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구타유발자'의 침묵은 정당한가

이희승 기자
입력일 2022-04-07 14:36 수정일 2022-04-11 09:09 발행일 2022-04-0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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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문화부 차장

따귀 한대의 후폭풍이 거세다. 아카데미 시상식서 폭행 논란을 빚은 윌 스미스가 퇴출 위기에 몰렸다. 그는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 시상을 하러 나온 크리스 록이 자신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삭발 헤어스타일을 언급하자 화를 참지 못하고 록의 뺨을 내리쳤다. 아내는 병으로 인해 극심한 탈모증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

이날 스미스는 영화 ‘킹 리차드’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폭행 소동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사과했지만 반응은 냉담하다. 넷플릭스는 윌 스미스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영화 ‘패스트 앤드 루스’의 제작을 무기한 연장했다. 시상식이 열리기 일주일 전 감독이 바뀌는 악재가 있긴 했지만 이때다 싶어 손절한 모양새가 역력하다. 스미스는 노예의 탈출 이야기를 다룬 애플TV+ 드라마 ‘이맨시페이션’의 촬영을 끝냈으나 애플은 이 작품의 상영 여부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그를 할리우드에 안착시킨 ‘나쁜 녀석들 4’도 제작단계였으나 역시 중단될 예정이라는 현지 언론들의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크리스 록은 윌 스미스를 고소하지 않겠다고 입장을 밝혔으나 아카데미 이사회는 회의를 열어 징계 절차에 돌입했고 이틀 만인 지난 1일 윌 스미스는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자진 반납했다.
아카데미의 흑역사로 회자될 ‘따귀사건’은 제64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곧장 패러디됐다. 미국 코미디언 네이트 바가치는 지난 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MGM 그랜드 가든 아레나에서 열린 사전 시상식에 등장해 “이제 코미디언들은 시상식 무대에서 농담할 때 꼭 헬멧을 써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자리에 앉아있던 가수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으나 ‘뼈있는 농담’임을 아는지 폭소로 이어지진 않았다.
어쨌거나 이번 아카데미의 따귀 사건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모양새다. 폭력은 정당방위가 아닌 이상 적어도 무대 위에서는 발생되지 말아야 할 엄연한 금기사항아닌가. 하지만 나는 지금도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는 크리스 록에게 아쉬움이 남는다. 그날 방송에서 삭발한 모습에 대해  농담을 하자 당사자인 제이다 의 불쾌한 표정이 스쳤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에서 알아주는 사랑꾼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크리스 록 역시 탈모가 심해지자 결국 삭발을 감행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할리우드에서 흑인에 대우가 달라진 건 빨라야 10년 정도 됐고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그들은 알게 모르게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뭉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평소라면 웃고 넘어갔을 농담이어도 아픈 사람을 곁에 둔 가족으로서 윌 스미스의 반응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록은 아직도 제이다에게 사과 한마디 없다. 그저 헤어스타일에 대해 놀리기 전 “내가 널 좋아하는 거 알지?”라고 눙친 게 전부다. 역시 ‘맞은 사람이 발 뻗고 잔다’는 옛 어른들의 말은 틀리지 않다. 
이희승 문화부 차장 press512@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