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금감원장 공석과 왕후장상의 씨

김수환 기자
입력일 2021-08-01 14:49 수정일 2021-08-01 14:51 발행일 2021-08-0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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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금융증권부 기자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나.” 무신들이 실력으로 문신을 내몰아 신분보다 실력이 중요한 시대임을 알린 무신정변. 이것을 본 천민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처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신분제도가 사라진지 오래인 현 시대에도 이 ‘씨(혈통)’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학벌, 경제력 등을 기준으로 또 다른 신분체계가 강화되는 모습이다. 모 대선 유력후보 부인의 출신 논란을 겨냥해 ‘감히 영부인을 꿈꾼다’고 비방하는 벽화가 등장한 서울 종로 한복판이나,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대기업 오너 일가의 갑질 논란 뒤에도 사람들은 왕후장상의 유전자를 따져 본다. 공정과 정의에 민감한 MZ세대가 바꿀 수 없는 부모나 배경 말고 스스로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평가받겠다며 공무원시험에 매달리지만, 공무원 세계에서도 최고위직은 능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어른들은 알고 있다.

과거 금융감독원에 몸 담았던 한 전직 고위관료에 따르면 금융시장에서 서슬 퍼런 감독기구인 금감원의 수장 자리야 말로 갈 사람이 정해진 자리라고 한다. 누가 금감원장이 될 수 있냐는 기자의 물음에 기본적으로 ‘서울대 나오고 청와대 말 잘 듣는 사람’이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어디 봐주라면 봐주고 말을 잘 들어야 해. 우리 같은 사람은 안 시켜. 칼잡이일 뿐이지.” 능력은 인정받았지만 ‘출신 성분’이 빈약했다는 그는 이 농담 같은 말을 남기고 초야로 사라졌다.

금감원장 공석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어서일까.

김수환 기자 ksh@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