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분위기도 안좋은데… "'쉬는 아빠' 먼나라 얘기"

장애리 기자
입력일 2016-03-01 16:40 수정일 2016-03-01 19:08 발행일 2016-03-01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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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1만5500여명 하나은행, 남성 육아휴직자 '제로'
국민은행 최근 3년간 21명, 전체 육아휴직자의 0.,75%
보수적인 사내 분위기와 기업문화 때문

#국내 한 시중은행 영업점에서 근무하는 박모 씨(40)는 최근 육아휴직 신청을 고민하다 포기했다. 지난해 태어난 쌍둥이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내 뜻을 접었다. 박씨의 직장에서 지금까지 남성이 육아휴직을 쓴 사례는 단 한건도 없어 불안감이 컸고 신청 절차, 업무복귀 등 휴직과 관련한 궁금증을 해소할 길도 막막했다. 인사상 불이익도 고민됐다. 가뜩이나 ‘구조조정’ 바람이 불고 있는 상황에서 휴직이 훗날 ‘흠’이 될까봐서다. 휴직으로 인한 업무공백이 고스란히 동료에게 전가될 것이란 부담감도 컸다. 박 씨는 “아직까지 은행에서 남성의 육아휴직은 용납이 안되는 단어”라며 “얘기를 꺼내자 주변 동료들도 모두 만류하는 분위기였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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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최근 정부는 ‘일과 가정 양립 정책’의 핵심과제 중 하나로 남성의 육아휴직 활용 보편화를 꼽고 2020년까지 남성 휴직률을 15%로 끌어올리겠다고 나섰다.

지난해 전체 육아휴직자 가운데 남성 휴직자가 5.6%(4825명) 수준에 그치자 남성의 육아 참여율을 높일 수 있는 환경조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현재 만 8세 이하 자녀를 둔 모든 근로자는 최대 1년까지 육아휴직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은행권에서 쉬는 아빠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직원 수가 2만명이 넘는 KB국민은행에서는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총 2850여명의 직원이 육아휴직을 썼다. 이 중 남성 직원의 수는 21명, 전체 육아 휴직자 수의 0.75% 수준이다. 직원수 1만명이 훌쩍 넘는 IBK기업은행도 매년 육아휴직자가 500명 이상 발생하지만 최근 3년간 남성은 5명에 그쳤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신청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어느 지점 아무개가 신청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질 만큼 드물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규모의 또 다른 은행들 역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숫자가 적어 공개하기가 부끄럽다”며 “나도 아이를 둔 아빠로서 휴직을 신청하고 싶지만 아직까지 사내 분위기가 남성 육아휴직을 용인할 수준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들 은행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남성의 육아휴직 사례가 전무한 곳도 있다. 1만5500여명이 근무하고 있는 KEB하나은행은 지금까지 단 한명의 남성도 육아휴직을 쓴 적이 없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2000년대 중반부터 육아휴직제를 운영하고 있다”며 “절차적 어려움은 없으나 아직까지 휴직을 신청한 직원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은행권이 남성의 육아휴직에 유난히 혹독한 이유는 보수적인 사내 분위기와 기업 문화 때문이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80년대부터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던 여성에 비해 2000년대 들어 도입된 남성 직원의 휴직에 대해선 아직까지 엄격한 분위기”라며 “흔치 않은 경우이다 보니 (휴직을 내면) 몸이 아프거나 이직준비를 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불황을 맞은 업계 상황도 아빠들이 육아휴직을 못쓰는 요인이다. 희망퇴직 실시, 성과연봉제 적용 등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작업이 한창인 상황에서 행여나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육아휴직을 신청하더라도 2, 3개월씩 단기로 쓰는 남성 직원이 대부분이다.

2013년 업계에 도임된 시간선택제도 사정은 비슷하다.

금융노조 관계자는 “복직 후 인사고과 상 불이익을 받거나 승진 기회가 적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휴직을 꺼리는 분위기”라며 “정해진 매뉴얼을 중시하고 안정적인 선택을 추구하는 은행 문화도 한 몫 한다”고 말했다.

장애리 기자 1601chang@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