확대, 사법체계와 재산권 지수는 세계평균을 밑도는 수준으로 떨어졌다.보수정치권이 자유를 경시하는 경향이 이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인지, 일반대중의 자유에 대한 인식부족에 편승하기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둘 다일지 모르겠다. 근대적 보수이념, 영국과 미국에서 정착되었으며, 이승만 박사가 정확히 이해하고 신생 대한민국의 사상적 기초로 심으려 했던, 이념은 자유주의적 보수이념 (libertarian conservatism)이며, 자유, 생명, 재산권의 보호를 최상위 가치로 보는 고전적 자유주의 정신과 분리될 수 없다.보수주의가 공산주의, 집단주의, 전체주의적 체제를 거부하고, 작은 정부,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 이념적 특질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수주의를 낡은 이념, 기득권 보호에 치중하는 구태이념, 꼰대 이념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보수주의는 무엇이든 낡은 것만 고집하는, 탈이념적이며 비이성적 성향이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한다.근대 보수주의의 원조인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 혁명이라는 민중혁명을 신랄하게 공격한 것은 이성만능주의가 설계한 혁신체제와 전체주의 국가권력, 루소의 낭만적 감상주의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비인간적 사회, 평등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개인 자유의 파괴, 무시무시한 도덕성의 붕괴와 혼란에 대한 경고였다. 그는 도덕성을 정치체제를 초월해서 형성되는 가치로 보았고, 자유 없이는 얻어질 수 없는 덕목으로 이해했다.그가 전통을 존중한 것도 자연권으로서 자유가 보호되는 전통을 의미하였으며, 이는 도덕과 사회를 자생적 질서로 보는 하이에크의 견해와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 버크는 이런 개인 자유를 보호하는 존재로서 국가라는 신념에 투철한 휘그당원이었으며, 일반적 오해와는 달리, 구 왕정체제를 옹호하지 않았다.실종된 우리의 보수이념을 복원하려면, 이런 보수주의 정신을 되살리고, 이를 실천할 정치세력을 길러 나가는 길 밖에 없다. 우리 후손에게 자유와 번영을 넘겨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장대홍 한림대학교 명예교수

2018-08-13 10:48 장대홍 한림대학교 명예교수

[시장경제 칼럼] 국민연금 경영참여, 대안마련 시급하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지난 달 30일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 투자대상 기업들에 적극적 경영참여를 하기로 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연금관치주의 또는 연금사회주의가 급속히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다. 이에 추가로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들의 경영참여마저 활성화되는 경우 큰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정부 또는 국민연금과 헤지펀드 간의 이해가 충돌되는 경우 기업의 경영진은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구체적인 예로, 지난 3월 현대차그룹은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의 순환출자 해소와 소유구조 투명성 제고 압박에 못 이겨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하는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기로 한 바 있다. 그러나 엘리엇 측은 현대모비스를 지주회사로 하기보다는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를 합병하여 지주회사로 전환해야 글로벌 경쟁력이 제고된다는 주장을 하면서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개편안에 반대한 바 있다.이에 대해 공정위의 김상조 위원장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를 합병해 지주회사화하는 것은 금산 분리를 규정한 공정거래법 위반이라고 언급하면서 엘리엇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표명했다. 즉 정부와 헤지펀드 간에 이해충돌이 발생했고, 이 상황에서 현대차그룹은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할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문제는 헤지펀드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도 불사한다는 점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엘리엇은 지난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8000억 원대 손해를 봤다며 최근 한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시장개입이 한·미 FTA 협정을 위반한 것이므로 엘리엇 측이 입은 손해는 한국이 배상해야 한다는 논리다. 결국 한국 정부와 국민연금의 경영참여 그 자체가 ISD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2013년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하는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을 당시에만 해도 외국 투기자본들의 공격을 우려하는 지적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와 정치권은 마치 외국계 헤지펀드보다도 국내 대기업의 오너들을 더 큰 악의 축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이는 순환출자 금지 외에도 추가로 집중투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감사위원 분리선출 의무화 등을 상법에 도입해 이들의 지배권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자 했던 점을 보더라도 명약관화해진다.이번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과 관련해서 그 부작용 방지 차원에서 명심해야 할 사실들이 분명해 졌다. 그것은 바로 외국계 헤지펀드들은 한국의 기업투명성 제고나 사회적 가치 제고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과 펀드의 시세 차익과 이익 배당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떠한 행동도 불사한다는 점이다. 즉 외국계 헤지펀드와 국민연금 간의 의결권행사 및 경영참여와 관련해 이해충돌이 발생하는 경우 소송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이번 도입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을 통한 적극적 경영참여를 해야 하는 이유로 언급되었던 것 중 가장 많았던 것은 ‘연기금이 정권의 집사 역할에서 탈피해 진정한 고객(가입자)의 집사가 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스튜어드십 코드가 연기금을 위한 충실한 집사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다만, 이 코드가 때로는 외국계 헤지펀드의 충실한 집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결국 국내 기업들의 경영진이 자율적인 경영 판단을 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국내 기업에 씌워진 법적 규제의 사슬을 풀어주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자칫하면 한국의 자본시장에 주인은 안보이고 헤지펀드와 연기금만 보이는 불행한 사태가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

2018-08-06 08:00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

[유영만의 교육시선(視線)] 몸이 실종된 교육, 맘이 아픈 교육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지덕체(智德體)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교육이라야 올바른 교육이다. 하지만 현실은 지(知)를 지나치게 강조하지만 지혜는 창조되지 않고, 덕(德)은 없어졌고 공감능력을 실종되었으며, 몸(體)은 망가져서 건강한 신체기반은 무너진 지 오래다.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며 깨닫는 체험적 교훈보다 머리를 쓰는 지능을 통해 지식을 쌓아나가는 창백한 책상 교육이 주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체험을 통해 현실의 무게를 깨닫는 교육이 없다 보니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공감하는 능력은 거의 없어졌다.체험하지 않고도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체험하지 않고는 가슴으로 느낄 수 없다.몸(體)이 먼저 움직여 공감(仁)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지혜(智)가 축적되는 ‘체인지(體仁智)’ 교육이 전개될 때 지덕체(智德體)는 물론 진선미(眞善美)를 고루 갖춘 전인(全人)이 탄생될 수 있다. 교육 분야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자리잡은 인식 중의 하나는 몸보다 머리, 감성보다 이성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러다보니 체력보다 지력을 강조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공감하는 능력보다 차가운 머리로 판단하는 지성을 강조하는 교육으로 일관해왔다.철학자 니체는 일찍이 신체가 커다란 이성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은 작은 이성이라고 하면서 커다란 이성 신체가 작은 이성 머리를 지배한다고 했다. 철학적으로 신체가 보여주는 감정과 욕망은 변덕이 심해서 냉철한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건강한 신체의 담보 없이 냉정한 이성적 판단력도 생기지 않고, 타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공감력도 발휘되지 않는다. 몸은 마음이 거주하는 우주이며, 뇌력도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생기지 않는다. 아인슈타인도 “지식은 책상에서 앉아서 머리로 배울 수 있지만 진짜 소중한 지혜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인생에서 배워야 한다”고 했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간이 머리를 통해서 축적한 방대한 지식을 순식간에 대체하는 시대, 교육은 로봇과 인공지능이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지성과 지혜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배워야만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하면서 배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진짜 소중한 깨달음의 지혜는 책상에 앉아서 나오는 생각의 산물이 아니라 일상에서 이런 저런 시도 끝에 생기는 행동과 실천의 산물이다.손발을 움직여 실천하지 않고 머리로 생각만 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복잡한 생각보다 단순한 행동이지만 진지한 실천을 반복하는 일만이 어느 날 갑자기 위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다. 세상은 머리로 생각만 하는 사람보다 몸을 움직여 단순한 실천을 진지하게 반복하는 사람이 바꿔나간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움직인다는 사자성어, 우공이산(愚公移山)이 가르쳐주는 지혜다.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실천하기 어려운 자기 합리화가 시작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생각하며, 결과적으로 실천하지 않고 생각만 거듭하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책상에 앉아서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리저리’ 행동으로 옮기면서 시행착오 끝에 깨달음과 교훈을 얻는 사람이다. 영어의 알파벳은 a로 시작한다. 왜 a로 시작하는가. a는 action, 즉 실천을 의미하기 때문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2018-08-02 08:08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시장경제 칼럼] '포용적 성장론'의 한계

이승모 경제평론가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하반기 경제정책의 방향에는 사람중심 경제의 정착과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한 정부의 정책이 담겼다. 이는 오랫동안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경제적 불평등을 확대해 성장 동력을 떨어뜨리고 고용 없는 성장도 계속돼 왔기 때문이다. … 우리가 걷고 있는 포용적 성장 정책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성으로 주요 선진국들과 국제기구가 함께 동의하는 새로운 성장정책이다”라고 언급했다. 다시 말하면, 신자유주의는 성장의 수혜층이 소수에 그치고 다수가 배제되는 구조로서 이런 배제적 성장으로는 경제가 지속될 수 없고 성장의 걸림돌이 되는 반면, 포용적 성장은 글자 그대로 두루 많은 사람에게 성장의 결과가 배분되고 혜택을 누리는 성장이라는 것이다.‘포용적 성장론’은 문 대통령이 언급한 것처럼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저성장 기조와 소득불평등 악화를 배경으로 OECD, IMF 등 국제기구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포용적 성장이란 ‘경제 성장에 따른 기회가 국민 각계각층에게 주어지며 성장의 과실로 늘어난 부가 사회 전체에 공정하게 분배되는 것’을 의미한다. 포용적 성장론은 소득불평등과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기회의 불균등이 경제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실증적 근거에 기반하고 있다.따라서 주로 기회균등 증진, 불평등 완화와 성장촉진의 선순환 등을 포용적 성장론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OECD 등이 주장하는 포용적 성장론은 취약 계층에 대한지원을 집중하고 교육훈련으로써 좋은 일자리를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장론은 일차적인 경제 운용은 전적으로 시장경제에 맡기되 부와 소득의 불평등과 같은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 정부가 소득재분배와 복지 사회안전망 확충으로 그런 부작용을 해결하는 것이다.이상의 내용만 보면 포용적 성장정책이 현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초래하는 아주 좋은 정책으로 여겨진다. 특히 주요 선진국들과 국제기구가 함께 동의하는 새로운 성장 정책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정책이 과연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정책인지를 반드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정책이 소기의 목표를 전혀 달성할 수 없다면 우리 경제는 더욱 더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먼저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저성장 기조와 소득불평등 악화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결과로 해석하기 때문에 포용적 성장론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성으로 제기되었다고 거의 모두가 인식하고 있다. 또한 21세기 자본론을 쓴 피케티도 몇 백년간의 자료를 이용하여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크기 때문에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와 저성장 기조 그리고 소득 불평등의 악화는 신자유주의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부의 시장 간섭에 의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것은 미국 연준의 통화증발과 미국 정부의 간섭과 지원으로 발생한 것이다.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표방하는 자유시장경제에서는 부와 소득 불평등이 완화되고 고용 있는 지속적인 성장이 발생하여 두루 많은 사람에게 성장의 결과가 분배되고 혜택을 누리는 성장을 초래한다. 부와 소득의 불평등의 심화와 고용 없는 성장이 발생하는 주 요인은 정부와 노조의 시장에 대한 간섭 때문이다.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자본축적을 통해 경제가 성장한다. 자본축적이 되면 노동생산성이 증가하여 임금수준이 향상되고 생산도 증가하여 물가가 하락함으로써 실질임금은 더욱 높아진다. 그 결과 빈곤이 극복되고 하위층들이 중산층이나 상층부로 이전하게 된다. 따라서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오히려 완화되고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이다. 심지어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존재하더라도 계층의 순환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좋은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부가 소비자의 욕구충족 정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그리고 그것은 부자든 빈자든 관계없이 누구든지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부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많은 돈을 상속받더라도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하지 않는 재화를 생산하거나 그런 생산에 투자한다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다. 반면에 빈자의 자식으로 태어나도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훌륭한 아이디어와 기업가 정신을 갖고 있다면 투자자가 그에게 투자함으로써 언제든지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다. 심지어 10년 혹은 2-30년 동안 100대 부자에 속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교체된다.한편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크다고 해서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피케티의 주장도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다. 첫째, 자본의 소유자는 누구인가? 자본은 상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저축과 주식, 채권 등에 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자본수익률이 증가하면 이들 대중에게 자본의 수익이 돌아간다.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위층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적지 않다. 단지 상위층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 뿐이다.둘째, 자본만 있으면 소득이 저절로 창출되는가? 그렇지 않다. 자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비자 욕구 충족을 위한 아이디어와 그것을 실천하는 기업가 정신이다. 만약 자본이 있더라도 이런 것들을 갖추지 못하면 그 자본은 하루아침에 없어진다. 오히려 훌륭한 아이디어와 기업가 정신이 있으면 자본은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어느 영화감독이 시나리오만 가지고 투자 설명회를 통해 제작비를 조달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이것은 자금이 문제가 아니라 인적 자원의 능력이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소비자 욕구를 잘 충족할 수 있는 이런 곳에 투입된 자본만이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셋째, 소득계층이 고착된 것인가? 만약 상위 10%가 계속 동일인 혹은 동일 가계이거나 중위와 하위가 역시 그렇다면 부의 불평등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계속 변하고 있다면 이것은 문제가 아니가 오히려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부의 세습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즉 계층의 순환성이 높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하지만 현실에서는 부와 소득의 불평등의 심화와 고용 없는 성장이 발생하는데 그 주요인은 정부와 노조의 시장에 대한 간섭 때문이다. 노조가 시장 청산 임금수준보다 더 높은 임금을 관철하게 되면 임금격차가 더욱 더 커진다. 왜냐하면 노조가 시장청산 임금수준보다 더 높은 임금을 관철하게 되면 그 부문에서 실업이 발생하며, 실업자들은 다른 부문으로 이동하게 되고 그 결과 다른 부문에서 노동공급이 증가하여 이 부문에서의 임금수준은 낮아지기 때문이다.따라서 노조가 임금을 시장청산 임금수준 이상으로 관철하면 노조 부문에서는 임금이 상승하고 비노조 부문에서는 임금이 하락하여 노조부문과 비노조부문 간 임금격차는 더욱 더 커지고 그 결과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노조가 임금을 시장청산 임금수준 이상으로 관철할 수 있는 이유는 정부가 노동 3권 특히 노동쟁의권(파업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또한 정부가 최저임금제를 시행하면 다수의 저임금 근로자가 실직을 하게 됨으로써 소득을 상실하게 되며, 이것 역시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또한 정부가 기득권층에게 그들의 부와 소득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진입장벽을 허용함으로써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예를 들면, 의사나 변호사의 면허를 자질에 의해 결정하지 않고 단지 면허수로 제한함으로써 그들이 높은 소득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고용 없는 성장이 초래된 이유, 즉 투자 촉진으로 고용 없는 성장이 된 이유 역시 정부와 노조가 임금수준을 시장임금수준 이상으로 규제하였기 때문이다. 투자가 증가할 때 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여 임금과 고용량이 증가한다. 하지만 정부나 노조에 의해 임금이 너무 높게 유지되면 고용은 증가하지 않거나 심지어 감소한다. 결국 고용 없는 성장을 초래한 것은 임금수준에 대한 정부와 노조의 간섭 때문이다. 한편 고용 없는 성장을 초래한 것은 노동보다 기계를 더 많이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기계를 많이 이용하게 되는 이유는 기계의 사용료가 임금보다 낮기 때문이다. 기계의 사용료가 상대적으로 낮아진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부와 노조의 간섭으로 임금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더 많은 기계의 사용은 고용을 감소시킨다. 다른 하나는 노동절약적인 기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일시적으로는 고용이 감소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고용이 감소하지 않는다. 노동절약적 기계의 사용으로 비용을 절약한 사업가들이 그 돈으로 고용을 증가시키거나 다른 부문에 소비하여 그 부분에서 고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계 때문에 고용이 감소하게 되는 것은 역시 정부와 노조의 임금수준에 대한 간섭 때문이다.성장의 핵심적인 요인은 절약, 즉 자본축적을 통한 기계 도구 등, 자본재의 증가이다. 자본재의 증가가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 맨손으로 작업하는 것과 도구를 이용하여 작업하는 것을 비교해 보라. 따라서 소비 증가로 인한 저축 감소는 자본재의 감소를 초래하고 그 결과 경제후퇴를 초래한다. 자본소비를 통해 일시적으로 성장이 가능하지만 결국 자본 감소로 후퇴하게 된다. 물론 소득 증가로 소비와 저축이 동시에 증가한다면 성장할 것이다. 이 경우에도 성장의 요인은 소비가 아니라 저축이다.또한 정부의 기업에 대한 규제와 간섭과 노조의 파업 및 경영에 대한 간섭으로 투자 유인이 저해되어 기업의 투자가 위축된다. 따라서 저성장 기조가 나타난 것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케인즈 이론에 따라 소비를 장려하고 저축을 악덕으로 취급하고, 부정적인 시각에 입각한 정부의 기업에 대한 간섭 때문이다.이와 같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의해 부와 소득의 불평등의 심화와 저성장기조가 발생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 그릇된 사고에 의해 제시된 포용적 성장론은 현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초래하는 아주 좋은 정책이 되기는커녕 경제를 더욱 더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최악의 정책인 것이다. 진정한 포용적 성장론은 바로 신자유주의가 표방하는 자유시장경제이다.따라서 현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초래할 수 있는 유일한 정책은 정부와 노조가 시장에 대한 간섭을 하지 않는 자유시장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간섭을 할수록 경제는 더욱 더 악화될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포용적 성장론은 오히려 그들이 질타하는 배제적 성장이다.한편 24일 청와대에서 포괄적 성장 개념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23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문대통령이 포용적 성장을 언급한 것에 대해 언론들이 정부의 정책기조가 소득주도 성장에서 포용적 성장으로 이동했다고 보도하자 청와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포용적 성장은 소득주도성장과 다른 것이 아니라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통하여 이룩되는 것이다.”포괄적 성장론은 학술적 의미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차적인 경제운용은 전적으로 시장경제에 맡기되 부와 소득의 불평등과 같은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 정부가 소득재분배와 복지 사회안전망 확충으로 그런 부작용을 해결하는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은 소득 특히 저임금계층의 소득인 저임금을 인위적으로 상승시켜 소비증대 → 생산 및 투자 증대 → 소득 증대의 선순환을 달성하겠다는 이론이다.학술적 의미의 포괄적 성장은 재화가격과 (임금 등의) 요소가격 등 모든 가격 결정에 정부가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소득주도 성장은 임금 결정에 정부가 인위적으로 간섭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용적 성장과 소득주도 성장은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득주도 성장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주요한 지지층인 노조의 반감을 줄이기 위해 포용적 성장 속에 소득주도 성장을 포함시켜 교묘히 정치적으로 포장을 하고 있다.소득주도 성장이든 포용적 성장이든 정부가 인위적으로 경제에 간섭하는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현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초래할 수 있는 유일한 정책은 정부와 노조가 시장에 대한 간섭을 하지 않는 자유시장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다.이승모 경제평론가

2018-07-30 08:15 이승모 경제평론가

[시장경제 칼럼] 영화 ‘자유국가 존스’를 권하며

배진영 인제대 교수(경제학)전국이 불볕 가마 더위이다. 뜨거운 공기만큼 숨 쉬는 세상의 공기도 확연히 바뀌었다. 숨쉬기가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은 TV가 제법 내 친구가 되었다. 영화를 골라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제넘게 오늘은 영화 한 편을 추천하면서 그 속에 나오는 한 인간의 간절한 자유의지와 자유국가를 위한 조건을 소개한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실화에 바탕을 둔 “Free State of Jones”가 그것이다.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을 주는 영화이다.존스(Jones)는 미시시피 주에 있는 존스 카운티라는 지역 이름이다. 주인공 뉴턴은 목화사업을 위해 노예제를 끝까지 유지하고자 하는 농장주들의 욕심 때문에 남부 연합군으로 강제 징집되어 참전한다. 총을 만져보지도 않은 자신의 어린 조카도 전쟁에 동원되었고,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조카는 삼촌 곁을 한시라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조카가 자기 앞에서 총에 맞아 숨지는 것을 보고 분노하면서 그는 탈영한다. 탈영은 자유를 향한 그의 기나긴 여정의 시작이다. 그는 동조하는 사람들을 모아 존스 카운티에서 자유국가를 선포한다. 선언문은 아주 간결한 4개 항으로만 되어 있고 여기에 자유정신의 핵심이 녹아 있다. 그것을 풀어본다.첫째, “한 사람의 가난이 다른 사람의 부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빈익빈 부익부처럼 한 사람의 부가 다른 사람의 가난을 야기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다. 또는 모든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래 세 번째 조항을 보면 그것은 철저히 시장경제의 원리를 담고 있음을 발견한다. 즉 개인은 그가 새롭게 부가한 가치에 의해서만 자신의 부를 쌓을 수 있지, 남의 것을 빼앗아서 자신의 부를 쟁취할 수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둘째,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위해 살거나 죽거나를 강요할 수 없다.” 이것은 명분 없는 전쟁에 강제 징집된 주인공 뉴턴의 처절한 심정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는 무엇을 위해 심지어 누구를 위해 죽어야 하는지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이런 국가의 폭력에 탈영으로 저항했고, 자유를 얻기 위해 총을 들었다. 국가를 위시한 어떤 집단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반하는 폭력적 행위는 중단해야 함을 선포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심지어 세금이라는 명분으로 빼앗아 가는 행위에도 총으로 대항한다.전쟁과 평화. 진보와 보수. 우파는 전쟁과 보수로 주홍글씨처럼 딱지 지워져있고, 좌파는 평화와 진보로 분칠되어 있다. 평화는 언제 어디서나 공동선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없이는 평화가 없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다. 주인공 뉴턴도 평화로운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국가의 폭력에 대항한 것이다. 평화라는 용어를 좌파 쪽에서 즐겨 사용하기 때문에 이 단어의 사용을 배척하는 것은 평화와 자유의 관계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평화와 자유는 경쟁관계가 아니며, 평화가 자유의 하위 개념은 더 더욱 아니다. 평화는 자유의 상위 개념이다. 미제스의 자발적 교환이나 인간행동학 그리고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는 평화를 위해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강력한 이론들이다. 평화라는 용어 사용을 꺼리면, 우파는 평화를 싫어하는 괴물로 비치게 된다.좌파들은 자발적이고 협력적인 인간사회의 모든 관계를 빼앗고 빼앗기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가진 자는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자신의 몫을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들의 것을 국가가 강제로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정당하고 정의로우며 그것이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여긴다. 국가는 이를 위해 강력한 공권력을 지녀야 하며, 그런 국가를 신성하게 여긴다.빼앗고 빼앗기는 세계관, 그래서 다시 빼앗는 것이 정당한 국가관, 얼마나 살벌한가? 그럼에도 좌파는 ‘평화’와 ‘진보’라는 두 용어 선점으로 이를 멋지게 감추는 데 성공했다. ‘진보’의 탈은 무언가를 새롭게 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반면, ‘보수’의 탈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만 골몰하는 욕심스러운 사람들로 형상화해버렸다. ‘보수’는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근검절약과 창의력으로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려는 사람들이라고, 이를 위해 자유를 지키려 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이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의 딱지만 씌워버리면, 승패는 갈린다고 그들은 믿는다. 여기에 ‘평화’는 결정타이다. 평화의 반대어가 전쟁이 아님에도 평화만을 줄곧 외치다 보면, 어느새 우파는 자신의 욕심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괴물이 되어버린다. 주인공 뉴턴이 ‘자유’를 위해 총을 들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셋째, “자신의 땅에서 거둔 것은 자신이 가지며 그 누구도 이를 빼앗을 수 없다.”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만든 가치는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사회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이다. 이런 구절이 모세의 십계명에도 나오고 고조선의 8조법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그것은 거의 정언(定言)명령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원시수렵 사회나 고대 농경사회에서 보는 이타적 행위는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행위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자신의 굶주림과 병들 때를 생각하기 때문이며 집단을 벗어나서는 결국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온 행위라고 해석될 수 있다.넷째,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두 다리로 걷는 한 모두는 인간이다.” 위의 셋째 조항을 보면 이때의 평등은 ‘물질적 평등’이 아니라 ‘형식적 평등’을 말한다. 그는 흑인들의 실질적인 참정권을 얻기 위해 총을 들고 그들과 함께 투표장으로 나아간다. 죽음을 무릎 쓰고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의 이런 행위를 우리는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라고 한다. 이를 민주화 투쟁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쩐지 미국역사를 깎아내리는 듯하다. ‘자유화 투쟁’이라는 용어가 ‘민주화 투쟁’보다 더 비장감을 주는 용어이지 않는가? 그런데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거의 모든 약소국가들의 ‘자유화 투쟁’이 왜 ‘민주화 투쟁’으로 격하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격하라고? 그렇다. 자유는 사회적 기본가치인 반면 민주화는 이를 위한 절차적 가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그래서 대한민국 수립 이후 일어났던 운동들을 ‘민주화 항쟁’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절한 용어 사용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분명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다. 비록 국회에서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대통령 헌법개정안의 전문을 보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참정권 보장을 위한 거의 모든 항쟁들이 헌법의 ‘전문’답지 않게 나열되어 있다. 이를 민주화 운동이라고 우리 스스로 부른다. 한국에서는 오직 민주화만이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유일한 가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운동의 내용을 보면 그것은 ‘자유 쟁취를 위한 투쟁’이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있었던 항쟁들을 ‘민주화’라 부르기보다 ‘자유화’라 명명하는 것이 그 항쟁을 더욱 명예롭게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불렀다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규정한 ‘자유민주국가’에서 ‘자유’라는 용어를 그 누구도 함부로 삭제하지 못할 것이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자랑스럽지 않다고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을 것이다.배진영 인제대 경제학 교수

2018-07-23 08:30 배진영 인제대 경제학 교수

[시장경제 칼럼] 시장의 외부 비용과 정부의 외부 비용

황수연 전 경성대 교수제임스 뷰캐넌과 고든 털럭이 정부의 행동으로부터도 외부 비용이 발생한다고 주장하기 전까지, 왜 후생 경제학자들이 시장의 외부 비용만 이야기했을까? 필자는 종종 궁금해 하곤 했다.뷰캐넌과 털럭의 설명을 읽고 보니, 정부에도 외부 비용이 존재한다는 점이 너무나 자명한데, 필자와 같은 우둔한 학자야 모르고 있었다 하더라도, 기라성 같은 훌륭한 학자들이 그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니! 그들의 사고력과 통찰력이 부족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알면서 시장을 폄하하려는 의도 때문에, 일부러 시장의 외부 비용만 강조했을까? 아니면 눈에 깍지가 씐 것이 있어서 보지를 못해서 그랬을까? 아직도 필자는 그 답을 모른다.확실히 정부 행동으로부터도 외부 비용이 발생한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과반수로 결정했다고 할 때, 소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에 어긋나도 세금을 내거나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즉 아무런 보상 없이 피해를 당한다. 이것은 공해가 외부 비용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외부 비용이다.그렇지만 후생 경제학자들은 공해와 같이 시장에서 일어나는 외부 비용만 이야기했다. 그들은 시장의 외부 비용은 보았으나 정부의 외부 비용은 보지 못했다. 왼쪽 눈으로만 본 것이다. 그들은 시장이 이러한 외부 비용을 처리하지 못하므로 시장이 실패하고 시장이 실패하면 정부가 처리하면 된다고 하였다. 정부가 시장보다 더 잘 할지 여부는 따지지 않았다. 첫 번째 가수의 노래가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두 번째 가수의 노래는 들어보지도 않고 두 번째 가수가 노래를 더 잘 부른다고 결론지은 것과 같다. 그러나 제임스 뷰캐넌과 고든 털럭은 고맙게도 우리들에게 정부의 외부 비용을 가르쳐 주었다.후생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인들도 문제가 생기면 생각할 것 없이 정부가 해결하라고 요구한다. 정부가 잘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지도, 시장이 잘 할지 정부가 잘 할지 비교해 보지도 않는다. 시장의 외부 비용은 정부의 외부 비용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인데도 온통 시장의 외부 비용만 강조한다. 유권자들이 이러니 약삭빠른 정치가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우리가 집권하면 강력한 정부의 힘을 이용하여 이것저것 온갖 것을 다 해결해 주겠다고 유권자들을 구워 삼는다. 유권자들은 집권하면 시장의 외부 비용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정치가들에게 정권을 맡긴다. 유권자들에게는 티끌만한 시장의 외부 비용은 눈에 보이고 대들보만한 정부의 외부 비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시장의 외부 비용은 미치는 공간적 범위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제강업자가 야기하는 공해는 인근 주민들에 국한된다. 그러나 서울시의 무상 급식 정책으로 말미암은 외부 비용은 서울시에, 중앙 정부의 최저 임금 정책으로 말미암은 외부 비용은 전국에 걸친다. 외부 비용이 미치는 시간적 범위도 다르다. 제강업자의 외부 비용은 그 제강소가 그 곳에 있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그것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가거나 문을 닫게 되면 그곳의 외부 비용은 사라진다. 반면 정부의 소위 경제 민주화 정책으로 인한 외부 비용은 일단 법률이나 정책이 결정되면 기득 이익이 달라붙어 잘 바뀌지 않기 때문에 영속적인 경향이 있다.그 외부 비용의 크기는 또 어떠한가? 외부 비용 중에서 가장 큰 외부 비용인 생명의 침해를 생각해 보자.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스탈린과 모택동의 공산주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는가? 시공간적으로 멀리 갈 것 없이 북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정권에 의해 북한 인민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그런데 시장에서 기업이 사람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니 있다. 기업 마피아가 있지 않은가? 영화 대부에서 그렇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극히 예외적이고, 나쁜 정부가 사람들 죽이는 것과 비교하면, 비교한다는 것이 가소로울 지경이다.기업 마피아 조직의 인명 살상 사례가 있지만, 이렇게 시장에서 인명 살상 사례가 극히 드문 이유가 무엇인가? 기업 조직이 그러한 외부 비용을 부과하려고 하면 정부가 법치를 통해 그러한 행동을 처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외부 비용이 발생하는 사례가 드물다. 그런데도 만약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부의 외부 비용이다. 그것은 정부가 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국민들이 합의하여 정부더러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살인을 막으라고 위임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이 정부다. 사인이나 기업은 폭력을 행사할 수 없고 폭력을 행사하면 정부에 의해 처벌받는다. 그러나 정부에게 위임된 폭력 행사 권한은 양날의 칼이다. 잘 쓰면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사회의 평화가 유지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국민들은 엄청난 외부 비용을 부담한다.사람을 죽이는 것 외에도 정부의 잘못된 행동은 국민을 폭력 혹은 폭력의 위협 상태에 빠뜨리는 외부 비용을 끼칠 수 있다. 위임 받은 정치가의 잘못된 결정으로 국민들이 엄청난 외부 비용을 겪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북한의 핵으로 엄청난 외부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여기에는 역대 대통령의 잘못된 판단이 일조했다. 어느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개발하지 않는다고 했고, 어느 대통령은 우리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많은 자금과 자원을 지원함으로써 핵 개발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외부 비용이 클 가능성이 있는 정책일수록 최소 후회 전략을 선택하는 혜안이 필요했는데, 어리석게도 그러지 못했다.그러나 공해라는 시장의 외부 비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제강업자가 공해를 야기하고 그것이 시장에서 잘 처리될 수 없게 하는 근본 원인은 깨끗한 공기에 대한 재산권이 설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산권을 설정하고 보호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시장의 실패가 아니라 정부의 실패다. 또 후생 경제학자들은 외부 비용을 정부가 세금을 부과한다든지 보조금을 지급하여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외부 비용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에 맞게 세금을 부과하든지 보조금을 지급하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공기에 대한 시장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외부 비용의 크기를 정부가 알 수 없다. 정부가 설문 조사를 하여 비용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 지불을 하지 않고 말로 나타내는 비용은 과장되어 나타나는 거짓 비용이다. 이것을 토대로 정책을 수립, 집행한다는 것은 엉터리 비용에 토대를 두고 엉터리 정책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외부 비용 문제를 정부가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장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재산권을 정의하고 집행하는 것뿐이다.요약하자면, 시장의 외부 비용은 요란하게 떠들지만, 정작 시장의 외부 비용은 크기도 미미하고 국지적이며 일시적이다. 반면 정부의 외부 비용은 크기도 크고 전 사회적이며 영구적이다. 시장의 실패라면서 시장에 책임을 돌리는 외부 비용도 따지고 보면 책임이 정부에 있어 정부의 외부 비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문제가 많은 정부의 외부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부의 범위와 기능을 줄여야 한다.민주주의를 하더라도 입헌 민주주의, 자유 민주주의를 해야지, 과반수가 결정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구속받지 않는 민주주의를 하면 안 된다. 따라서 정부는 한정된, 할 일만 해야 한다. 국민들의 자유와 재산권을 최대한 보호하고, 안팎의 자유의 적으로부터 자유의 침해를 막아야 하며, 자유 시장 경제가 작동될 수 있도록 하고, 안팎의 자유의 적으로부터 자유의 침해를 막아야 하며, 자유 시장 경제가 작동될 수 있도록 경제 활동에서 손을 떼야 한다.황수연(전 경성대 교수)

2018-07-16 10:55 조진래 기자

[시장경제 칼럼] 세계는 원전 건설 붐, 한국은 ‘탈원전’ 역주행

조영일 연세대 명예교수현대사회에서 필수적인 전기를 만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전기를 연중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베이스로드 전원으로는 원자력발전과 석탄화력발전이 있습니다. 계절이나 주야간의 큰 전기사용량 변동에 대처하는 보조 전원으로는 가스화력발전이 활용됩니다.피크 수요와 같은 작은 변동에 대처하는 피크전원으로는 석유화력발전, 가스터빈화력발전 등이 이용됩니다. 재생에너지인 태양광-풍력발전은 수시로 변동이 심하여 전기의 품질이 아주 나쁘므로 어떤 기본 역할에도 활용할 수는 없지만, 전력량 증가에 공헌합니다.품질이 가장 우수한 전기를, 안정적이고 경제적이며, 안전하고 친환경적으로 생산하는 시설이 원자력발전소(원전)입니다. 2018년 6월 현재 세계 30개 국에서 451기의 원전이 운영 중이며,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58기의 원전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원전을 처음 도입하려는 나라도 30개국이 넘습니다. 원전이 가장 많은 미국은 99기에서 전력의 20%를 공급하고, 그 다음인 프랑스는 58기에서 전력의 72%를 공급합니다.세계에는 지금 원전 건설 붐이 일고 있습니다. 원전건설시장 규모를 1조 6천억 달러로 추산합니다. 환경오염이 심한 석탄화력발전 대신 원전을 선택한 ‘원전굴기’의 중국은 40기를 운영하면서 20기 이상을 건설 중입니다. 발전량 중 원전의 비율은 현재 약 5% 수준이지만, 2030년에는 15%, 2050년에는 24%를 목표로 합니다. 그 발전용량은 4억 MWe로 100만 kWe급 원전 400기에 해당합니다.2018년 6월 말에는 프랑스 Framatome이 개발한 160만 kWe급의 EPR(European Pressure Reactor)로 건설한 태산(台山) 원전 1호기와, 웨스팅하우스(WEC)가 개발한 100만 kWe급의 AP1000으로 건설한 삼문(三門) 원전 1호기를 차례로 전력계통에 접속했습니다.출력이 세계 최대인 EPR은 중국 뿐만 아니라, 프랑스, 핀란드, 영국 등에서도 건설 중이고, 인도의 Jaitapur에는 6기를 건설할 예정입니다.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2035년까지 전력생산과 해수 담수화용 열원으로 쓸 수 있는 열병합발전용 원전 16기를 건설할 계획입니다. 일차적으로 원전 2기 (290만 kWe) 건설에는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경합하고 있습니다.일본은 2011년 3월 11일의 동일본대진재 이후 전면 중단했던 원전을 재가동합니다. 수명이 40년이나 된 동해원전을 비롯하여 39기 이상을 재가동하여 2030년까지 원전 비중을 22%로 할 계획입니다. 당시 지진해일로 인한 사망자는 1만6천명이 넘었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원인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한국은 1978년 고리원전 1호기의 상업발전 이후 원전기술을 축적하여 원전 수출국 대열에 참여했습니다. 한국 자체 기술로 개발한 APR-1400 (140만 kWe급) 4기를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 수출하여, Barakah 원전에서 건설하여, 2019년 초 1호기부터 순차적으로 상업운전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영국의 Mooresdie 원전에도 APR-1400 3기의 건설을 추진하는 동시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수출 경쟁에 참여 중입니다.한국은 출력 150만 kWe급의 APR+를 개발하여 천지원전 1, 2호기로 건설하고, 세계 원전시장을 석권할 계획이었습니다. 자동차, 반도체에 이어서 원전이 제3의 대형 수출산업으로 각광을 받는 단계였는데, ‘원전 제로’를 표방하는 문재인정권이 원전의 신규 건설을 전면 백지화하여, 한국이 개발한 최신 원전기술을 사장시켰습니다. 대형 원전사고가 발생한 일도 없고, 원전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없는 한국에서 ‘탈원전’이 진행 중입니다.세계적 탈핵 운동의 계기가 된 것은, 1979년 3월 발생한 미국 스리마일섬 원전 2호기(TMI-2) 사고였습니다. 이 사고로 원자로는 못쓰게 되었지만, 인명피해도 없고 방사능 유출도 없었습니다. 그 바로 옆에 있는 1호기(TMI-1)는 설계수명을 연장하여 2034년까지 60년 동안 운영할 예정입니다. 전 세계에서 수명을 60년으로 연장한 원전은 89기에 이릅니다. 앞으로는 수명이 100년 이상이고, 연료 재충전 주기가 100년인 원자로도 개발될 것입니다.IEA의 추산에 따르면, 세계 에너지 사용량은 2050년까지 39% 증가합니다. 전력의 25%를 원전으로 공급하려면, 현재 발전 용량의 3배에 해당하는 1000 GWe의 원전을 추가로 건설해야 합니다. 이는 100만 kWe급 원전 1000 기에 해당합니다. 에너지원으로는 우라늄을 비롯한 원전 연료의 사용량이 가장 크게 증가할 것입니다. 해수 중에도 약 40억 톤의 우라늄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산합니다.원전 건설과 관련하여 영국을 방문한 중국의 시진핑 부부를 환송하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부부와 캐머른 수상, 오즈본 재무상. Times Cartoon by Peter Brookes (2015/10/23)세계는 지금 대형 원전과 함께 10만 kWe ~ 30만 kWe 규모의 중소형 원전, 특히 공장에서 제작하여 현장에서 설치할 수 있는 모듈식 원전 등 50가지 이상을 개발 중입니다. 한국은 33만 kWe급의 SMART(System-Integrated Modular Advanced ReacTor)를 설계했습니다. 설치가 간편하고 초기 비용이 적은 중소형원전은, 노후 화력발전의 대체, 재생에너지와 병용하는 하이브리드 시스템, 전력과 함께 열을 생산하는 열병합발전, 물의 고온 열분해에 의한 수소생산, 해수 탈염, 지역난방, 기타 산업용 열 생산용 등의 용도가 기대됩니다. 2030년까지 18.2 GWe의 소형원전 시장이 형성되며, 2050년까지 450~850기가 건설될 것으로 추산합니다.세계는 지금 원전건설 붐인데, 한국은 ‘탈원전’으로 역주행 중입니다. 문재인정권은 한국 최초로 상업운전을 시작한 고리원전 1호기(60.7만 kWe)를 40년만인 2017년 6월 18일 영구 폐쇄했습니다. 2018년 6월에는 1983년 4월 상업운전을 시작하여 수명을 40년으로 연장한 월성원전 1호기를 35년 만에 운전을 중단했습니다. 2016년에는 25기의 원전으로 전력의 29%를 생산했지만, 문재인정권의 ‘탈원전’으로 2017년에는 26%로, 2018년 1분기엔 18%로 급감했습니다. 반면에 발전단가가 원전의 1.5배인 석탄화력발전의 비중이 2016년 39.8%에서 2018년 1분기에 43.4%로 증가하고, 발전단가가 원전의 2배인 LNG 화력발전의 비중은 23%에서 30%로 증가했습니다. 남들은 화력발전을 축소하고 원전을 증가하는데, 한국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25조면 될 原電 대신 100조 신재생에 쓴다.”는 한 일간지의 2017년 12월 18일자 사설 제목입니다. 문재인정권은 2031년까지 전력량의 20%를 태양광발전으로 공급할 공급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는 100만 kW급 원전 30기에 해당하는 전력량입니다. 태양광 발전의 가장 큰 문제의 하나는 설치 면적입니다. 원전 1기의 설치에는 여의도 면적의 5분의 1이면 충분하지만, 태양광 발전시설을 설치하려면 여의도 면적의 5배 이상 30배 정도가 필요하므로, 필연적으로 환경파괴가 수반됩니다.원전의 평균 가동율은 약 80%이지만, 태양광 발전시설은 12% 수준에 불과하며, 전기 품질이 아주 나쁩니다. 태양광발전 비중이 15%를 넘으면, 수시로 발생하는 초과 발전량이나 발전량 부족을 처리해야 하는 외부불경제 요인으로 인해 전기의 경제적 가치가 50%나 떨어지므로, 전기료 상승은 필연적입니다. 재생에너지 확충에 치중한 독일의 경우 전기료가 유럽 평균에 비해 아주 비쌉니다.태양광 발전을 증가시킬수록 전기의 품질을 안정화하기 위하여 원전과 같은 기본 발전시설도 함께 증가해야 합니다. 원전 대신 가스발전을 증가시킨다면,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문제지만, 가격이 수시로 변동하는 LNG 구입에 막대한 외화를 사용해야 하므로, 한국의 에너지 안보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을 통과하는 가스관을 설치하여 러시아 가스를 구입한다면, 러시아의 에너지 속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앞으로 한국과 북한의 관계가 정상화되어 북한을 돕기로 한다면, 개성공단을 재가동하기 위해서도 북한에서 가장 시급한 전기부터 공급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원전굴기의 중국이 북한에 전기를 공급하는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한국의 ‘탈원전’이 계속된다면, 영국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원전을 운영한 나라지만, 북해 유전 개발 이후 한동안 원전건설을 유보한 결과, 자체 원전 기술이 고갈되어, 원전의 신규 건설에는 프랑스와 중국을 비롯한 외국 기술과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원자력과 관련하여 문재인정권이 할 일은, 첫번째가 ‘탈원전’의 즉각적 철회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노예계약과 같은 한미원자력협정을 전면 개정하여, 우라늄을 자체 농축하고 사용 후 연료를 직접 재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찾아오는 것입니다.조영일 연세대 명예교수

2018-07-09 10:04 조영일 연세대 명예교수

[시장경제 칼럼] 보수정치의 재건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나?

이주선 동국대 겸임교수박근혜 정권이 탄핵으로 붕괴되고 나서 좌파들이 주축인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다. 그 후 약 1년여가 지난 6월 초 지방선거는 박근혜 정권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한국당의 참패로 끝났다. 일부에서는 이제 보수 세력이 몰락했다고도 하고, 보수 이념 자체가 붕괴되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자유한국당 지도부와 의원들은 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당사를 팔고 축소하는 등 돌아선 민심을 보고 임기응변적 대응을 계속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당을 해체하고 보수 세력의 판을 다시 짜는 것이 바람직하며, 덕망 있는 새로운 인물을 영입하거나 더 젊은 세대들을 내세워 당을 정비해야 한다는 등, 백가쟁명 식 논쟁이 진행 중이다.대개 대참사에 가까운 패배가 발생하면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현재 나오고 있는 대응책들은 전술적인 측면의 이야기들뿐이기에 궁극적으로 장기 전략이 되지 못한다. 제대로 된 정체성과 이념적 지향을 가지지 못한 그 어떤 전술적인 변화도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겪었던 좌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설사 전투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되찾는다고 해도 그 정권의 성공을 담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방법론보다 정체성과 이념적 지향이 항상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보수 세력의 정체성과 이념적 지향 가운데 가장 큰 흐름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자유기업주의에 기반하여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난 박근혜 정권 붕괴의 가장 큰 원인은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대통령이 위반하고, 과거 군사독재 정권이 가진 권위주의적 사고와 방식을 동원해서 국민이 아니라 정권 자체의 이해에 몰두함으로써 해방 이후 피땀으로 일궈온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한 데 있었다는 것을 보수를 자임하는 사람들은 명심해야 한다.그러므로 보수 세력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첫째, 박근혜 정권의 붕괴 원인이 된 절차적 민주주의를 앞으로 어떻게 헌법적 기본질서에 맞게 공고히 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명백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보수 세력은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 문제가 보수 세력의 핵심 문제이자 정체성인 것처럼 행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그리고 입법, 행정, 사법의 3권 분립에 입각한 공권력의 절차적 정당성과 국민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의무를 지금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헌법 개정이 이러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업그레이드하는 핵심 아젠다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좌파들이 지금 추구하고 행하고 있는 행태들이 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반되는지를 명백히 하고,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왜 반자유민주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가지는지를 확실히 하여 이에 입각한 전투를 치열하게 벌여 나갈 수 있다.둘째, 자유민주주의적 가치 수호가 국가적 평화와 번영을 지키는 핵심임을 천명하고, 이를 수호하기 위한 국가안보와 통일정책을 수립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한미동맹은 지금의 남북 대치국면을 관리하는 축일 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에도 동북아 안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전략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설명하고 이를 공고히 해 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미동맹이 단순한 군사동맹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절차적 기본 질서를 공유하는 가치동맹임을 명백히 해야 한다.궁극적으로 독자적인 안보전략을 가지는 것은 많은 국민들의 소망이다. 그러나 열강이 각축하는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피땀 흘려 일군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을 수호하기 위해서 북한문제가 해결되고 동북아 집단안보 질서를 통한 공영의 환경에 조성되기 전까지 이것이 왜 우리에게 확고한 우위를 가진 안보전략인지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이를 공고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략을 마련하는 것에 여야를 막론한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 이는 미국과의 정부 대 정부 협력만으로는 부족하며, 양 국민의 공고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전략·전술적 토대를 강력하게 구축하는 정치적, 외교적 방략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셋째, 경제의 축을 담합구조로부터 시장경쟁으로 이행하는 데 박차를 가해야 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실패는 바로 이 부분에서의 실패에 기인한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우리 사회의 담합구조는 지금부터 20년 전인 외환위기 발발 이후 즉시 정리되었어야 했으나 오히려 확대된 형태로 고착된 상태에 있다.즉 외환위기 이후 좌파 정권 10년 간, 산업화 시대에 형성된 기득권 세력이 일부 와해되는 상황을 만들기는 했지만, 좌파가 자신의 세력 기반이 되는 노동조합의 기득권과 호남지역에서의 정치적 우위 확보에 담합구조를 그대로 적용하고, 이에 더해서 소위 민주화 운동세력이 군부를 대신하는 담합구조의 핵심 구성원으로 등장하면서 기득권의 게임 규칙을 개혁하는 데 실패한 데서 기인한다. 당연히 그 이후의 상황은 담합구조의 주축을 차지했던 좌파정권들과 재벌, 그리고 노동조합에 의한 담합구조의 확대 공고화로 나타났다. 담합구조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세력 기반이 큰 노조를 흡수해서 노동이 권력화하여 담합구조의 일원이 되는 양상으로 더욱 악화된 것이다. 시장경제적 개혁을 가로막는 제도적 장치들에 대한 개혁이 실패함으로써 현재의 경제 정체의 핵심 요인이 된 것이다.당연히 지난 10년의 보수정권에서는 이를 탈피하기 위한 개혁에 착수해야 했는데, 그보다는 과거 민주화 이전의 보수 담합구조로의 회귀를 획책하는 기회로만 삼았지, 시장경쟁을 촉진해서 기존의 담합구조를 해체하는 데로 나아가지 못하였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권력의 행사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양태를 띄게 된 것이다. 특히 규제개혁이나 혁신 정책이 실패한 것은, 바로 이러한 담합구조를 깨고 시장경제 질서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진행한 것이 아니라, 담합적 질서 안에서 이를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입지를 개선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정치공학적 고려에 치중했던 데 그 이유가 있다.그리고 이런 현상은 탄핵을 통해 집권한 문재인 정권에 의해서도 반복되고 있다. 다시 좌파정권 아래에서 담합구조의 재구축과 이에 방해가 되는 세력 제거가 목적인 방식으로 개혁(?)을 진행하고 있다. 100년 대계가 될 안보, 통일, 교육, 에너지 등에서의 정책을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집권세력에 의한 통치적 결정으로 자행하고 있고, 시장경제 질서와 경쟁에 입각한 정책보다 기업들의 자유를 제약하는 방향으로 공정거래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장이 계열사 매각을 다그치는 것은 이런 권력 남용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보수 세력은 다음에 정권을 잡아 이런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혁할 대책을 내놔야 한다. 담합구조를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와 자유시장경제, 그리고 자유기업주의에 입각해서 개혁하기 위한 규제개혁과 혁신 방안, 그리고 세계 교역질서에 대응해 나갈 방책에 대한 명백한 밑그림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청사진을 가지지 못하면 정권을 다시 획득한다 해도 또 다른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담합구조로의 회귀 정략을 답습할 것이기에 바드시 지금과 같은 실패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넷째,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1960년대에 경제성장론의 대가인 경제학자 Kaldor는 대개 GDP의 70% 내외가 노동에 분배되고 30% 내외가 자본에 분배되는 것이 장기적인 경향이라는 중요한 정형화된 사실(stylized fact)을 발견했다. 그런데 1980년 대 이후 이 노동 분배 비중이 점차 악화되어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 경향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데에 대부분의 주류경제학자들은 동의한다. 그 원인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이러한 상황은 국가가 특정 세력에게 특혜를 주는 방식으로 제도를 설계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1980년대 이후 전개되어 온 기술발전의 특징에 따라 사회가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발생한 것이다.다시 말하면 현재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경제적 격차는 한국 특유의 현상이 아니라 세계경제가 보편적으로 겪는 현상이다. 이런 격차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정권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고, 따라서 이는 모든 나라의 가장 큰 정치·사회적 문제이며, 그 해결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정치권의 핵심 아젠다이다. 그런데 승자독식(Winner-takes-all or most)의 경향은 대단히 장기적인 추세이므로, 이의 해결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데 딜레마가 있다. 왜냐하면 승자독식은 기술적·경제적 효율성을 보장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므로 이에 제약을 가하면 파이가 줄어드는 반면, 이를 용납하면 경제적 격차가 확대되는 경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모순적 상황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대개 국가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세계는 대규모의 전쟁을 겪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그러므로 이는 단순히 경제적 효율성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죄수의 딜레마’가 아니라 상호협력에 입각한 승리를 위한 대타협을 이끌어 낼 것인가에 대한 방략이 있어야 한다. 이런 대타협의 기반에 기존의 담합구조를 축소하면서 시장경쟁 질서를 공고히 하는 방안들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만들어 내야만 평화와 경제적 번영을 지켜내고 사회적 통합을 통해서 자유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을 하는 정치제도와 법치(rule of law)를 지켜낼 수 있게 될 것이다.위에 열거한 내용들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실천할 보수의 정치적 기업가정신(political entrepreneurship) 출현을 기대하고 열망한다.이주선(동국대 겸임교수)

2018-07-02 08:30 이주선 동국대 겸임교수

[유영만의 교육시선(視線)] 미래 향한 '육교' 돼야 할 교육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시선(視線)’이라는 말은 눈이 가는 길 또는 눈의 방향을 의미하는 원론적 의미와 주의 또는 관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2차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교육을 바라보는 시선은 오래된 과거의 교육 패러다임에 젖어 구태의연한 교육관으로 오염되어 있다. 특히 학부모가 교육을 바라보는 시선이 교육의 목적은 물론 내용과 방식을 지배한다. 학부모의 교육관은 물론 사회가 강요하는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욕구와 지배계층의 삶을 고스란히 대물림하는 기능적 담론과 무관하지 않다. 교육이 아무리 숭고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해도 우리를 지배하는 지배적인 교육관은 좋은 대학에 취업해서 좋은 기업에 취업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다.교육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지를 바라보는 시선도 비슷하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답게 사는 길보다 남들처럼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육이 제시하는 길도 뻔하다. 나만의 색깔을 드러내면서 나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아나서는 교육보다 남보다 잘 하기 위해 평생을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교육으로 오도(誤導)하고 있다.‘교육’을 뒤집으면 ‘육교’가 된다. 교육이라는 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미션은 지금 여기서 미래로 가는 튼튼한 육교를 건설하는 일이다. 다리가 부실하거나 부실공사를 하면 성수대교와 같은 참사가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교육을 통해 미래로 가는 육교가 부실하거나 부실공사를 한다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참담한 나락으로 전락한다.지금 여기서 미래로 가는 육교가 튼실해야만 육교 너머의 꿈의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다. 튼실한 육교를 건설하는 책임자는 육교건설을 맡은 건설업자에게만 달려 있지 않다. 어떤 육교를 건설할 것인지는 육교를 통해 꿈의 목적지로 가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 달려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전망이나 시선만큼 미래는 열린다. 어디를 바라보고 상상하는지에 따라 상상은 공상이나 망상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의 세계로 구상되어 날아온다.교육을 통해 길러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도 바로 저마다 꿈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이다. 내가 어떤 미지의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이미지를 그리는지에 따라 내가 그린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은 구체적인 일상의 세계로 다가온다.다리의 종류와 성격은 다르지만 다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내 힘으로 건널 수 없는 경계와 사이를 건널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데 다리의 존재이유가 있다. 이제까지 교육을 통해서 만든 각종 다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부실했고 부실공사의 산물이었다. 미성숙한 한 사람이 교육을 통해 성숙해지려면 지금 여기서 생각하는 사유의 경계를 넘어 다른 세계로 유도하는 각성사건이나 성장체험이 필요하다.지금 여기서도 편안히 살아갈 수 있지만 그것만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님을 교육이 각성하게 만들어준다. 교육은 그래서 깨어있는 삶으로 유도하는 각성사건이자 성장체험이다. 육체적 성장을 넘어 정신적 성숙을 촉진하는 가교로서의 교육을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한계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때로는 칼 같은 날카로운 비판의 지성으로 들여다보고, 또 때로는 뜨거운 럼주 같은 열정으로 교육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우리 교육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2018-07-02 08:00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시장경제 칼럼] 법이라는 용어의 왜곡과 혼동에 대하여

권혁철 한독경제연구소 소장사람들은 통상 “법대로 하자”고 한다. 또 한국을 법이 다스리는 ‘법치국가’라고도 한다. 의회에서 통과시킨 법에 따라 통치가 이루어지므로 법치국가라는 것이다. 또 의회에서 법을 만들므로 의회를 입법부라고 부른다. 그러나 의회에서 만들어지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법(Law, Recht)이 아니다. 따라서 법이 아닌 것을 만드는 의회를 입법부(Lawmaker)라고 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닌 것에 따라 통치가 이루어지는 국가를 법치국가(Rule of Law, Rechtsstaat)라고 할 수도 없다. 의회에서 만들어지는 것의 대부분이 법이 아닌 이유는 다음과 같다:자유주의 전통에 따르면 법다운 속성을 지닌 것만이 법이다. 예를 들어 하이에크(국내에서 대표적으로 민경국 강원대 명예교수)는 법다운 법이 되기 위한 조건을 몇 가지 언급했다. 그 중 중요한 것은 법의 일반성 조건과 법의 추상성 혹은 탈목적성 조건이다. 법은 사적 개인은 물론 국가까지 포함한 누구에게라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차별금지)는 것이 법의 일반성 조건이다.또한 법은 사람들의 특수한 이해관계나 이상(理想) 등에 관해 중립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목적과도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법의 추상성 혹은 탈목적성 조건이다. 이런 조건들에 부합되는 것들만이 법이며, 이 법에 따라 통치가 이루어지는 국가를 법치국가라고 한다. 이런 조건들에 비추어본다면, 한국의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들 중 과연 몇이나 법다운 법이 될까? 또 한국을 법치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이와 관련하여 영어나 독일어에서는 용어의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현대로 넘어오면서 그 구분이 모호해지고는 있지만. 미국 의회에서 통과되는 것들을 Law라고 부르지 않고 Act라고 부른다. 독일 의회에서 통과된 것들도 마찬가지로 Recht라 하지 않고 Gesetz라고 한다. 독일 의회를 다른 말로 Gesetzgebungsorgan, 국회의원을 Gesetzgeber라고 표현한다. Recht가 아닌 Gesetz를 만드는 기관, Gesetz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그런데 우리는 Law(Recht)도 법이라고 부르고, Act(Gesetz)도 법이라고 부른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Rule of Law’가 아닌 ‘Rule of Act’에 따라 통치하는 것도 법치국가라고 한다. 영어에서는 ‘Rule of Act’ 대신에 ‘Rule by Law’라는 표현을 쓰지만, 이것 역시 정확한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렇게 법이라는 용어의 왜곡과 혼동이 극심하다.하이에크는 이와 관련해 자신의 저서 ‘Law, Legislation and Liberty’에서 Law와 Legislation으로 분명하게 구분했다. 여기서 Legislation은 Act를 뜻한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서 제목은 ‘법, 입법, 그리고 자유’이다. 명확한 구분이 되는가? 번역서 안의 내용까지 파악하기 전에는 ‘법’과 ‘입법’이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쉽게 알 수가 없다.토론회나 세미나 등에서 ‘법치’ ‘법치국가’를 이야기할 때도 논자마다 그 의미가 모두 다르다. 누구는 ‘법치국가’라는 용어를 ‘Rule of Law’라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반면, 또 다른 논자는 동일한 ‘법치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의미인 ‘Rule of Act’라는 의미에서의 법치국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토론과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용어의 왜곡과 혼동에 따른 결과이다.용어의 왜곡과 혼동은 인식의 왜곡과 혼동을 초래한다. 용어의 왜곡과 혼동을 배제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하나의 방법은 현재의 ‘법’이라는 용어를 ‘Law, Recht’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고, ‘Act, Gesetz’에 해당하는 용어를 하나 만드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자(漢字)에 조예가 깊은 분의 참여가 필요할 듯하다. 새로운 용어에 따라 현재의 입법부도 당연히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이렇게 용어가 정리되면 사법부와 변호사의 역할도 확실하게 될 수 있다. 사법부가 ‘정의의 최후 보루’라는 표현은 Act가 아닌 Law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즉 정의의 규칙을 법 규칙에 적용한 것이 곧 Law이며, 이 Law를 수호하는 것이 사법부의 역할이라는 뜻이다. 또한 변호사를 Lawyer 혹은 Rechtsanwalt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들이 Act가 아닌 Law 혹은 Recht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권혁철 한독경제연구소 소장

2018-06-25 07:57 권혁철 한독경제연구소 소장

[시장경제 칼럼] 미·북정상회담, 미국의 국익, 그리고 한국의 안보

미·북 정상회담, 북한에 대한 양보였나?지난 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에서 있은 미·북 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해 보수우파 언론과 방송 매체들은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지나치게 양보했고 주한미군 철수라는 배신을 꾀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진짜 그런가? 몇 가지 다른 견해를 제시할 수 있다.우선 정상회담 합의문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비판한다. 동의한다. 이번 미·북 정상회담의 합의문은 2005년의 9·19합의보다도 ‘비핵화’의 관점에서 못하다. 9·19공동성명에는 북한 비핵화에 대하여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북(北)은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 조치에 복귀한다”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와 ‘NPT 복귀’, ‘IAEA 안전조치’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며 비교적 명확하게 비핵화 과정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새로운 시도 - 합의문 조항의 순서그러나 9·19합의는 1년 만에 깨졌다.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고 또 풍계리에서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합의 이행에 실패했다. 우선적으로 북한에 책임이 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미국은 국제사회의 어떠한 강제도 북한에는 통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에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초점을 맞추었다. 이번 미·북 정상회담이 과거와 다른 점이다.그래서 이번 미·북 정상회담 합의문은 조항의 순서가 다르다. 관계개선과 평화체제 구축을 비핵화 조항보다 앞에 두었다. 즉 합의문의 1항 “미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두 나라 국민들의 평화와 번영에 부합되게 새로운 관계를 설립하는 데 노력한다.”와 2항 “미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의 지속적이며 안정적 평화체제 구축에 노력한다.”가 3항 “2018년 4월27일 판문점선언을 재차 확인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rarization)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라는 조항보다 앞에 배치되어 있다. 다시 말해 트럼프 행정부는 미·북 관계개선과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을 ‘북한 비핵화’의 전제 조건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번 회담에서 과거의 국제사회 압박을 통한 비핵화 조치에 따른 관계개선이라는 실패한 방식을 되풀이 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미국의 국익’ 관점에서 보면 ‘CVID 관철’보다 ‘ICBM의 제거’가 우선미·북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한국에 온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CVID 관련 질문에 “‘완전한 비핵화’는 ‘검증 가능한’과 ‘불가역적’을 아우르는 내용”이라며 의미론적 논쟁을 경계했다. 분명히 트럼프 행정부가 이번 회담의 유일한 목표라고 강조해왔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양보했고 결국 북한 비핵화에 대한 기대를 회담 시작 전보다 낮추었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미국이 자신들의 국익(國益, national interest)을 우선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ICBM 제거’와 ‘북한 비핵화’에 대한 우선순위 논쟁에서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ICBM 제거’가 ‘CVID 관철’보다 우위에 놓였다는 것이다.이런 미국의 협상 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북한이 미국 뉴욕이나 로스엔젤레스(LA) 또는 하와이로 핵을 발사한다고 할 때 미국 국민보다 한국 국민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관측했었고 그것이 협상에서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이 현실화된 것일 뿐이다. 미국이 자신의 국익을 한국의 국익보다 앞세우는 외교는 놀랄 일이 아니다. 도리어 당연한 일이고 이를 예상하지 못하고 과대하게 트럼프의 선의(善意)에 기댄 대한민국 보수우파의 우둔함이 문제다.마지막으로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중단이나 주한 미군의 궁극적인 철수 역시 미국의 배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원인을 생각하지 않은 합리적이지 않은 판단이다. 그 시작은 문재인 정부의 친중(中) 정책이나 북한과의 화해를 강조하는 ‘민족(民族) 우선 정책’에서 찾아야 한다.동맹(한국)이라는 나라가 자신과 경쟁(중국)내지는 적대(북한) 관계에 있는 나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며 동맹을 중시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나라를 막대한 돈을 들여 보호해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한국의 외교적 태도가 트럼프에게는 거슬렸고 그 결과가 지난 5월 22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 기자의 질문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답변을 “서로 칭찬하는 이야기이니 통역해서 들을 필요가 없다.”고 언급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추할 수 있다.많은 미국 의회 지도자들은 주한 미군의 주둔이 한국 국민의 의사에 달린 것이라고 했다. 한국 국민이 뽑은 정부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동맹외교를 펴지 않는다면 미국 역시 자신의 이익에 합당한 외교를 펴는 것은 국제정치 현실주의(realism)적 관점에서 당연한 결과다. 최근 정부 당국자의 입에서 ‘한미동맹의 강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로지 ‘한반도 비핵화’를 ‘북한 비핵화’보다 옹호하고, 협상 분위기 조성을 위해 주한 미군의 훈련을 중단해야 한다는 문정인 대통령 고문의 목소리만 크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입장에서 이야기 하고 시쳇말로 김정은 ‘쉴드 치기’에 열심이니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 미군 주둔을 통해 한국의 국방을 도와줄 명분(名分)도 실익(實益)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도와주기보다는 김정은을 미국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익이고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하다고 생각했고 결국 한국과 동맹관계는 미뤄두고 김정은과 악수했다. 미·북 정상회담 후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김정은을 대하는 태도가 문재인 대통령을 대접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계산하는 모습이 역력했다.한국의 보수우파는 미국이 한국을 배신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남을 탓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는데 정권을 잃은 잘못을 탓해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지적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한국의 보수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을 것 같지도 않다면 미국에 위협이 되는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의 철거 내지는 시설 불용화 약속이 남한을 위한 북한 비핵화보다 더 중요했을 것이라고 쉽게 가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출구는 있는가? - 역사의 반복을 기다림첫째,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고 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가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분명 미국과 북한이 실무회담에서 ‘디테일’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협상은 상호적인 것이기에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의 4가지의 구체성 없는 모호한 합의 이외에는 모두 문서화 할 수 없을 정도로 미·북간에 이견(異見)이 계속되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하지만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그 누구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들이지 못했던 북한의 최고 지도자를 만나 회담하고 비핵화 합의에 이른 것은 자신이라는 트럼프의 업적은 남았다. 앞으로 북한 비핵화 이행에 실패하더라도 그것은 실무회담의 문제이므로 자신과 관계 짓지 않는다. 트럼프식 스타일의 협상이다. 미·북 정상회담은 트럼프의 이익과 미국의 국익이 돋보였던 트럼프가 진행한 ‘리얼리티 쇼’였다.그러나 주목할 것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가 들어가지 않았지만 북한과 문재인 정부가 간절히 원했던 한국·미국·북한의 종전선언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이 훗날의 협상 카드로 북한의 비핵화 이행에 대한 대가로 남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나아가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 지명자가 14일 열린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한·미 연합훈련 중단 문제에 관하여 “김정은이 진지한 협상을 하는지 가늠하는 차원에서 주요 훈련을 일시 중단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데서 미국의 공식 입장은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 미·북 ‘협상의 진행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추후 북한이 이행하는 비핵화의 속도에 문제가 있거나 실무협상이 잘 되지 않을 경우 한미 연합훈련은 다시 살아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추후 북한 압박의 차원에서라도 한·미 연합훈련이 되살아날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둘째, 미·북 정상회담의 합의문에는 구체적인 약속은 없고 모두 “노력 한다.” “노력을 약속 한다.”고 끝을 맺고 있다. 북한 김정은은 미국의 선의가 지켜질 경우에만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 역시 노벨평화상을 받거나 그에 상응하는 대통령 재선에의 이득을 얻었을 경우에만 합의가 지속될 수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이렇게 미·북 정상회담의 합의가 허술하고, 서로 약속한 것이 없으니 후속 실무회담이 합의에 이르기 어려울 것임을, 즉 비핵화 합의가 깨지기 쉬움을 예측할 수 있다. 지난 10여 주 동안 거의 매일 수 시간씩 협상을 했음에도 합의되지 않은 ‘디테일’이 추가 실무협상에서 쉽게 합의될 것을 기대하기에는 미국과 북한 모두 상대가 강하다.셋째, 미국은 북한에 계속 핵과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없애면 북한의 경제를 도와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당근을 계속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에게 보여준 동영상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을 통해 경제개발을 시작할 경우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발전상에 관한 것이었다.또 국내 일부 언론은 남북한 관계 개선에 따라 북한의 경제 개방을 당연시 하고 있다. 물론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보다 젊어 아버지가 시도하려다가 포기했던 경제개방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자신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인데 김정은이 유일사상 전제주의 체제를 버리고 북한 주민을 위한 결정을 내릴지는 진정 의문이다. 지금부터 35년 전인 1983년 9월 김정일은 중국 상해(上海)의 ‘상전벽해(桑田碧海)’를 보고 북한의 개혁·개방을 고민했었지만 결국 ‘수령 유일체제’의 보위라는 절대 명제 때문에 포기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발 더 나간 우리 언론들은 희망과 가정으로 가득 찬 북한 경제개방 계획만 시리즈로 다루고 있다. 역사는 소유권(property right) 보장과 경제적 자유(freedom in economy) 보장 없이는 경제발전이 없었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우리 언론은 ‘자유의 필요성’은 보지 못하고 ‘계획’만 보도하고 있어 안타깝다.마키아벨리의 경구한국과 일본을 겨냥한 북한의 단거리 중거리 미사일이 1000여개이다, 중국의 세력을 그 동안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이 막고 있었는데 주한 미군이 철수하면 동맹의 한축이 무너지므로 미일동맹의 부담은 커질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미국이 동북아 패권을 중국에 넘기는 결정을 하지 않는 한, 주한 미군의 철수는 완결되기 쉽지 않다. 동북아 세력균형과 패권의 시각에서 본다면 주한 미군의 철수나 무력화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나아가 트럼프 이후의 대통령이 결정을 번복하거나 트럼프 임기 중에도 공화당과 의회의 반대 때문에 철회될 가능성도 있다. 1977년 카터 대통령의 미군의 철수 계획도 국내외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1979년 중단되었던 사례도 있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의 세력균형 악화를 경계하면서 주한 미군이 지속적으로 주둔해야 함을 집요하게 미국에 요구했었다. 당시에는 주한 미군 철수 저지에 일본의 역할이 컸는데 이번에도 일본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태도다.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취소하는데 바로 동의했다. 물론 대화·평화론자들은 북한 비핵화와 종전선언, 평화협정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오는데’ 주한미군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자주 국방’을 논의할 필요가 있는지를 반문(反問)할 것이다.하지만 역사는 지도자는 국가의 생존과 국민의 안전이라는 국익을 그 어떤 평화보다 먼저 고민해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미국으로 돌아가 바로 올린 트윗에서 “내가 사무실을 차지하기 전(취임 전) 우리는 북한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었다....더 이상은 아니다. 모두들 안녕히 주무시라.”고 적었다.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은 지도자의 메시지였다.마키아벨리는 군주론 24장에서 “당신의 주도하에 있고, 자신의 능력에 입각한 방어만이 효과적이고, 확실하며, 영구적이다.”라며 “군주는 자신의 능력(군사력)에 의존해야 함”을 경고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편으로 ‘안보 팔이’급으로 선거 때마다 국민에게 표를 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미군에 기대 ‘자주 국방’을 게을리 했던 보수우파가 새겨 들어야할 경구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익 추구 외교를 비판하기에 앞서 ‘자주 국방’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지도 실천하지도 못한 자신의 허물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미국에게 군사적으로 받으려고만 했지 대한민국의 가치와 중요성을 스스로 지키려는 노력에 정성을 다하지 않았음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이 한국의 안보에 주는 교훈이 크다.김인영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

2018-06-17 14:30 김인영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

[시장경제 칼럼] 반(反)기업 정서는 ‘정서’의 문제인가

황인학 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반기업 정서’라는 표현은 우리 주변의 경제 또는 사회 현상을 얼마나 적확하게 반영하는 용어일까?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였다. 그 해 악센추어(Accenture) 보고서에서 한국인의 기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 점차 사용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우리 국민의 기업가와 기업 활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평가를 의미하는 용어로 언론뿐만 아니라 학술 논문에서 거리낌 없이 관용구처럼 쓰이고 있다.잠시 화제를 돌리면, 기업가와 기업 활동에 대한 국민 일반의 인식과 태도는 그 나라의 기업가정신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이다. 이 때문에 EC와 OECD에서는 각국의 기업가정신을 평가함에 있어서 기업가와 기업 활동에 대한 국민 일반의 인식과 태도를 주기적으로 조사해오고 있다. 그 결과를 보면 언제나 우리나라의 반기업 정서가 가장 높다. 글로벌 기업가정신개발원(GEDI)에서 해마다 조사, 발표하는 보고서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누가 언제 조사를 해도 결과가 다르지 않자, 일부에서는 반기업 정서를 한국인의 경제관을 대표하는 특징으로 꼽는 경우도 있다.경위야 어떻든 관용적으로는 반기업 정서라고 하지만 이는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반기업 정서는 정서(情緖)보다는 인식(認識)과 판단(判斷)에 관한 문제이다. 정서와 인식은 확연히 다르다. 정서는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감정의 작용이다. 인식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알다는 뜻이고 감정의 작용 외에도 이념, 문화, 경험과 지식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반기업 정서는 인식의 문제를 감정이 문제의 전부인양 오도하기 때문에 적절한 용어라고 할 수 없다.부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다 보면 때때로 상황 파악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 반기업 현상은 유난하기 때문에 당사자인 기업인들도 당연히 이 용어에 익숙하다. 이에 대해 기업인들은 기업이 사회와 국가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음에도 공(功)을 인정해주기는커녕 비판이 우세한 우리 현실에 안타까움과 억울함을 토로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배고픔은 참아도 배 아픔은 못 참는 정서와 문화의 특질을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계몽운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린다. 당사자인 기업인조차 부정확한 표현에 현혹되어 반기업 현상의 실체와 원인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CSR)도 그렇다. 요즈음은 웬만한 중견기업도 CSR 부서를 두고 있다. 우리 회사가 돈만 열심히 버는 게 아니라 사회문제 해결에도 애 쓰는 ‘좋은 기업’이라는 평판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CSR은 반기업 여론을 개선하는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CSR의 실제 내용을 보면 회사 임직원의 봉사활동과 자선적 기부활동 등, 국민 정서에 기대어 환심을 사기 위한 사회공헌 사업이 대부분이다. 경제단체에서 펴낸 사회공헌백서에 의하면 우리나라 대기업의 GDP 대비 사회공헌활동 금액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따라서 반기업 현상이 정말로 100% 정서의 문제였다면 CSR 활동이 증가한 만큼 감소해야 했다. 현실은 반대이다. 감소하기는커녕 반기업 여론의 수위가 턱 밑까지 차오르고 급기야는 시장경제질서의 근간마저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다. 무엇이 문제일까?기업인들이 진실로 반기업 현상이 개선되기를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그 실체와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대응전략을 강구, 실천해야 한다. 정서에 기대어 사회공헌활동에 주력하는 것은 비용 대비 효과가 낮다. 몇 가지 제언을 하면 첫째, 반기업 현상은 정서와는 별도로 지식의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갈파해야 한다. 필자가 2016년「규제연구」 논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장원리를 이해하고 경제 IQ가 높을수록 기업 및 기업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다. 예를 들면 가격이 교환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사람은 가격이 사용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거나 또는 투입 원가에 비례해서 결정되는 게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에 비해 반기업 인식이 낮다. 또한 우리나라는 주요 경쟁국에 비해 대기업 밀도는 낮고 중소기업 밀도는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친기업 성향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국민은 평균 학령은 높지만 그에 비해 경제 IQ는 낮은 편이다. 따라서 기왕에 CSR을 함에 있어서 기업들은 자사와 협력업체의 임직원, 더 나아가 사업장이 속해 있는 지역사회의 경제 IQ를 높이는 일에도 관심을 갖고 투자에 나서야 한다.둘째, 준법 경영은 필수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ISO 19600(준법경영시스템), ISO 37001(뇌물방지경영시스템)을 도입해서 실천하는 것도 대안일 수 있다. 그러나 기업 활동의 신뢰를 높이려면 준법경영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세간의 이목을 끄는 중요한 경영의사결정은 준법(遵法)을 넘어 합당성(合當性)까지 감안해서 신중하게 결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2017년 에델만 신뢰도 지표(Edelman trust barometer)에서 우리나라 국민이 기업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29%에 불과하며 비교대상 국가 중 최저 수준이다. 기업 불신은 기업인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예컨대 경영권 승계나 소유지배구조 재편 과정에서 현행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해서 지배주주와 그 가족의 이익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은 기업인과 기업집단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주범이다. 1996년 중앙개발이 전환사채의 발행과 배정을 통해 최대주주를 변경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불법이 아니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씻기지 않은 원죄로 작용하고 있음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야 한다.셋째, 자신의 역할을 남에게 떠넘기고 무임승차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반기업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기업하기 좋은 환경, 규제개혁은 요원하다. 반기업 여론은 규제 아이디어를 싹 틔우고 정치인은 여기에 편승해 규제를 제도화한다. 여론이 틀려도 정치인은 추종한다. 반기업 여론에 편승해서 규제를 잘못하거나 또는 반대로 규제개혁을 게을리하면 국민경제적으로 엄청난 기회비용(opportunity costs)을 지불해야 하지만 불행히도 정치인에게 기회비용은 무용한 개념이다. 기업이 대관 팀을 아무리 크게 꾸려 대처해도 반기업 여론이 계속되는 한, 규제범람의 물결을 막을 수 없다. 이제는 기업인들이 중지를 모아 반기업 현상에 지속적으로,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1970년대 초 오일 쇼크 여파로 미국에서 반기업 여론이 확산되자, 쿠어스(Joseph Coors) 같은 기업인이 앞장서 만든 게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 1973)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반기업적 인식과 태도가 기업의 지속발전과 시장경제질서의 근간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더 늦기 전에 기업인들이 앞장서 이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황인학(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

2018-06-13 10:00 황인학(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전문가 칼럼] '물고기 낚는 법'을 가르쳐라

홍승희 리툴 코리아 책임연구원유대인의 경제 교육법 중에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낚는 법을 가르쳐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르빌 가체트, 조지 소로스, 마크 저커버그 등 성공한 투자가나 사업가 중에는 유대인이 많습니다. 미국 인구에서 유대인의 비중은 2%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미국 국민 총소득의 15%에 달하는 돈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미국 포춘지가 선정한 100대 기업의 소유주와 최고경영자의 약 40%가 유대인입니다. 어떻게 그들은 이런 막강한 힘을 기를 수 있었을까요.유대인들은 13세 때 ‘바르마쓰바’라는 성인식을 치릅니다. 이때 많은 친척이 모여 축의금을 전달하는데 이때 받는 돈이 한화로 5000만원에서 7000만원으로 적지 않은 규모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자금을 자녀가 직접 투자하도록 해 이익을 보기도, 손실을 보기도 하면서 경제 경험을 쌓도록 합니다. 자연스레 성년이 될 때까지 약 7년간 돈에 대한 공부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그런데 우리는 돈에 대해 학교에서 배워본 적이 없지요. 살면서 과소비나 무리한 투자로 곤욕을 치를 때 ‘돈을 제대로 관리하는 법을 배웠더라면…’ 하는 후회를 해보지 않으셨나요. 우리 아이들은 이런 후회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용돈관리를 통해 소비습관과 자산관리 능력을 길러보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요.용돈을 주기적으로 지급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녀에게 용돈을 주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부모가 열심히 해서 번 돈이 자녀의 손으로 옮겨가고 아이 스스로 본인의 목표를 위한 지출 또는 저축하는 것은 정말 가치가 있는 일이죠.용돈을 지급하기 전 자녀와 ‘돈’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눠야 합니다. 용돈이 얼마나 필요할지, 그 돈을 어디에다가 쓸 생각인지, 얼마의 기간마다 줄지, 무슨 요일에 줄지 정합니다. 이때 부모가 일방적으로 정하기보다 자녀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반영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용돈을 지급하면 아이가 용돈을 책임감 있게 사용하게 됩니다.우리의 삶에 있어 돈의 무게는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아이들 역시 ‘돈’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돈을 모으고 쓰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돈만 좇는 삶’을 사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모의 모습에 아이들의 돈에 대한 가치관이 잘못될까 염려도 됩니다.내 인생의 ‘돈’이 어떤 의미인지, 돈을 좀 더 객관적인 자세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욱 중요한 것이 돈을 피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며 관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용돈을 주고, 돈을 관리하고, 용돈기입장을 써 보면서 아이들 스스로 느끼는 것도 이 맥락에서 아주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돈을 밝히는 게 아니라 돈을 현명하게 관리해 나갈 수 있는 아이로 만들어주는 것,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10대부터 시작하는 돈 관리, 자녀용돈관리부터 시작합시다.홍승희 리툴 코리아 책임연구원

2017-07-02 15:28 홍승희 리툴 코리아 책임연구원

[전문가 기고] 간호간병통합서비스 정착 기대

이인덕 서울의료원 간호부장“어!”라는 감탄사와 함께 “될까?” 라는 의문으로 내게 다가온 제도. 2013년 ‘보호자 없는 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포괄간호서비스’를 거쳐 지금은 ‘간호간병통합서비스’로 불리어지는 제도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한 조를 이뤄 24시간 입원환자를 돌봐주는 서비스를 말한다.간호사로 현장에 있으면 간병 문제로 가족 간 불화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보호자와 환자를 많이 본다. 특히 메르스 같은 국가 재난적 전염병이 확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보호자가 필요 없는 간호간병통합서비스는 우리나라에서 환자들을 위해 꼭 정착시키고 싶은 제도였다.하지만 시범사업 2년을 포함해 시행 4년이 지난 올 5월 말 현재 간호간병통합서비스를 시행하는 의료기관은 전국적으로 338곳에 2만 2289병상에 불과하다. 정부나 건보공단이 당초 목표로 삼았던 1556개 의료기관의 21.7%에 그치는 낮은 참여율이다.간호간병통합서비스 사업을 평가한 연구결과(고려대학교 예방의학과, 2015)에 의하면 환자 보호자들은 제도 이용으로 사회활동의 기회가 증가했으며, 간호사의 직접 제공시간은 늘고(1.7배), 환자와 보호자의 만족도는 10% 이상 높아졌다. 또 85% 이상이 주위에 권하거나 다시 이용할 의사를 보이는 등 제도에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병동 내 간호배치를 높임으로써 업무 부담이 줄어 간호사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특히 감염(2.87배), 욕창(2.45배), 낙상(2.32배)의 위험비가 일반 병동에 비해 낮아 ‘간병비’라는 경제적인 부담을 낮출 뿐만 아니라 입원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좋은 제도로 인식되고 있다.그럼에도 이 서비스의 참여율이 낮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가용 간호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최근 간호대 정원 증원과 간호인력 취업교육센터를 통한 유휴인력 확보 정책 등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병원에서 일할 간호사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간호사 처우가 낮아 그렇다는 의견과 대형병원, 대도시 쏠림 현상과 야간근무를 해야 하는 병원이 아닌 다른 현장에서 일하려는 간호사가 많아서 그렇다는 의견들이 팽팽하다. 실질적인 근로환경 및 처우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 수집과 학계 전문가의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공약한 ‘나라다운 나라’란 국민의 고통과 슬픔이 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국가가 정책적으로 해결해주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임상현장에서 지켜보는 간병의 고통은 간호간병통합서비스의 성공적인 정착으로 해결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국가가 모든 입원환자를 책임지고 돌봐주는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이 제도를 이용해본 환자와 가족들의 눈물겨운 사연을 접하다 보면, 간호간병통합서비스로 발생하는 국가 비용보다 환자 가족의 손발을 풀어주어 간병 부담을 경감시킴으로써 얻는 국가적·사회적 이득이 훨씬 더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령화와 핵 가족화로 가족간병이 날로 어려워지는 이 시점에 간호간병통합서비스의 안정적 정착으로 “될까?”라는 의문이 “어! 성공했네”가 되어 우리 국민들의 간병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경제적 부담도 대폭 덜어주기를 기대해 본다.이인덕 서울의료원 간호부장

2017-06-29 12:58 이인덕 서울의료원 간호부장

[전문가 기고] 성병이 진화하고 있다

김석진좋은균연구소 김석진 소장지난해 세계보건기구 (WHO)가 오랫동안 임질 치료에 사용하던 퀴놀린 계통의 항생제를 더는 사용하지 말라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가장 흔한 성병 중의 하나인 임질의 치료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세계건강기구의 가이드라인 조정은 2003년 이후 10여 년 만으로, 항생제에 대한 내성균 문제가 세계적으로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임질은 매독, 클라미디아와 더불어 가장 흔한 성병 중의 하나로 성관계가 활발한 젊은 연령층에서 잘 발생한다. 매년 7800만 명이 감염되는 임질은 배뇨 시 통증을 느끼거나 빈뇨 증상을 보이고 심한 경우 요로를 통해 농이 나오기도 한다.하지만 대체로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관계를 통해 상대방에게 전염시킬 수 있다. 치료 없이 방치되면 불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또한, 임질이 있으면 HIV에 감염될 확률이 일반인보다 2~3배 높다고 알려져 있다.인류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해온 임질과 같은 성병은 20세기에 들어 페니실린이 발견되면서 드디어 정복되는 듯 보였다. 성병이 대부분 박테리아성 질환이라서 페니실린, 테트라싸이클린 등 일반 항생제로 쉽게 치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항생제가 사용되기 시작한 지 몇 십 년이 지나지 않아 세균들이 항생제에 살아남는 방법, 즉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기르면서 치료에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임질을 발생시키는 균은 신속한 유전자 변이를 통해 항생제로부터 생존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여러 가지 항생제에 내성을 보이는 슈퍼임질균이 일본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내성을 가진 성병 균에 대한 문제는 항생제 오용과 남용이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항생제가 요로감염을 비롯한 다양한 감염증에 지나치게 자주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복약지도를 정확히 따르지 않는 환자 또한 항생제 내성균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 의사가 처방한 항생제를 끝까지 먹지 않고 증상이 좋아졌다고 해서 항생제를 중단하면 몸에 살아남은 세균들이 내성균으로 진화하는 것이다.새로운 항생제 개발은 수년이 걸리는 반면 세균이 항생제에 내성을 배우는 속도는 더욱 진화하고 빨라지고 있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인류가 가진 그 어떠한 항생제에도 말을 듣지 않는 임질균이 나타나는 시나리오도 가능하다. 또한 새로운 항생제가 만들어진다 해도 그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균이 나타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결국 건전한 성생활, 항생제의 오남용의 방지 등을 통해 유해균을 죽이는 것보다 유해균이 살 수 없는 건강한 신체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겠다.

2017-06-13 08:52 조진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