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김영삼 재평가

강창동 기자
입력일 2021-11-11 17:17 수정일 2021-11-11 17:17 발행일 2021-11-11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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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재평가

1993년 2월25일, 제14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 김영삼은 취임사에서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 시대를 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라며 문민시대 개막을 선언했다. 평생을 ‘정치인’이라는 직업 하나로 일관한 김영삼이 그 천직(天職)의 최고위에 등극한 순간이었다.

그는 1954년 약관 26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된 이래, 지금까지 깨어지지 않는 ‘트리플 최연소 기록’을 수립했다. 1965년에는 37세로 의정 사상 최연소 제1야당 원내총무, 1974년에는 46세 나이로 당 총재가 된 것은 전무후무한 불멸의 기록이다.

김영삼이 당 총재에 오를 때까지 한국 야당에서는 60대가 되어야 그 자리에 앉는 게 상식이자 관례였다. 신익희, 조병옥, 장면, 박순천, 윤보선, 유진오, 유진산 등은 예외없이 모두 60대에 야당 총재에 올랐다. 이처럼 화려한 정치 커리어를 쌓은 끝에 마침내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다시는 정치적 밤이 없을 것이다”는 말로 취임사를 마무리했다.

‘김영삼 재평가(612쪽, 2만원, 조갑제닷컴)’의 저자 오인환은 김영삼과 임기를 함께 한 ‘한국 정치사상 최장수 각료’이다. 그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김영삼의 정치 인생을 몇 가지 측면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IMF외환위기의 역사적 책임론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민주화 투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기여도가 높은 민주 인사가 누구인가”라는 해묵은 궁금증에 관한 것이었다. 이어서 김영삼이 시행한 금융실명제가 헌정사상 이승만의 토지개혁에 이어 가장 성공한 개혁의 하나가 되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중 금융실명제는 모든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으로 저자는 분석한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쳐 점진적으로 연쇄적 파급효과를 냈고, 전산화 시스템이 발전하는 것과 맞물려 국민의 모든 금융 거래와 부동산 거래 내역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YS와 DJ의 비교도 흥미를 자아내는 대목이다. YS는 현장주의, 라이벌인 DJ는 치밀한 계산을 앞세운 신중 노선으로 대조적이었다. 군부독재 시절 민주주의의 투사로 역사에 길이 남은 두사람의 캐릭터와 행보도 사뭇 달랐다. YS가 큰 승부에 강했다면 DJ는 디테일에 강했다. YS는 몇 수 앞을 바라보는 뛰어난 동물적 감각에다 직관력과 예지력을 겸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비현실적인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배척하고 현장에 답이 있다고 믿는 실용주의자였다.

바닷가 출신인 그는 거친 기질, 배짱과 용기로 수많은 위기에 대처해왔다. 순발력이 뛰어나 판단이나 결정, 행동이 빨랐다. 한번 결심이 서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나가니까 매사 템포가 빠르기 마련인 난세에서 성과를 쟁취할 기회가 많았다.

YS는 “DJ의 인내와 집념, 끈기를 높이 평가한다”고 한 반면 DJ는 “YS의 용기와 포용력을 높이 산다”고 했다. 한국 민주주의를 꽃피운 두 정치 영웅들의 라이벌 평가를 곱씹어볼 만하다.

저자는 문민정부가 끝난 지 23년, YS가 서거한 지 6년 만에 이 책을 펴내는 이유를 이렇게 썼다.

“함박눈이 온천지에 쏟아지고 있는데 빗자루를 들고 앞마당을 쓸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격동의 시대인 만큼 세월이 10년쯤 지난 다음 나서는 것이 적절한 타이밍일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빠른 템포가 미덕인 한국적 현실에서는 걸맞지 않은 발상이었으나, 때를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연유로 해서 세월이 많이 흘렀다.”

YS의 정치 인생이 곧 한국의 야당사이자 현대사인 만큼, 정적(政敵)이나 경쟁자들과의 관계를 언급하는 데 있어서도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 오인환은 1939년 서울출생으로 경기고, 한국외국어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일보에 들어갔다. 사회부장, 정치부장, 편집국장, 주필을 거쳐 1993년부터 5년간 문민정부 공보처 장관을 지냈다. YS와 초대 문민정부 5년의 생사고락을 함께 한 셈이다.

강창동 대기자·경제학 박사 cdkang1988@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