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석 산업IT부장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달도 안된 올해 2월 24일. 그는 백악관 참모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못 하나가 없어서 편자(horseshoe)가 사라졌고, 편자가 없어서 말을 잃었다. 말이 없어 전쟁에서 졌다. 결국 왕국은 망했다.” 그의 손에는 손톱 만한 작은 반도체가 들려 있었다. 표정은 비장했다. 이날 백악관에서는 반도체 등 4개 품목의 공급망보고서를 작성하라는 행정명령이 내려졌다. 백악관은 그 뒤 수없이 글로벌 기업 대표들을 불러 모아놓고 공급망 재구축을 역설했다. 삼성전자도 이 자리에 세 차례나 불려갔다. 미국이 필요한 반도체는 전량 자국 내에서 생산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미 상무부가 글로벌 반도체 기업에게 최근 3년치 매출과 원자재 및 장비 구매현황, 고객정보 등 핵심 정보를 11월 8일까지 제출하라고 요구해 무리를 빚고 있다. 당연히 지나친 시장개입, 자유무역질서 훼손이라는 비난이 잇따랐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관련 기업들이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뒤늦게 ‘반도체 연대·협력 협의체’를 만들어 민·관 공동대응에 나선다고 했지만, 회의 한 두 번에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남은 한달간 민간은 민간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외교채널을 총동원해야 한다.미국이 반도체동맹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크게 두가지. 하나는 자국 산업 생태계 보호다. GM·포드 등 자동차 회사들이 차량용 반도체 품귀현상으로 줄줄이 공장을 멈췄다. 차량용 뿐 아니라 반도체 부족현상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반도체가 붕괴되면 도미노 현상으로 연관산업 전체가 붕괴되기 때문이다.또 하나는 안보다. 특히 반도체는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전기차 자율주행차 등 첨단산업 뿐 아니라 통신장비, 로봇, 자율주행차,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비의 핵심이다. 특히 최첨단 무기에 장착되는 반도체는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안보전략자산으로 분류돼 통제를 받는다. 이를 놓치면 미래 기술패권 경쟁에서 속절없이 밀리고 궁극적으로 안보까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로벌 공급망 보고서 작성명령은 중국에 대한 선전포고인 동시에 세계 기술패권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신호다.글로벌 공급망이 중요이슈가 되는 이유는 반도체 칩 하나를 설계해 완제품을 생산하기까지 국경을 수십 차례 넘어야 할 정도로 분업화가 복잡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설계-제조-후공정(조립·테스트·패키징) 단계를 거치는데, 미국은 설계부문만 주도하고, 생산과 후공정은 대만·한국·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 의존한다. 미국 생산량은 12%에 불과하다. 70% 이상이 동아시아에 집중돼있다.미·중(G2)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우리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제품이 아무리 뛰어나도 시장이 없으면 설 땅이 없어지듯 ‘세계의 공장’인 중국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미국의 요구대로 순순히 따라서도 안된다. 아무리 동맹국이라도 간(肝)까지 바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더욱이 강대국의 ‘힘의 논리’가 국제 자유무역질서를 앞서게 할 순 없다. 수십 년 간 땀 흘리며 공부해 온 우등생의 답안지를 통째로 바치라는 미국의 요구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편자’가 어찌 미국에서만 귀중하겠는가.박운석 산업IT부장 ospark@viva100.com
2021-10-05 13:58 박운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