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137년 대한민국 통신 역사 한눈에… KT, '원주 통신사료관' 공개

박준영 기자
입력일 2022-08-16 13:45 수정일 2022-08-16 13:52 발행일 2022-08-16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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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사용된 전화기 비롯해 6000점 이상의 통신사료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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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학 정보통신역사연구소장이 KT 통신사료관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박준영 기자)

KT가 우리나라 정보통신기술(ICT)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 사료를 전격 공개했다. KT가 소장한 통신 사료는 6000여 점에 달하며 이 중에는 문화재로 등록된 사료도 다수 존재한다.

KT는 16일 국내 미디어에 ‘원주 통신사료관’을 공개했다. KT 통신사료관이 외부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통신사료관에는 19세기 말부터 사용된 전화기를 비롯해 백괘형 공전식 전화기, 최초의 다이얼식 전화기, 인쇄전신기 등 문화재로 등록된 다수의 사료가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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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 이용된 장식형 자석식 전화기. (사진=박준영 기자)

가장 오래된 사료는 1800년대 말 사용된 전화기 ‘덕률풍’이다. 덕률풍은 전화(Telephone)의 영어 발음을 한자식으로 표기하면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황제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신하와 직접 통화를 했는데, 황제의 전화가 걸려오는 시간에 맞춰 의관을 정제하고 네 번의 큰 절을 올린 후 전화기를 받들고 통화를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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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요금표시형 공중전화기(왼쪽부터)와 체신1호 자석식 전화기. (사진=박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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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석식 전화기(왼쪽부터)와 자동형 전화기의 모습. (사진=박준영 기자)

시대별 전화기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전화기는 교환기의 발달에 맞춰 진화해 왔다. 초기 전화기는 송수신기가 분리된 형태로 송신기에 붙은 핸들을 돌려 신호를 교환기에 보냈으나, 이후 송수신기 일체형 전화기가 나왔다.

자석식 전화기와 공전식 전화기는 전화기를 들면 교환기에 신호 램프가 들어와 교환원이 통화를 연결하는 방식이었고, 다이얼식 전화기는 다이얼을 돌려 자동으로 교환기(기계식)를 동작시켜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1970년대 말까지 자동교환기의 고장을 예방하고자 전화국에서 지급하는 전화기만 사용하도록 했으나, 1980년대 이후에는 개인이 선호하는 다양한 색상과 모양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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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무선 전화기와 자동식 전화기, 유무선 자동응답전화기. (사진=박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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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선 겸용전화기와 코드 없는 전화기, 전자식 전화기. (사진=박준영 기자)

교환기의 경우, 초기에 사용된 교환기는 자석식으로 100회선 단신 교환기와 20, 15, 10회선의 소형 벽걸이형의 교환기 2종류로 일본에게 강탈 시 총 12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자석식 시내 교환기는 1987년 전국 자동화 완성 후 발안전화국을 마지막으로 모두 철거됐다.

우리나라 통신역사에서 의미 있는 교환설비는 바로 1984년 자체 개발한 ‘TDX-1’이다. 1986년 상용 개통했으며 이는 세계에서 10번째였다.

TDX 교환기 개발은 외국에 의존해 오던 교환설비를 국내 독자 기술로 설계, 제작 생산해 구축함으로써 당시 만성적인 전화적체를 해소하고 전국 전화보급의 큰 역할을 했다고 KT 측은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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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독자 기술로 설계 및 제작한 교환기 ‘TDX-1’. (사진=박준영 기자)

TDX-1 교환기가 보급되기 전에는 전화 수요에 맞춰 공급할 수가 없어 전화기를 구하기 어려웠다. 전화를 사고팔거나 전·월세를 놓는 ‘전화상’이 서울에만 600여 곳이나 성업했다.

전화를 둘러싼 부조리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전기통신법을 개정해 1970년 8월 31일까지 가입된 전화(가입자수 45만 7280명)는 매매할 수 있도록 하되, 그 후 새로 가입된 전화는 금지했다. 전자를 백색전화, 후자를 청색전화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전화기 색깔이 아니라 가입 대장의 색이 청색과 흰색이었던 데서 유래했다.

당장 전화가 필요한 사람은 비싸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백색전화를 살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전화 값은 더 뛰어서 백색전화 한 대가 270만원까지 치솟았다. 서울시내 50평짜리 집값(230만원 안팎)보다 더 비쌀 정도로 전화는 ‘재산목록 1호’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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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용 공중전화기의 모습. (사진=박준영 기자)

사료관에는 시대별 공중전화도 즐비하다. 우리나라 공중전화가 처음 설치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이었다. 그 당시 이용요금은 50전으로 쌀 다섯가마니(약 400㎏)를 살 수 있을 정도의 아주 비싼 요금이었다.

전화가 귀했던 시절 공중전화야말로 서민의 애용품이었다. 1962년 옥외 무인공중전화기가 처음 설치됐으며 시내·외 겸용 공중전화기는 1977년에 가서야 서비스를 시작했다.

1982년 국내 기술로 개발한 첫 시내·외 겸용 DDD 공중전화가 나오면서 공중전화도 보편화됐다. 공중전화 초기에는 동전주입식이 도입됐다. 하지만, 거스름돈이 반환되지 않는 데 불만이 높아졌고 이에 쓰는 만큼 차감되는 공중전화 카드가 등장했다. 공중전화 카드는 올림픽, 엑스포 등 당시 주요 이벤트나 문화재 등으로 꾸며지며 그 시대를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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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다우라이형 시내외겸용공중전화기(왼쪽)와 DDD 공중전화기. (사진=박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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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외겸용공중전화기(왼쪽부터)와 차세대 공중전화기, 자급제 공중전화기. (사진=박준영 기자)

통신사료관에는 시대별 전화번호부도 보관되어 있다. 1966년부터 가입자 수가 많아지면서 전화번호부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당시 유선전화 가입자들이 쉽게 번호를 찾도록 KT는 1년에 1부씩 무료로 전화번호부를 배포해왔다. 두꺼운 전화번호부는 가정이나 공중전화 앞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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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과 공중전화 등에 배치되어 있던 전화번호부. (사진=박준영 기자)

모스부호로 시작된 전신기는 전신국(現 우체국)에 설치되어 전보를 주고 받는 용으로 사용됐다. 인쇄전신기는 타자기를 치며 종이에 메시지를 인쇄할 수 있어 당시 서면 통신의 속도를 향상한 계기가 됐다.

인쇄전신기를 통해 1대1로 연결하다가 ‘텔렉스’를 이용하면서 내용을 저장했다 송수신이 가능해졌다. 텔렉스는 근 현대 대한민국 수출업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팩스와 PC 통신으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전신기는 전신국에 설치되어 전보를 주고 받는 용으로 사용됐다. 최근 개봉된 영화 ‘헌트’ 촬영에 실제로 KT 통신사료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인쇄전신기가 동원됐으며, 당 시대 정보통신을 구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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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수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인쇄전신기’. (사진=박준영 기자)

이동통신의 변천사도 통신사료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82년 235명에 불과했던 삐삐 가입자는 10년 만에 6178배인 145만 2000명, 1997년에는 1519만 4821명까지 늘었다. 삐삐의 대중화는 공중전화의 보급도 가속화해 1997년 42만 3502대까지 설치됐다.

본격적인 이동전화의 시작은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의 기술이 상용화되면서다. CDMA는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방식을 채택한 2세대(2G) 이동통신 기술이다. 음성뿐 아니라 ‘문자’라는 디지털 데이터도 전송할 수 있어 당시에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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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호출기 ‘삐삐(왼쪽)’와 시티폰 단말기의 모습. (사진=박준영 기자)

PCS 상용 서비스가 개시되고 이동통신은 날개를 달면서 빠르게 확산됐으며, 1999년에는 이동전화 가입자 수(2156만명)가 유선전화(2104만명)를 앞질렀다.

이날 KT 통신사료관의 해설을 맡은 이인학 정보통신연구소장은 “KT가 원주에 보관하고 있는 통신사료들은 우리나라 정보통신 흐름에 따른 시대상과 국민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아주 높다”며 “KT가 대한민국의 통신 역사의 본가인 만큼 앞으로도 미래 ICT 역사에서 주역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준영 기자 pjy60@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