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행과 불법 사이 증권업계 ‘채권 돌려막기’, 금감원 이번엔?

박준형 기자
입력일 2023-05-28 09:33 수정일 2023-05-28 09:39 발행일 2023-05-28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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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건전 영업 관행 전방위 검사…자전·파킹거래 예의주시
금감원
(사진=연합뉴스)

금융당국이 증권사들의 이른바 ‘채권 돌려막기’ 관행에 대한 대대적 검사에 나섰다. 금융당국은 증권사가 고객의 돈을 맡아 운용하는 자산관리 서비스인 랩어카운트 상품을 판매하고 자산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불법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증권사들은 유동성 완화를 위한 것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금융당국이 검사를 전방위로 확대하면서 업계의 오랜 관행이 이번엔 철퇴를 맞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29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증권사 랩어카운트·신탁 시장의 불건전 영업 관행 등과 관련해 현장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하나증권과 KB증권이 첫 대상이며, 다른 증권사로 검사를 확대하고 있다.

금감원이 주목하는 부분은 자전거래와 파킹거래다. 자전거래는 증권사가 특정 주식을 같은 가격과 수량으로 동시에 매도·매수하는 것이다. 파킹거래는 채권 거래 시 장부에 곧바로 기재하지 않고 일정시간 보관(파킹)하도록 한 뒤 결제하는 방식이다. 거래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금리가 내려 채권 가격이 오를 때 장부에 기록하면 실제보다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

금감원은 “일부 증권사들이 미스 매칭(만기 불일치)을 통해 과도한 목표수익률을 제시하게 되면 자금시장경색 및 대규모 계약해지 발생 시 환매 대응을 위해 연계거래 등 불법·편법적인 방법으로 편입자산을 처분할 수 있다”며 “이는 법상 금지하고 있는 고유재산과 랩·신탁재산 간 거래, 손실보전·이익보장 등에 해당될 소지가 있어 검사를 실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부 증권사는 단기 투자 상품을 판매해 유치한 고객의 자금을 장기 채권에 투자하는 미스매칭 운용 전략을 쓴다.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저금리 기조에서는 만기 불일치 전략이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해 값이 오른 채권을 팔아 쉽게 수익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장 상황이 악화될 경우다. 지난해의 경우 금리 인상으로 시장에 넘쳐나던 돈이 빠져나가자 채권 가격이 폭락했고, 증권사는 막대한 평가손실을 입었다. 만기를 앞둔 고객들이 환매를 요청했지만, 증권사는 채권에 투자한 돈을 회수하지 못하면서 환매 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일부 증권사는 증권사 간 간접 자전거래, 파킹거래 등을 통해 사태 수습에 나섰다.

KB증권도 하나증권에 있는 KB증권 신탁 계정을 이용해 자사 법인 고객 계좌에 있던 장기 채권을 평가손실 이전 장부가로 사들여 수익률을 높인 의혹을 받고 있다. 기준금리 급등으로 채권 가격이 폭락하면서 수익률을 맞출 수 없게 되자 하나증권과 간접 자전·파킹거래를 한 것이다.

KB증권
KB증권(사진=연합뉴스TV)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은 제85조에서 자전거래를 불건전 영업행위로 규정하고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자전거래를 통해 자산을 사고팔아 수익률을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투자자 보호 및 건전한 거래질서를 해할 우려가 없는 경우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자전거래가 가능하다. 환매에 응하기 위한 경우, 해지 또는 해산에 따른 해지금액 등을 지급하기 위한 경우, 금융위원회가 투자자의 이익을 해칠 염려가 없다고 인정한 경우 등이다. 이 예외조항 덕분에 업계에선 오랜 기간 자전거래가 암묵적으로 이어져왔다.

KB증권은 금감원 검사에 대한 입장문에서 “상품 가입 시 투자자들에게 미스 매칭 운용전략에 대해 설명했고 고객 설명서에 계약 기간보다 잔존 만기가 긴 자산을 편입해 운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사전에 고지했다”고 밝혔다, 이어 “손실을 덮을 목적으로 다른 증권사와 거래를 한 것도 아니다”며 “지난해 9월 말 레고랜드 사태로 시중금리가 급등하고 CP(기업어음)시장 경색이 일어나자 2차 고객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시장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한 거래를 진행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투자 손실을 숨길 목적으로 자전거래를 한 것이 아니기에 불법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금감원은 손실 보전을 위한 자전거래는 위법이라는 입장이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불법이 있을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그간 고객 돈을 굴려 손실을 입은 뒤 이를 자전거래를 통해 메우는 관행 자체가 편법이란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채권 돌려막기에 대해) 이전에도 경고 조치가 있었지만, 업계에 관행적으로 만연해있는 것 같다”며 “최근 금리 인상으로 채권 가격이 폭락하는 상황에선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위법 여부는 검사해봐야 알겠지만 일단 ‘껍데기(거래흐름)’만 봤을 땐 자본시장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이 채권 자전·파킹거래에 칼을 빼들면서 증권사들은 초긴장 상태다. 금감원 검사 결과에 따라 무더기 적발 및 제재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자전·파킹거래 과정에서 금품수수 등 불법 리베이트가 오고간다는 의혹도 있어 수사의뢰 및 형사처분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금감원은 이미 업계의 고질적 관행을 근절하고 시장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금감원 검사에 증권사의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일각에선 업계의 영업 행태에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박준형 기자 jun897@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