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만지면 죽는다"… 불가촉천민 핍박의 시작

권기철 객원기자
입력일 2021-06-14 07:00 수정일 2021-06-17 20:36 발행일 2021-06-1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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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철의 젊은 인도 스토리] 전염병과 차별의 역사(上) 음모론과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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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직업을 잃은 불가촉천민 가족이 고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

인도의 일일 코로나 확진자 숫자가 40만 명을 넘어서다가 정부의 강력한 통제로 인해 최근에야 그나마 8만 명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은 과연 국경과 인종을 가리지 않고 그 위세가 대단하다.

최근 코로나를 전염병 그 자체로 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 인류 스스로가 증명하는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서구권 국가들에서 매일 들려오는 동양인 혐오 폭력사태를 비롯한 차별의 음습한 모습들이다.

현대 문명 사회의 원시적 형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 주는 모습들이다. 그 누구의 죄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과 코로나 발원인 아시아인들을 차별하는 모습에서 어쩔 수 없는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염병은 차별의 역사이기도 했다. 우리 세대에 이 펜데믹과의 싸움은 처음이지만, 인류 역사를 들여다 보면 우리는 수 없이 많은 펜데믹과 싸워 왔다. 고대 이집트 람세스 5세가 전염병인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는 사실이 최근 DNA 조사로 드러났듯이 전염병의 역사는 참으로 길다.

거의 모든 전염병은 갑자기 찾아 온다. 그것은 인류의 숙명이다. 피할 수가 없다. 전염병이 몰고 오는 혼란은 갑자기 찾아와 우리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태를 초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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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을 진료하러 다니던 의사의 이미지. 사진=위키피디아

다가오는 질병의 공포와 죽음 앞에 인간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 없게 되면서 많은 부조리에 휘말리게 된다. 그렇다면 전염병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자신들의 심리적인 평온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어떤 것을 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일까? 우선은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을 배척하는 것이다. 어디에서 온 전염병인 줄 모르는 이상, 우리 곁에 이 외지인을 방치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인식은 전염병에 대한 고전적 사회적 거리 두기의 시작인 것이다.

중세 유럽을 위협한 흑사병은 약 7600만 명에서 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역사상 최악의 펜데믹이었다. 흑사병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서 옮겨 왔고 1343년 무렵엔 크림 반도까지 닿았다. 거기서부터 화물선에 들끓던 검은쥐들에 기생하던 동양쥐벼룩을 기주(寄主)로 하여 지중해 해운망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때 유럽 총인구의 30~60%가 목숨을 잃었다.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 50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거의 1억 명에 가까운 인구가 줄었다. 이 때 줄어든 인구는 수 세기가 지난 17세기에 접어들어서야 이전 수준까지 회복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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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이 유행한 기간에 벌어진 유럽인들의 유태인 학살을 묘사한 그림. 페스트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피해가 발생하면서 유럽에는 대공황이 닥쳤다. 사진=위키피디아

한편 1349년 2월에 흑사병이 유행하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흑사병의 감염원이라며 모함을 받은 유태인 약 1만 6000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은 공동묘지로 이유 없이 끌려가서는 즉결 심판을 받았다. 죄목은 단 하나, 흑사병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스위스 바젤에서는 도시의 모든 유태인이 피살되기도 했다. 당시 길거리에는 ‘향후 200년 동안 유태인이 거리에 다니는 것을 금지한다’는 공고가 내걸리기도 했다.

많은 유태인들이 핍박을 당한 이유는, 유태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만 흑사병이 발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인종들은 모두 흑사병에 걸려서 죽어 나갔지만 이들 거주지는 멀쩡했기에 오해를 산 것이다.

최근 현대 병리학자들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당시 유태인들은 율법적으로 손을 자주 씻고 쥐의 천적인 고양이를 기르는 등의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 유태인들의 음모론도 팽배했다. 우물에 독을 뿌려 그런 질병이 일어났다는 소문도 만들어져 퍼져나갔다. 즉, 인간의 시기심이 유태인들이 병을 퍼뜨렸다는 소문을 돌게 만들었고 이것이 대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이와 유사한 대표적 사례가 1923년 일어났던 관동 대지진이다. 당시 궤멸적인 피해가 발생한 이 지역에서 일본 내무성은 ‘조선인들이 방화와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다고 하니 주의하라’는 공지문을 각 경찰서에 보냈다.

이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조선인들이 폭도로 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를 일삼는다는 소문이 돌았고, 결국 조선인 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일본 경찰은 학살되는 조선인을 보호하기는커녕 경찰서에 숨어든 조선인들마저 일본 자경단에게 내주었다. 국민들의 불만이 조선인들에게로 향하도록 여론을 조장한 것이다.

유럽에서도 국왕과 영주들은 유태인들에 대한 소문이 터무니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 폭동을 말리려고 유태인을 보호했다. 하지만 상황은 요지부동이었다. 유태인을 보호해 준 한 영주를 백성들은 ‘유태의 스승’이라고 비난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이렇게 유럽 전역에서 유태인 배척과 학살은 빈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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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에 미국을 휩쓴 스페인 독감을 치료받고 있는 미군들. 캔자스주의 캠프 펀스턴 군 병원 모습이다. 사진=위키피디아

불과 100여 년 전인 1918년에 1차 세계 대전 사망자인 1500만 명 보다도 많은 1700만 명에서 5000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스페인 독감이 확산됐다. 당시엔 인플루엔자가 원인으로 꼽혔다. 이것은 불결한 위생과 열악한 생활 환경 등이 원인이었지만, 독일인이 오염시킨 생선과 중국인들이 원인이라는 소문이 크게 돌았다.

스페인 독감이란 명칭도 스페인에서 유행했던 독감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당시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많은 관련국들이 보도 검열을 당해 이 독감에 관한 뉴스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그런데 스페인은 당시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검열로부터 자유로워 이를 집중 보도할 수 있었고, 이에 그런 명침이 따라붙은 것이다.

다른 국가 국민들은 스페인 언론을 통해 질병에 관한 정보를 얻어야 했고, 그래서 스페인 독감이라고 불린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질병 이름 자체가 스페인 독감으로 불리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억울한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러 연구 결과 알려진 바에 따르면 스페인 독감의 실제 발원지는 미국이라는 게 사실상 정설이다.

과거에는 스페인 독감, 홍콩 독감 등 질병이 유행한 지역의 이름을 붙이는 관행이 있었다. 노로바이러스는 오하이오주 노워크(Norwalk)라는 지명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특정 집단 이름도 쓴다. 레지오넬라병은 미국 재향군인회의 총회에서 유행이 시작되어 붙은 명칭이다. 한때 한국에서 유래한 ‘한탄 바이러스’는 토종 바이러스라며 자랑스러워(?) 하기까지 했다.

예전엔 이런 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교류가 잦아지고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어느 덧 차별의 근거가 되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로 해서 2015년부터 WHO(세계보건기구)는 이런 경우 특정 지명과 연계하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다.

덕분에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우한 독감’ 혹은 ‘우한 폐렴’으로 불리던 것이 ‘코로나 19’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이다. 우한 독감이라는 용어가 지속 사용되었다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차별과 폭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 되었을 것이다.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은 지금까지 사회 곳곳에 집요하게 남은 고질병이지만, 이 또한 전염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대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건너와 백인과 유사한 외모를 갖고 있었던 아리아인(Aryan)들이 있었다. 이들이 인도로 진출할 때 자신들이 거주했던 북쪽의 춥고 건조한 날씨와 다른 고온 다습한 지방 특유의 풍토병 때문에 상당히 많은 피해를 입었다. 풍토병에 대해 면역력을 전혀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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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천연두의 여신 ‘시탈라’. 천연두를 비롯한 열을 발생시키는 모든 병을 차료하는 힘을 지닌 여신으로 숭배받고 있다.
병을 두려워한 아리아인들은 피정복민에 대해선 일체 만지거나 가까이 하는 것을 금지했다. 만약 격리된 촌락(지금의 록다운된 마을)에 들어갔을 때는 불결함을 떨어뜨리기 위해 물 등으로 몸을 반드시 닦아야 했다.

그들과 접촉하지 않기 위해 결혼을 비롯한 모든 일상이 공유되지 않도록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방역 조치들이 이후 풍습화되었고 이것이 사회적으로는 불가촉천민의 제도의 모태가 된 것이다. 이때 이들이 마련한 깨끗함과 더러움을 기반한 사상은 브라만교를 거쳐 힌두교 사상으로 굳어졌다.

전염병은 어느 시대에나 도시화로 인한 인구 밀집과 가축으로 인한 요인이 컸다. 농업의 발전은 도시를 만들었고 그곳으로 사람들이 모이면서 전염병은 더욱 쉽게 전파되었다. 가축은 동물성 전염병을 가져 왔다. 조류 독감과 돼지 독감이라는 이름이 붙는 전염병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흑사병 등 많은 질병들이 가축에서 유래한다.

육식을 금하는 불교와 힌두교에서 육식 자체를 금기시하는 것과 이를 담당하는 직업에 대한 차별은 바로 이러한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동물의 시체를 다루는 직업을 미천한 것으로 여기고 차별했던 우리의 역사와 비슷한 모습이다.

전염병의 원인을 약자에게 떠넘기는 것은 서구사회에서도 현재 진행중이다. 19세기 미국에서는 전염병이 이민자들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콜레라는 아일랜드인이, 결핵은 유태인이, 소아마비는 이탈리아인이 원인이라는 생각이 아주 오랫동안 전해졌다.

어느 민족도 미국 사회에서는 후발 이민자라 초기 정착할 때 많은 고초를 겪었다. 초기에 빈곤과 더불어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환경에 살며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았기에 확실히 전염병은 그들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발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차별의 이유가 됐다.

우리도 코로나 초기에 대구 신천지교회에서 집단발병하자 대구가 최초 발원지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이 있었다. 이후 이태원 클럽이나 택배 물류센터, 외국인 노동자, 개척교회, 정신병원과 요양병원 등이 비난의 화살을 맞았다.

사회적 도움이 필요한 곳이 집중 타겟이 되는 가슴 아픈 사연이 많았다. 코로나 문제가 제대로 해결이 안되니까 심신이 지치고 이에 따른 혐오 반응은 더욱 공고해진다. 누군가 마스크를 안 쓴 채 사진이 찍혀 온라인에 올라오면, 온라인에서 잡아먹을 듯이 몰아세우며 마녀사냥을 한다. 자유로운 시대와 맞지 않는 모습이다.

권기철 국제전문 기자 speck007@viva100.com