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충분히 동의되지 않은 삶의 차용…‘사적대화 인용’ 예술인가? 사생활 침해인가?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0-07-23 17:30 수정일 2020-07-24 10:31 발행일 2020-07-24 13면
인쇄아이콘
[트렌드 Talk] 김봉곤 작가 사적대화 차용 논란
Untitled-19

“내가 내 동의를 철회하는 거예요!”

지난 11일 개막한 연극 ‘마우스피스’(9월 6일까지 대학로아트원씨어터 2관) 중 40대 여성 극작가 리비(김신록·김여진, 이하 가나다 순)와 공감하고 교류하던 소년 데클란(이휘종·장률)은 이렇게 선언한다.

아버지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 그 역시 아버지와 같은 마지막을 따를 것이라 비아냥거리는 주변인들, 그럴 때면 그리는 살지 않겠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데클란. 부모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방치돼 스스로의 예술적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이 소년의 이야기는 한때 촉망받았지만 슬럼프에 빠져버린 극작가 리비에게 활력이 되고 새 작품의 모티프가 된다. 

예술과 삶,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리비와 데클란은 연대하고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 과정 속에서 데클란은 자신의 이야기를 무대화하는 데 ‘동의’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는 리비가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깊이 공감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 믿음과는 다른 결과물에 데클란이 그 동의를 철회하는 과정을 통해 충분히 동의되지 않은 채 차용돼 ‘예술작품’이 된 삶과 그 삶의 주인이 겪는 고통, 이를 차용해 이야기로 만들어낸 예술가가 항변하는 진정성 등은 예술계가 늘 숙고하며 탐구하고 있는 질문들이다.

연극 마우스피스
연극 ‘마우스피스’(사진제공=연극열전)

이 연극이 다루고 있는 질문들은 예술계에서 실제로 꽤 자주 일어났고 여전히 현재진행 중인 것들이기도 하다. 예술의 대상화나 소재가 되는 이와 이를 차용해 예술작품으로 끌어들이는 이, 두 진영의 의도나 시각, 이해 정도의 간극은 격렬히 충돌하거나 어느 한쪽에 대한 외면 혹은 무시로 일단락되곤 한다. 

‘사적대화 무단 인용’으로 구설에 휩싸인 퀴어문학가이자 문학동네 편집자이기도 한 김봉곤 작가 역시 다르지 않다. 그는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이자 소설집 ‘시절과 기분’ 수록작인 ‘그런 생활’에 실존인물인 ‘C누나’와 실제로 나눈 스마트폰 메신저 대화를 “토시 하나, 띄어쓰기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인용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는 ‘C누나’임을 자처하는 당사자(이하 C)의 SNS 문제제기로 뒤늦게야 공론화됐다. 그가 제기한 “단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옮겨 쓴 것”은 성적 조언과 대화 과정 중 “성적 수치심과 자기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포함된 “원고지 약 10매 분량”이다. 

C에 따르면 그는 ‘그런 생활’ 발표 전인 지난해 5월 김봉곤 작가로부터 “작품에 등장시켜도 되는지”에 대해 질문받았고 “당연히 어느 정도 가공을 하리라고 예상하고 그래도 된다고 답했다.” C의 주장으로는 “성인지 감수성과 저작권의 개념, 영감과 도용의 차이를 논의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라는 김 작가에 대한 믿음이 전제된 ‘동의’였다.

하지만 송고 후 보여준 원고의 내용은 그 믿음에 반하는 것들이었다. 이에 C는 김 작가에게 항의하고 수정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수정 없이 ‘문학과사회’ 2019년 여름호에 발표됐고 김봉곤 작가는 이 작품으로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올 5월부터 시작된 C의 항의와 수정 요구를 김봉곤 작가는 물론 ‘그런 생활’이 발표된 ‘문학과사회’의 문학과지성사, 제11회 젊은작가상 및 ’수상집’의 문학동네, 소설집 ‘시절과 기분’의 창비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 진다. 

김봉곤
김봉곤 작가(사진제공=문학동네)

송고 후 보여준 원고의 내용”에 대한 C의 문제제기에 대해 김봉곤 작가는 “항의와 수정 요청이 아닌 소설 전반에 대한 조언으로 이해했다”며 “애초의 차용 허가를 번복하는 차원으로 인지하지 못해 수정이 필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그리곤 ‘그런 생활’이 ‘문학과사회’ 2019년 여름호에 처음 발표됐을 때는 별 언급이 없던 C가 1년여가 지난 올해 4월 29일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본에 대해서 지적했다고 반박했다. 이에 ‘문학과사회’ 온라인 열람 서비스 중지를 요청했고 5월 후로는 문제의 대화내용을 삭제한 수정본으로 발행됐다고도 밝혔다. 

4월 8일 출간된 ‘젊은작가상 수상집’에 대해 문학동네는 “작가가 당사자에게 사과하고 수정에 대해 협의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수정내용은 당사자의 확인을 받아 전자책의 경우 즉시(2020년 5월 8일), 종이책은 6쇄(5월 28일)부터 반영했다”고 밝혔다. 

5월 8일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 ‘그런 생활’ 삭제 및 수상 취소 요청’이라는 제목의 내용증명을 받았으며 심사위원들에게 수정 부분이 심사결과에 결정적인 요소인지를 판단하는 의견을 물었다고도 전했다. C가 요구한 ‘수정 사실 공지’에 대해 문학동네는 “사용허락 과정과 수정 이유에 대한 (C) 당사자의 주장과 작가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는 사안”이라며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또 다른 피해 사실도 알려졌다. 김봉곤 작가의 데뷔 표제작 ‘여름, 스피드’ 주인공 영우의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는 “실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요소들이 소설 속에 사실로 적시돼 아웃팅 당한 이력을 두 번 갖게 됐다”며 “제가 김봉곤 작가에게 수년 만에 연락하기 위해 전달한 페이스북 메시지 역시 동일한 내용과 맥락으로 책 속의 도입부가 됐다”고 적었다. 이어 “당연히 동의 절차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11톡톡_03
사적대화 차용을 둘러싼 공방에 김봉곤 작가는 결국 사과하고 젊은작가상을 반납했다. 출판사들은 ‘그런 생활’ ‘여름, 스피드’가 실린 모든 출판물을 수정 여부에 상관없이 회수·환불조치하겠다고 알렸다. 
충분히 동의되지 않은 채 여과 없이 차용된 ‘사적대화 인용’ 사건에 대해 다수의 출판관계자들은 “당연히 잘못”이라고 입을 모은다. 더불어 C가 문제제기 게시물에서 “문단은 이 사건을 알면서도 외면했다”고 밝힌 데 대해 조심스레 동의를 표하기도 했다.  다수의 출판관계자들은 “표절도 눈감아 주며 스타 작가를 배출했던 문화권력”에 대해 언급하며 “작가의 상 반납, 출판물 회수·환불조치로 문학상을 지켜냄과 동시에 독자 및 동네서점에서 조짐을 보이던 불매운동을 서둘러 잠재우는 모양새”라고 의견을 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이재경 건대교수·변호사는 “당사자의 동의가 없는 무분별한 베끼기로 인한 정보통신망법 위반, 프라이버시 침해로 인한 민법 750조 불법행위 사례”라며 “재현의 윤리 및 취재 자료의 정당성은 여러 장르의 작가들이 조심스레 다뤄야 하는 부분”이라고 법적 소견을 밝혔다. 이어 “김봉곤 작가의 경우처럼 당사자 동의 없는 100% 베끼기는 유례가 없는 만큼 문학계에 파장이 크다”며 “결국 작가 윤리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문학은 물론 무대작품, TV와 영화 등 영상 콘텐츠, 만화 등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삶’을 재료로 한다. 하지만 그 ‘인간의 삶’은 누군가의 고유성이자 정체성이며 프라이버시다. 혹은 치부이거나 자기혐오와 수치심, 간신히 붙들고 버티는 힘이자 희망이기도 하다. 마구잡이로 침해돼서는 안될, ‘충분히 동의돼 인용 혹은 차용되고 윤리적으로 다뤄야 할’ 것들이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